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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옛사람과 새사람 (엡 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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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과 새사람 (엡 4:17~24)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1. 시작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이방인(비 그리스도인)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 이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이며 문제입니다. 타인들이 우리를 욕하고 꾸짖는 것은 차치 하고도 우리 스스로도 이 문제로 힘들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옛사람

오늘 본문에서 바울도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전제하고 있는 것이 그들도 이방인들과 같이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엄히 꾸중을 하면서 교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특징들을 몇 가지로 지적합니다.

첫째는 그 마음이 허망(futility)하다는 것입니다. 즉 생각하는 것들이 다 하잖은 것이고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허무주의적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허무주의적 삶의 특징은 육체의 욕망에만 지배당하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이들을 위한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투쟁에 적극적이고 그래서 다 죽더라도 나만 살아야 한다는 극단적 이기심에서 전쟁도 서슴치 않습니다. 로마 제국시대의 네로 황제가 그랬었고, 근대 독일의 히틀러가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둘째는 총명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져 무지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영생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므로 영생의 회복은 단순한 도덕의 회복이나 혹은 그 반대로 영적인 신비의 능력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영적 어두움과 무지를 깨뜨려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길이 도덕이나 철학(혹은 종교)이 아니라 복음(계시) 진리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교인들이 아직도 여전히 말씀을 통한 복음의 깨달음보다는 도덕과 종교적 열정으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중직자 한분이 아주 중한 병에 걸렸었답니다. 돌아가시기 전 얼마 전에 자신의 병 상태를 알고는 담임 목사님을 찾아왔답니다. 오셔서는 보따리 하나를 내어놓으시면서 “목사님 제 병 상태를 아시죠. 이제는 준비해야겠는데, 그동안 제가 잘못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겁이 납니다. 이대로 죽으면 지옥 갈 것 같은데 어쨌든 용서를 받고 죽어야 할 것 같아서 여기 이것을 가져왔습니다. 저 천국 갈 수 있게 기도 좀 해주세요”하고는 돈 보따리를 내어 놓았답니다. 

여러분! 혹 돌아가실 때 이렇게 가져올 돈이 있으면 지금 건강하실 때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헌금하십시오. 대신 복음 진리를 바르게 알고 믿으십시오. 용서는 돈으로 얻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권능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셋째는 이방인은 감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감각이 없다는 것은 감정 판단과 조절 기능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해버린 것입니다. 즉 죄의 본성이 요구하는 육욕성에 따라 살도록 자기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 문제를 알고는 나름으로 애를 씁니다. 교양을 쌓아가거나 혹은 스포츠 문화 예술 등으로 육욕을 순화 시키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세상의 문화는 육체의 현저한 것들을 더 강화 시켜나가는 결과를 빗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문제가 걸립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다가도 때때로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보면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에 빠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 다윗도 그랬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3. 새사람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우리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배우는 사람입니다(20절). 그래서 다른 말로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누구를 통하여 어떻게 배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그리스도를 다르게 가르친 사람들 곧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성경을 가르치지만 잘못된 내용을 전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통하여 공인된 목회자의 가르침을 따르십시오. 뭔가 새로운 것이 없다고 여기며 딴 것을 찾으러 방황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여러분의 영혼이 죽을 수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영적 질병에 감염되어 복음을 외곡하거나 그리스도를 배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에게 무릎 꿇고 머리 숙여 안수 기도를 받지 마세요. 

바울은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모르면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단은 예수님을 별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천지라는 이단은 거저 계시록의 예수님만을 말하는데 복음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 없이는 신실한 믿음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근래 우리 가운데 어느 성도가 안수 기도와 예언 기도를 한다고 주변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 예수! 그 이름은 부르지만 예수가 누구인가 물으면 선지자 같은 분이라고 답하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말하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답답해진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예수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더란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버리면 그 누구든지 그리고 어떤 일도 진리가 아니기에 그 말을 따르면 안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앞서 옛사람의 특징들을 살피는 중에 가장 현저한 부분이 방탕에 자기를 방임시키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행동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집요하게 나타나고 있슴을 시인했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옷과 같기 때문입니다. 옷은 벗으면 춥고 몸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옷을 벗지 않으려 하고 붙잡고 삽니다. 그 옷이 비록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자연환경은 오래된 옷도 입고 지냈던 것입니다. 

옛사람을 벗으려면 새사람은 먼저 새 옷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 새 옷이란 곧 성령의 갑주를 의미한다고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중 6장에 가서 이 갑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지침을 내리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 의의 흉배,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복음의 신발 등으로 말입니다. 이런 새옷이 준비 되면 헌 옷은 벗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새 옷은 전신갑주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입은 옷이 전신갑주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약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투구는 썼고 방패는 가졌어도 칼이 없는 성도가 있고, 혹은 의의 흉배가 없거나 또는 평화의 신발을 신지 못한 성도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 좋고 열정이 있고 지혜로운 성도라도 다른 부분이 비어있고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하며 겸손히 자기를 살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이 부분을 인식하고는 말하기를 “섰다 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사람을 두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속에 있는 대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마 7:3)고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이제 셋째로, 새사람은 그 근본이 그의 심령이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23절). 이 말씀은 영어성경(NIV)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

이 번역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곧 심령의 새로움은 마음(생각)의 태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가 받는 세례의 의미를 이와 비슷하게 가르쳤습니다. 

물은 . .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벧전 3:21)

그렇습니다. 새 사람은 벌써 육체와 행동으로 온전해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향하여 마음의 태도를 새롭게 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의 태도는 단회적인 결심이나 결단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습관화 된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며 무시로 깨어 주님과 교제 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려고 열정을 갖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를 위하여 사막의 기도자가 되기도 했고, 산중 수도원의 수사가 되기도 했고, 어떤 이는 맨발로 평생을 사신 분도 있습니다. 분명히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울어도 못하고 눈물 많이 흘려도 죄를 씻지 못합니다(찬 544장).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기에 예수님을 의지하며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또 실수 하고 또 실패보아도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나아갑시다. 그러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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