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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사장에서 선지자로 (겔 1:1~3, 겔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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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에서 선지자로 (겔 1:1~3, 겔 3:1~4)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환경이 좋아서만 쓰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호세아는 가정이 파괴되는 아내의 외도를 통해 쓰임 받았다. 여기 에스겔도 비슷하다.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이며 제사장이다. 그는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갈 때 함께 이송되어 바벨론으로 간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포로 수용지로 사용된 그발 강변 델아빕에 거했다. 그러나 에스겔은 포로가 됨으로 예언자가 되었다. 망국으로 인해 짓밟힌 동포를 위로, 격려하는 자로 활동한 예언자였다. 에스겔 37장에 기록된 해골 골짜기 환상은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기사회생하는 길이 하나님의 능력에 달렸다는 것으로 절망을 넘어선 소망을 선포한 것이다.

에스겔은 어떻게 하여 제사장으로서 포로의 삶을 뛰어넘는 메신저, 즉 선지자가 되었는가?


 1. 이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겔1:1~2)

겔1:1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달 오일이라.”

이 말씀 속에 이상을 본 장소와 날짜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에스겔의 이상을 본 경험이 분명함을 나타내준다. 때와 장소가 분명하면서 그 이상을 볼 때의 정황이 또한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이상을 보게 된 에스겔은 포로였다. 

위의 본문을 보라.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사로잡힌 지 오년 그달 오일이라.” 에스겔은 포로의 신분으로서 이상을 본 것이다. 

포로는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이다. 가장 불편한 삶의 사는 자다. 미래에 대한 꿈도 없이 가장 절망적 삶을 사는 자다. 포로는 노예일 뿐이며 짐승보다 못하며 지배자의 의지에 따라 다루어지는 물건일 뿐이다. 포로에게는 자유도 없고 낭만도 없다. 최악의 삶을 살 뿐이다. 그런데 에스겔은 이상을 보는 자가 되었다. 사람처럼 살기를 포기해야 하는 사로잡힌 자의 자리, 그 절망의 자리가 이상을 보는 자리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고 죄의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너무 자학해서는 안된다. 술 먹어서 교회 나오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래도 나와야 한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사로잡히고 절망에 처하였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장난 것으로 보지 말자. 모든 것이 끝장 난 그 상실의 자리에 하늘이 열리는 신비로움이 기다릴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상을 체험할 때 겔1:3을 보면 말씀이 특별히 임하였다고 기록한다. 우리는 환경이 점점 나빠져 갈 때 하나님의 은총마저 더 멀어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환경이 최악이 되어도 하나님의 은총은 더 크게 열릴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특별하심이 더 할 수 있음도 믿어야 한다. 절망의 자리가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다면 은혜의 자리다. 그것을 믿고 지내야 한다. 모든 것이 형통해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것이 실패한 것이다.


2.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겔2:1~2)

에스겔은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는 것을 보았다.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었다. 에스겔은 이 모양을 보고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었는데 겔2:1~2을 보라. “일어서라.”는 말씀을 듣는다. 겔2:2에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에스겔은 음성을 들었다. 또박 또박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었다. 음성이 들려질 때 엎드리어 들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 모양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 에스겔과 쌍둥이 같은 다니엘, 모두 다 포로 출신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 다니엘도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볼 때 자신이 썩은 듯 하여 엎드러졌다. 실로 거룩하신 형체 앞에만 서도 추하고 더럽고 보잘 것 없음을 깨닫는다. 

에스겔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 앞에 버티고 있을 의가 없다. 버티고 있을 만한 힘도 없다. 즉각적으로 겸손하게 몸을 떠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정말 죄성을 가진 흙으로 만든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할 때 더욱 나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내려놓아야 한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들을 수 있다. 조이 도우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란 책을 썼다. 거기에서 25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듣지 못하는 것은 교만 때문이다. 분주함 때문이다. 세상 열심과 틈만 나면 미혹하는 죄 때문이다. 세상 뉴스에만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적 안테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엎드려 말씀을 듣는 자에게 정확하게 다가오신다. 이 세상에서 큰소리치며 뭔가 이뤄낸 사람이라고 으시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전에 들어와서 오직 엎드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SBS에서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코메디안 철학자(신비주의자)라고 밝힌 티모시 프리크와 로버트 프라이스의 정체 불명의 교두로 예수를 부정하고 있다. SBS는 너무도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모두 다 교만해서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이다. 

