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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 삶 그리고 존엄 (마 27:3~8) -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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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삶 그리고 존엄 (마 27:3~8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라. 

요즘 자살 소식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연예인 안재환씨가 자살하면서 또 자살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자살할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자살 사례는 있습니다. 본문은 가룟 유다가 자살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9장을 보면 아비멜렉이 전쟁에서 여인이 던진 돌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장수는 여인에게 맞아 죽으면 수치입니다. 그래서 병사에게 나를 죽이라고 해서 아비멜렉은 죽습니다.(52-54) 사울은 불레셋과 전쟁 중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곧 바로 포로로 잡혀갈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칼로 자살해 죽었습니다(삼상 31:1-6). 사무엘하17장을 보면 다윗왕의 모사 아히도벨이 경쟁에서 밀려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해 죽습니다(21-23). 성경에도 이런 자살 사례들이 나옵니다. 


증가 추세 

특히 오늘은 20~30대의 자살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20~30대의 자살은 10만 명당 24.8명이라고 합니다. 1997년 10만 명당 13명이던 것이 2007년은 24.8명으로 늘어납니다. 사망순위 암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자살자 중 남성은 7,747명이고 여성은 4,427명입니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서 1.7배나 많습니다. 이 수치는 OECD국가 중 자살 증가율 1위입니다. 생활이 넉넉해지고 실패율이 많아지고 경쟁이 심해지고 유약해지는 사람도 늘어 가는데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자살 원인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죽는 일입니다. 얼마나 아프면 죽겠습니까. 그래서 시인 김지하는 “죽을힘이 있거든 차라리 살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든 죽음을 사람들은 감행합니다. 하나는 “정신적 중압감” 때문일 것입니다. 빚 때문에 옥죄어 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헤어날 구멍이 없다고 판단되니까 삶을 포기할 것입니다. 안재환씨도 표면상 이유는 그렇습니다. 

입시로 인한 중압감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부모의 기대는 너무 크고 나는 가능성이 전무하고 거기서 오는 중압감을 감당할 수가 없고 그래서 앞이 캄캄해서 높은 아파트에서 떨어져 삶을 포기하는 것일 것입니다. 가난의 중압감도 원인입니다. 가난은 가장 참기 힘든 고난입니다. 여러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죽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중압감 때문입니다. 내일이면 나아진다는 희망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9월 7일 대구 율하동에 사는 30대 중반 여성은 남편의 사업실패로 비관하다 5세, 7세난 두 아들과 농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8월 27일에는 30대 초반 여성이 살기가 힘들다고 서울 지하철 5호선 개화산역에서 5세난 딸과 11세 된 아들을 양 팔로 끼고 전동차에 뛰어들었습니다.  

“실패감”도 원인중 하나입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입니다. 스승을 팔고 배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만인이 다 알고 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이 실패감과 자괴감을 무슨 방법으로 수습하겠습니까. 그래서 죽음으로 속죄하려 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사업에 실패하고 인생을 실패하고 재기가 불가능 하게 느껴질 때 사람들은 죽음으로 해결하려고 자살을 감행합니다. “순간 분노”도 문제입니다. 오늘 가장 큰 문제는 “홧김에 일을 저지르는 일”입니다. 홧김에 살인하고 이혼하고 자살합니다. 이 화가 대부분 가정불화에서 비롯됩니다. 가정불화는 명절 다음 주부터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혼율도 명절 다음 주부터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것이 홧김에 이혼하고 살인하고 자살하는 경우입니다. 

오늘 삶의 환경이 생각하고 한 번 더 두드려보는 그런 환경이 없습니다. 옛날 집 구조는 화가 났어도 안방과 건넌방을 가려면 문지방을 건너야 하고 건너다보면 화가 조절되고 중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건널 공간이 전무합니다. 부엌도 윗방도 아랫방도 거실도 현관도 거기가 거기입니다. 분노를 여과시켜 줄 생활공간이 전무한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분노를 조절하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도, 해학도, 여유도 없습니다.  

