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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축제] 하나님의 요청 (행 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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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요청 (행 8:26~40)


새생명축제일이 한 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기도로 준비하고 많은 면에서 준비를 해 왔는데 이제 하나님이 정한 귀한 새생명을 탄생하는 한 주간 앞두고 여러분과 함께 오늘 읽은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사가 있듯이 하나님에게도 지대한 관심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연 으뜸가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왕관인 인간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세상에 많은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어 기쁨과 구원을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는가 하면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몰라 인생을 방황하면서 허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이들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일을 할까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장 귀한 파트너는 바로 저와 여러분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느날 갑자기 구름에 대고 하늘에서 “야 다 예수 믿어야 한다.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 간다.”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셨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은 그런 방법보다 하나님의 창조의 왕관으로 삼고,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의 자녀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수없이 많이 죽어져가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데 쓰임 받는 도구가 될 때 우리 인생이 빛날 수 있습니다.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있을 텐데요. 아주 값비싸고 귀중한 물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죽는 날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의 가치가 아무리 귀중한 것일지라도 사용되어지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으로 치면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귀중한 손님이 오실 때 그것을 사용하고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면 그것의 값어치는 아주 높은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돈 많고 능력 있고 잘나고 배경이 좋아도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사용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즉 하나님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인간은 불쌍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도구로 이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중요한 질문 아닙니까?

오늘 읽은 본문에는 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빌립집사는 누구인가요?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초대교회가 7분의 신임집사님을 선택 합니다. 사도들이 말씀전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무하기 위해서 그 이외의 일, 구제하고 봉사하고 섬기고 관리하고 행정 일을 맡아서 할 충성스런 집사 7을 선택합니다. 


선택의 기준은 

첫 번째, 성령 충만한 사람,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계획과 말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할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사람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의 지혜나 경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일할 수 있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

세 번째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인정받는 사람

이 세 가지의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을 초대교회가 집사님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 일곱 분의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빌립집사입니다. 이 빌립집사님이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어디인가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한 150km에서 20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대대로 남쪽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살고 있는 유다지파가 지배하고 있었던 남왕국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지역에 살고 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아들 여로보암 때 나라가 둘로 나누어지면서 북쪽 사람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건설했고, 다윗의 후손들로 이어진 다윗 왕가가 이어가고 있는 나라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왕국 유다를 건설했습니다. 이 두 나라가 본래는 한 나라였지만 둘로 나눠지고 난 다음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앗시리아가 이 나라에 쳐들어와 700년대 초에 나라가 초토화 되고 앗시리아 사람들이 이곳에 이주해 와서 살면서 앗시리아의 종교 문화 정치 모든 것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이 없어지고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혼합결혼이 이루어지게 되고 혼합 종교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정통적인 이스라엘 종교와 민족성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약 700여년 가까이 남왕국 유다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사마리아 성을 지나가시다가 그곳에 있는 수가성의 어느 여인을 만나서 전도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전도를 받은 사마리아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접근 합니까, 말을 겁니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민족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오늘 본문에 보면 빌립집사가 가서 전도를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빌립집사 이전에 예수님의 열두 사도나 어느 사람도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사람들과 다름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한 전도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빌립집사입니다. 

빌립집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언했을까요? 

그는 종교적인 편견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민족적인 편견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이 옳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자기의 의에 빠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빌립집사가 유대인인 우리만 구원을 받고 유대인인 우리에게만 은혜가 있고 민족적인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절대로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나 돼지처럼 취급을 했었습니다. 

하나님이 빌립집사를 들어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첫 번째, 이 빌립집사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그의 민족성 그의 인종, 문화, 그의 됨됨이, 그의 조건이나 환경 등을 따져가면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빌립집사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민족적인 장벽을 뛰어 넘었고 자기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독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그가 최초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인간적으로 봐서 사회적으로 봐서 종교적으로 봐서 정말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생명축제를 앞두고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을 가져야 그런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거기에 얼마나 많은 장벽이 있을 수 있나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세상의 장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애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방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민족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얼굴 색깔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될, 구원 받아야 될 불쌍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 우리는 빌립집사처럼 나가서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빌립집사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빌립집사는 하나님의 음성에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8장 25절에 보면, 빌립집사가 사마리아 성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복음을 다 증언하고 나니까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을 합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6절)