나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나는 엎드려야 한다. 담임목사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나는 엎드려야 한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회사 사장은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기장은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나는 가장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3.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겔3:2~4)

겔3: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고 하였다.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지만 새로운 사명의 일을 받았다. 그것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외치는 일이다. 자기의 말을 떠들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내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이다. 사명이 있는 자는 새로운 삶을 산다. 사명은 반드시 해야 되는 일, 즉 죽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다.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에스겔은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성소가 없고 성문이 없다. 대를 이어 감당하던 직분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다시 사명을 받아 예언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명을 받을 때 에스겔은 순종함으로 받아들였다.

겔2:1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에스겔은 일으켜 세움을 받았다. 그리고 받은 말씀은 패역한 족속이 되어 버린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라는 것이다.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여 전갈 가운데 거할찌라도 두려워말고 가라는 것이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서 고하라고 하셨다. (겔2:6~7) 

에스겔은 엄청난 말을 듣는다. 그리고 겔2:8에 와서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고 하신다. 그래서 에스겔은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받아먹는다. 

겔3:2~3에 받아먹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그 말씀에서 두루마리를 먹는 에스겔의 순종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스겔은 일어서라 하니 일어섰다. 먹으라 하니 입을 벌렸다. 에스겔은 오직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써 마침내 무너진 제사장 자리에서 새로운 시대의 메신저가 되는 사명을 받았다. 사명자는 오직 말씀을 들려주는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을 때 사명을 받는다. 만약 두루마리를 먹여 주실 때 거절한다면, 일어나도록 세워주실 때 거절한다면 사명을 받을 수 없다.

오늘 에스겔 제사장이 그발 강 포로 수용소에서 이상을 보았다. 음성을 들었다. 사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사역에 일어섰다. 예언자의 삶을 살며 민족의 회복과 소망의 환상을 던져 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로잡혀 있을 때 이상을 보았다. 엎드려져 있을 때 음성을 들었다. 순종했을 때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 일을 맡기시는 신령한 체험은 내가 꼭 잘 나가고 있을 때만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절망의 때에 선지자가 될 수 있고 약함과 겸손으로 있을 때 선지자가 될 수 있고 나의 의지와 계획을 내려놓고 순종을 다짐할 때 바로 그 결단의 때에 사명의 선지자가 될 수 있다. 내가 무슨 말씀 전하는 예언자가 된단 말인가?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사역을 맡는단 말인가? 이런 겸손을 핑계 삼는 변명에 안주하지 말라. 

민11:26~29에 모세는 여호수아의 청원을 듣는다. 진에 머무는 엘랏과 메닷에게 예언이 임할 때 여호수아는 이 예언을 금하라고 청원한다. 그때 모세는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여호수아야 시기하지 말라. 다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태도를 바꾸자. 생각을 바꾸자.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은총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주님께 위임해 드릴 때 누구든지 이상을 볼 수 있다. 평신도로서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도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새로운 사역이 열려진다.

나는 김 권사를 위해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왜, 그에게 식도암이 왔을까? 그런데 암이 퍼지지 않아서 방사선 치료가 필요치 않는 결정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에스겔처럼 그발 강에 있지 않고 삼성 병원에 있었으나 빼앗겼을 때 이상을 본 것이다. 엎드려졌을 때 음성을 들은 것이다. 순종함으로서 새 삶의 사명을 받은 것이다. 

앞으로 그는 수많은 사람의 절망을 향해 소망과 위로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아니 우리 모두가 은혜의 새로운 체험을 통해 선지자로 살아야 한다. 사람을 지옥의 문에서 인도해 내는 전도자,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어 예배드리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크리스챤이 아니라 농사일 밖에, 회사일 밖에 모르던 내가 사명을 받은 CM장으로, 중보기도자로, 섬기는 봉사자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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