어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는데 이웃집은 부잣집이었습니다. 그 집은 매일 저녁 갈비를 구워 먹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 들으라고 “저 갈비냄새가 지긋지긋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신은 왜 돈을 못 벌어오느냐”는 말입니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 남편들은 화가 납니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이 슬그머니 나가더니 마스크를 사 왔습니다. 아내가 이것을 쓰면 냄새가 안 나느냐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또 나가서 이번에는 방독면을 사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기가 막혀 웃으며 “당신 유머는 알아줘야 한다”며 넘어갔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주일날 갑자기 삭발하고 설교하셨습니다. 간밤에 목사님이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사모께서 화가 났던지 목사님의 머리를 잡고 흔들어 한쪽 머리가 다 빠졌습니다. 큰일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슬그머니 나가서 삭발을 하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설교시간에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 삭발했다”고 해서 잘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삶의 해학도 없고 분노를 다스리는 여과장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면 일부터 저지릅니다. 자살도 여기서 발생합니다. 

“모방 자살”도 문제입니다. 자살도 전염병과 같습니다. 어느 연예인이 자살하면 곧 따라하는 모방 자살이 있습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 이 모방 자살이 한동안 이어졌었습니다. 이번 안재환씨의 자살로 다시 모방 자살이 재발되고 있습니다. 지난 12일에는 양양군 서면 죽도면 공터에서 인천에 사는 65세난 김 모 씨가 승합차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4일에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만 천진해수욕장 근처 어느 모텔에서 37세난 김 모 씨가 방안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14일에는 울산에 사는 30세난 김 모 씨가 울산의 어느 공사장에서 승용차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질식사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자살자도 2007년도 통계를 보면 도시보다 시골이 더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강원도가 33명이었고 충청도는 31.7명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충청도 사람들이 행동이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자살 견해 

자살은 쉽게 말하면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파괴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파괴하고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나의 삶, 나의 생명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몫이고 은총의 선물입니다. 나는 나이지만 그렇다고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한일이 없습니다. 계획한 일도 노력도 힘쓴 일도 손끝하나 한 일이 없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섭리 중에 나는 세상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지만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은총과 수고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죽는 일도 내 계획과 무관하고 살고 죽는 일도 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엄숙한 존재이고 나는 하늘의 뜻이 내포된 나입니다. 그것이 나의 주체이고 값이고 가치이고 가치관이고 의미입니다. 그런 나를 내가 포기하는 것은 곧 나를 파괴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은총에 도전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살인 행위입니다(창9:6).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출20:13)고 했습니다. 성경은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살은 파괴행위입니다. 나의 생명을 파괴하고 나의 삶을 파괴하고 또 너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자살은 엄밀히 말하면 죽은 사람은 평안하고 산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안겨주는 파괴행위입니다. 내가 자살해서 죽는 것은 내가 단순히 죽는 것 그 이상의 고통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파괴로 안겨주는 일입니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는 청산에 모시는 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먼저 간 자식은 가슴에 묻는 일은 겪지 않으면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어렴풋이 위로하지만 당사자에겐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먼저 앞세운 고통을 참혹한 슬픔이라 하여 이를 가리켜 “참적”(慘迹) 이라 했습니다. 빛을 잃어 천지가 캄캄하다는 뜻으로 “상명”(喪明)이라고도 합니다.  

시인 정지용은 어린 아들이 폐질환으로 죽었습니다. 그날 밤 정지용은 죽은 어린 아들을 생각하며 시를 씁니다. 그 시 제목이 “밤에 홀로 유리를 닦듯”입니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 갔구나”하고 읊습니다. 이 때 육친의 죽음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 하여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애달픔이라 하여 “단장지애”(斷腸至哀)라고 합니다. 그 마음이 파괴되고 애달픈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런 고통을 어느 신학자는 “고난의 제3의 성례전”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으면 가슴에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슴은 오죽 부서지고 깨지고 파괴되겠습니까. 자식이 병사를 해도 가슴이 그렇게 파괴되는데 자식이 부모 앞에서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파괴가 오죽하겠습니까. 그 파괴는 나를 파괴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파괴하는 일이고 너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철없는 자식들은 살기가 힘들다고 실패했다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억울하다고 입시가 힘들다고 나 죽으면 그만이라고 한마디 하고 자살해서 죽어버립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영이십니다. 회복의 영이십니다. 소생의 영이시고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살은 이런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죽이는 일이고 소멸시키는 일이고 파괴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인이 할 일 