"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29절)

예루살렘에서 가사는 서남쪽으로 약 70km 떨어진 마을입니다. 이 마을을 지나게 되면 이제 팔레스틴 남쪽이고 지금의 지중해 연안으로 가게 되고 또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목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광야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이디오피아의 여왕인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유대교에 입교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마차를 타고 자기의 고국 이디오피아로 돌아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 거기서 이집트를 지나 이디오피아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가에 하나님께서 이 빌립집사를 보낸 것입니다. 그가 유대교에 입문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는데 성경 이사야서 53장 7절을 읽고 있었는데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이 귀한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증언하라고 빌립집사를 갑자기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잘 증언하고 있는 빌립집사에게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 남쪽 70km 떨어진 가사까지 가라고 하면 거리가 꽤 멉니다. 그리고 광야지역입니다. 복음을 잘 증언하고 있는 이 빌립 집사에게 사마리아에서 가사까지 가라고 하면 거리가 꽤 먼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광야지역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제가 사마리아 전도를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남아 복음을 더 증언하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요?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빌립집사는 하나님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급히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간혹 가다 기도하시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의 도움이 필요한데 시간을 좀 내 줄 수 있느냐? 내가 이러이러한 일로 너의 몸이 필요하다. 너의 시간, 너의 재물, 너의 재능이 필요한데 나를 위해 좀 사용해 다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설교를 통해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세요. 성경을 읽으실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때나 여러분에게 다가와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어떤 반응 하나요? “하나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절 보고 지금 선교사로 나가라고 그러는데 제가 가정도 있고 말도 잘 못하고 하나님 저는 돈도 재능도 없습니다. 그런데 절 보고 가라고요? 하나님 정말 가라는 것 맞습니까? 하나님 기도할 시간을 좀 주세요. 제가 보기에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반응을 보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요청을 하시든 간에 우리는 논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요청에, 요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나요? 빌립집사도 충분히 하나님께 이런 대꾸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남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빌립집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지금 가사지역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로 사용 되어 지려면 하나님이 내면의 세계에서 말씀하고 계실 때, 하나님 맞습니다. 제가 듣겠습니다. 제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100% 순종할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닙니다. 지금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다시는 여러분에게 뭔가를 요청하시지 않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느 미국목사가 쓰신 간단한 설교를 읽게 되었는데 그 미국목사님의 글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어느날 설교 준비를 하려고 인터넷을 켰더니 이메일이 하나 왔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젊은 집사님이 수요일에 저녁성경공부 기도모임을 마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가는 길에 목사님이 하신 설교내용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설교 내용은 사무엘이 어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내용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사무엘이 어렸을 때 엘리제사장 집에서 엘리제사장을 도우며 살았는데 밤중에 하나님이 불렀습니다. 그 때 사무엘은 어린 나이에 엘리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달려갔습니다. “내가 안불렀다” 세 번째 그런 음성을 듣게 되자 엘리제사장이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는 줄 알고 하나님이 부르시니 하나님이 부르시면 “예” 라고 대답해라.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시고 다가오셔서 뭔가를 요청하십니다. 이런 메시지가 그날 수요일 설교내용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이 집사님이 운전을 하고 가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요즘도 사람들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나요? 하나님 요즘도 사람을 부르시나요? 정말로 요즘도 부르신다면 저에게 다가와 말씀해 주세요. 저를 사용해 주세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가고 있는데 갑자기 가슴속인지 머리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디에선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음성이 너무나도 납득이 안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조금 있다가 코너에 가게가 있을 텐데 그 가게에 들어가 우유 5통을 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차를 세웠습니다. 

“하나님, 우유 5통을 사라고요? 뭐하려고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 맞습니까? 나는 우유가 필요 없는데 우유를 사라고 하는 분 하나님 맞으세요?” 

