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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함 (고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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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함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5) 


I.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는 사랑의 또 다른 특성으로 사랑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II. 이 구절의 의미 

그러나 이 구절은 번역의 부족함으로 의미가 왜곡되었기 때문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A. 원어적 의미 

희랍어 성경에서 이 구절의 본래 의미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아니하며”입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참된 아가페의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한다’라는 단어는 희랍어 ‘제타이’인데 히브리어 ‘바카쉬’를 옮긴 것입니다. 이 바카쉬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언약백성이 하나님을 찾을 때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그래서 ‘추구한다’의 의미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라가고 목적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삶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B. 참뜻 : 자신을 추구하지 않음 

이렇게 볼 때 참된 아가페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앞에 언급된 것처럼 자신을 추구하며 살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을 전심으로 추구하는 삶은 회심 이전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III. 자기사랑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사랑은 본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충분히 만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사랑은 무엇입니까? 

A. 계명에 없는 자기사랑 

놀랍게도 성경에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현대 정신과 반대되는 현상입니다. 오늘날은 많은 이들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그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까요? 다음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것이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에 하나만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세상이나 물질, 일을 자기 목숨보다 귀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딛고 궁극적으로 그 일들을 통해서 성취할 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말씀, 교회, 성도, 가족 등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은 다양해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자기를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앞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떤 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니 별도로 자기를 사랑하라고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만약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미 자기를 올바르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기를 그릇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똑바로 사랑하라고 일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는 계명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B. 두 가지 사랑 

사랑이 모두 하나인 것처럼 보여도 사랑하는 대상의 위치에 따라 ‘사용하는’ 사랑과 ‘누리는 사랑’으로 나눠집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둘은 다르고 진정한 사랑은 누리는 사랑입니다. 사용하는 사랑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값비싼 책을 좋아하고 아낀다면 그 책 자체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가져다 줄 지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용하는 사랑입니다. 이처럼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모든 사물들은 궁극적으로 사랑이 거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에 비해 누리는 사랑은 그것을 사랑하는 더 이상의 목적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것만이 참다운 사랑입니다. 

만약 어떤 형제가 자매를 뜨겁게 사랑하며 쫓아다니는데 그 사랑이 부모님의 재산 때문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용해야 할 것과 누려야 할 것을 정확히 구별하여야 합니다. 사용해야 할 것을 누리고 누려야 할 것을 사용할 때 인간의 불행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사용돼야 할 것들이지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C. 자기사랑의 정체 

사랑은 본래 영원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을 아는 가장 훌륭한 비결은 철학적으로 영원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랑이 삼위하나님께 속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사랑하게 될 때 생깁니다. 피조물은 시간과 함께 완전함을 잃어버리고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계속되는데 대상은 소멸되어 사랑은 그 목표를 잃어버립니다. 결국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될 뿐입니다. 거기서 인간의 끊임없는 고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이 우리 영혼에 질서가 잇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하면 우리의 영혼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이것은 삶의 무질서로 마구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마음의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사랑의 정체는 바로 하나님을 그릇되게 본뜨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방탕은 내적인 억제 없이 잘못된 욕망을 삶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성품 안에서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하시는 분이신데 이렇게 모든 것들을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선한 것을 하고자 하시는 소원이 솟아나오는 것이지만. 이것을 억제하지 않고 펼치실 때 오히려 인간은 행복해지고, 행복해진 인간을 통해 하나님도 당신 자신 안에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그릇되게 본뜨면 이것은 모두에게 파괴적인 행동이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장 좋은 것들이 인간이 마치 자기가 원천인 것처럼 행사하려고 하는 순간 비뚤어진 자기사랑이 되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고자 하는 모든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쓰라린 상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IV.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인간의 행복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가 공존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행복이 결국은 하나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A. 두 왕국과 사랑의 질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차이는 사랑의 질서 차이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 중앙에 하나의 큰 돌을 떨어뜨리면 오직 하나의 파문이 호수 전체로 번져가듯, 하나님의 나라에는 오직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에 있어서는 하나의 일치를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하나의 파문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방법은 많은 숫자나 높은 지위, 행복함이 아닌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방법은 바로 마치 다양한 악기가 하나의 아름다운 곡을 웅장하게 연주하듯 사랑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중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나라의 중심은 자기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자기는 하나가 아니라 사람 수만큼 존재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나라는 궁극적인 평화를 이룰 가능성이 없습니다. 각자가 자신을 확장하려하기 때문에 끝없는 갈등, 경쟁, 다툼에 휩싸입니다. 


B. 사랑의 중심일 수 없는 인간 

결론적으로 인간은 사랑의 중심일 수도 없고 사랑이 향하는 목표일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되고 은혜로 사랑을 안 사람이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갈 때 이 사랑이 또 다른 사람에게 흐르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참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함으로 진정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C. 자기사랑과 진리의 빛 

문제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공정하게 자기를 사랑하려고 해도 곧 육체를 편애함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육체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 가지로 시간 속에서 시들어 가고 사랑만 남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들을 인간 자신의 힘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진리의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진리의 빛이 우리의 지성에 찬란하게 비칠 때 없었던 것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진리의 빛이 없었을 때는 돈, 욕망, 성공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빛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 은혜, 능력, 성품, 경건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끊임없는 진리의 빛 아래 살지 아니하고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주는 속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진리의 빛 아래서 살 때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사용해야할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됩니다. 


V. 결론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이 바로 은혜의 힘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창공을 향해 비상할 수 없음은 마음의 사랑의 줄이 자아에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모양으로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고 생각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번민하지만 마음으로는 자기를 섬기는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지만 자기 사랑에 빠졌을 때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운명적으로 자기 사랑에 매여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은 그러므로 우리의 자기 사랑의 비참한 결과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동시에 그 자기 사랑의 늪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은총의 손짓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올바로 아는 사람들은 마음속의 더러운 자기 사랑은 함께 못 박히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처럼 자기가 하나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를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데려가는 십자가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등지고 살 때에는 어디서도 주님을 만날 수 없지만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없는 자기 사랑을 끊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그 분의 은혜를 구하며 우는 사람들은 불현듯 자기 마음에 와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으며 사는 데 있고 그런 이들의 의무는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은혜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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