하나는 “사전에 예방하는 일”입니다. 자살자는 죽기 전에 징후를 남깁니다. 우리들이 좀 자세하게 관심을 가진다면 징후를 보고 사전에 예방할 수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징후가 나타납니다. “갑자기 식사량이 적어짐, 말이 없어짐, 잠을 못자고 멀리 떠날 사람처럼 신변 정리를 함, 불안해하던 사람이 갑자기 평정을 되찾고 초연해짐, 주위 사람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고, 신변을 지나치게 비관”하는 일들이 징후입니다. 이런 이웃이나 가족이나 친구들을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 자살한 안재환씨도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한 후에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눔”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나눌 일이 참 많습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누는 생활도 중요합니다. 특히 명절 때 같은 때는 이 나누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는 이 나눔을 소망하는 이웃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어느 세상이나 소외된 자, 가진 것이 아주 작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나눔이 없으면 그들은 반항자, 비관자, 원망자가 되고 때로는 공산주의가 그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공산주의는 가난한 지역, 가난한 나라, 가난한 민족, 가난한 국가에서 발생합니다. 가진 사람들이 나누지 못하면 불만자들이 발생하고 그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반항자들이 되고 공산주의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공산주의가 발생한 것은 기독교의 책임이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하고 안티 기독교가 발생하는 것도 기독교에 기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기독교가 할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누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무관심한 사이에, 아이들을 이끌고 전동차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자꾸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는 일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셋째는 “가치관을 확립해 주는 일”입니다. 자살은 가치관의 미확립 때문에 나타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다스려지지 않는 욕망과 허망한 꿈 때문에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유다가 좀 진정하고 예수께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면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 찾아갔으면 얼마든지 기쁘게 그를 맞았을 것이고 용서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죽음으로 끝냈습니다. 그 배신은 죽음으로 갚아지는 것이 아니고 회복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는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유다와 똑같은 배신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스승을 저주한 것을 보면 어쩌면 유다보다 더 지독한 배신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께 찾아가 용서를 빌었고 새 출발을 해서 마침내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도마의 실수도 적지 않은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용서를 빌고 그 일을 계기로 더 큰 일을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아프게 했고 핍박했고 고난을 주었습니까. 유다보다 더 지독한 배반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예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용서받고 사도로 활동하며 평생 동안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하며 사도직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 보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찬란한 역사를 일으켰습니까. 그런데 가룟 유다는 가치관이 미천했습니다. 미성숙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끝내버렸습니다. 죽을 일이 아니고 용서를 빌면 얼마든지 재기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자살하고 죽으면 그것으로 모두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사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삶의 결산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골격이고 중심이고 뼈대입니다. 자살자는 오늘 당장 앞이 캄캄하고 짐이 너무 무거워 감당할 수 없으니까 삶을 포기하겠지만 그때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인생도 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다 살고난 후에는 반드시 내 삶에 대한 결산이 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의무가 있고 엄숙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처럼 극단적인 행동은 금물입니다. 유다는 방법 중 최악의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살아가다가 좀 힘들 때 자살 충동은 누구나 다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한 번의 생각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살 충동이 일어날 때는 우리에게 부여된 가치관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나이지만 나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하나님을 위한 존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힘든 사람들, 실패한 분들에게 옆에서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한참 힘들어 할 때 누군가 그 옆에 있어 주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유다도 용서를 받고 베드로 못지않게 큰 사도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에게 부여된 가치관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 듯이 새로워질 때 거기에서 참신한 신앙인의 힘 있는 삶이 표현되고 증거되고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부여된 소중한 인생이고 삶의 몫인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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