속으로 생각하기에 혹시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이 아닌가? 그래 나에게도 우유가 필요할 수 있겠지? 아내하고 아이들에게 줘야지, 음성을 듣고 가다가 차를 세워 가게에 들려 우유를 샀습니다. 조금 가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이제는 몇 불럭 가게 되면 코너에 허름한 집이 있는데 그 집 식구에게 그 우유를 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황당했습니다. 우유를 사라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어느 집에 가서 우유를 주라니, 지금 밤 10시가 다 되었는데요, 그런 그는 의심을 가지고 가고 있는데 정말로 몇 불럭 가니까 코너에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이 우유를 들고 내렸습니다. 늦은 밤 많은 사람들이 다 자고 있는데 그 집에 희미한 불빛이 비췄습니다. 벨을 눌렀더니 어느 우락부락하게 생긴 히스페닉 사람이 나오는데 그 집사님이 우유를 주려고 하니까 남자분이 하는 말이 뒤로 돌아 누군가를 부르는데 어느 히스페닉 여자분이 아기를 안고 나옵니다. 

그 때 이 남자집사님이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면서 우유를 주니까 아기를 안은 엄가가 우리는 맥시코에서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는데 남편이 실직을 했습니다. 우리는 영어도 잘 못하고 가진 것도 없어 아기 우유살 돈도 없어 눈물로 지새던 어느 날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지요. “하나님, 우리 아기에게 우유를 먹일 수 있도록 천사를 보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우유를 받으면서 이 아기 엄마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당신이 천사세요.” 이 남자 집사님은 우유를 주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 주고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께서 또다시 말씀하십니다. “잘했다.” 

이 글의 이 남자집사님의 마지막 말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 이든지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논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시대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상식에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존심을 뛰어 넘어야 될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말씀하십니다. 빌립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날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 주위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 가서 전도 좀 해,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여러분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 나 그 사람하고 싸웠어요. 나는 그 사람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과 상황으로 전도할 수 없다고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전도 하라”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한 사람, 하나님의 예민한 음성에 즉각 순종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사람을 붙이십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간에 듣고 즉시즉시 행동하는 사람, 주위에는 정말로 하나님이 구원해야할 많은 사람을 보내주십니다. 이 간다게 내시 같은 사람,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자기 고국에 돌아가서 혼자만 믿었을까요? 39절에 보면, 이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고국에 돌아갔더라고 했습니다. 이 한 사람을 구원해서 이 사람 때문에 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지요? 누군가를 한 사람 전도하게 되면 그 사람 때문에 그 가문이 다 주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보고 전도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수없이 많은 불신자들을 보고 우리보고 전도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갈등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VIP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종교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절에도 다녀보고 성당에도 다녀보고 교회도 다녀보고 각가지 종교를 다 경험했지만 어디에서도 은혜를 경험 못해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가 다시 한 번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아주 갈급해 있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여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한 마디만 전도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며칠 전 우리 교회 집사님하고 성경공부를 하는데 그 집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습니다. 나는 젊어서 아기하고 살 때 나는 이다음에 나중에 종교를 갖게 되면 절에 갈 거야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어느 한 권사님이 그 집사님을 볼 때마다 아기 엄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 교회 나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데 자기는 귓전으로 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울에 올라와 살다가 자기가 나이 많이 들어 교회를 가고 싶은데 아무도 자기에게 전도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 발로 교회를 걸어가기는 좀 그래서 누가 나에게 전도를 해 주면 좋겠는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우연히 어느 분의 전도로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런 분들 많이 계십니다. 주위에 한 마디만 전도해도 교회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영적으로 무르익어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에 민감한 사람,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사람, 그리고 100% 순종하려고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 주위에 이런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십니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살면서 사업에 성공하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학업을 잘해서 박사학위를 따고 지식적으로 남들보다 뛰어나는 것 아름답습니다. 운동을 해서 그 분야에 최고가 되는 것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 되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승자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최고의 승자가 있다고 한다면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들입니다. Soul-winners,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죽어가고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영혼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새생명축제는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오자는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 죽어가고 있는 사람,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그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자고 하는 하나님의 관심의 표현이 바로 새생명축제인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혼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주일 남았습니다. 이제 여러분 주위에 그토록 기도하고 있는 태신자가 있지 않습니까?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생명축제를 위한 특별새벽기도에 나오셔서 그 영혼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주일 동안 주위에 여러분이 전도만 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많은 사람들, 아니 저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들이 계십니까? 가슴에 품고 기도하시면서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준비하셔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다음주일에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빌립집사님처럼 가까이 수레에 가서, 그 분들의 삶에 처소에 찾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해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백성이 되고 구원의 자녀가 되는 역사가 다음 주일에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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