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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명의 여인 (룻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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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여인 (룻 1:6~18)


I. 세 여인의 눈물

사사시대 베들레헴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내려가 잠시 살게 되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 엘리멜렉이 죽고 후에 장가들어 살던 두 아들도 차례대로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 - 세 여인만 외롭게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된 나오미에게 고국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절망과 슬픔을 털고 일어나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장면을 기록하는 룻기 저자는 문법에 맞지 않는 한 줄 글을 남깁니다. "일어나 돌아오려 하였다"는 단어가 주어는 분명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 동사를 사용합니다. 세 여인은 몸은 셋인데 마음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또 다른 의미로 정말 일어나 돌아오는 사람은 나오미 하나였습니다. 며느리 룻은 돌아오는 자도 돌아올 수 있는 자도 아닌 용납이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였습니다. 

룻기 저자는 이 신비한 의미들을 문법이 맞지 않는 한 문장을 통해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의 줄거리입니다. 

죽은 남편들을 묻어 놓고 세 여인이 서로 등을 기대고 살던 마을을 떠나야 했던 만감이 교차하는 상황을 룻기 저자는 참으로 담백하게 표현합니다. 

7절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있던 곳에서 나오고" 
"있던 곳!" 미운정 고운정이 배어 있는 곳입니다. 남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아프고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함께 따라 나서는 두 자부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청년시절을 보내 온갖 정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고국 - 어머니의 땅입니다. 길거리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까지 정들지 않은 것이 없는 땅입니다. 이 모든 마음을 담아 저자는 "있던 곳에서 나왔다"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룻이 있던 곳을 떠났다는 이 말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신앙적 결단에 비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아니 이 보다 더 큰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나오미는 청상이 된 두 며느리를 데리고 길을 가다가 생각하니 이 일이 젊은 두 자부에게 못할 짓이다 싶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해 보니 이 아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줄 수 있겠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처절한 가난 고독한 과부의 삶외에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오미 가족이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갈 때 하나님이 주신 땅을 팔고 가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땅과 가산을 몽땅 팔고 베들레헴을 떠났더랬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빼앗기지도 말고 팔지도 말라는 것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어떤 시험이 있어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약속의 땅이 무엇입니까? 
어떤 시련이 있어도 신앙의 길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의 길을 떠나는 것은 인생최대의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버리지 마십시오. 교회생활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교회를 버리지 마십시오. 선택하는 교회마다 실망을 했습니까? 한국의 5만교회를 다 벌벌 기어다녀도 믿음의 공동체 교회를 포기하지는 마십시요. 그 신앙의 땅에서 내게 붙여주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십시요.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은사를 따라 경륜을 따라 내게 주신 사역의 땅이 있습니다. 그 사역의 땅을 팔지 마십시요. 물론 일하지 않으면 시험도 적겠지요. 소그룹의 지도자(목자)가 되어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어떤 작은 사역이라도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사역이 없으면 섬기는 일이 없으면 상급도 없습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 사역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이 땅에 더 살아야 할 이유도, 건강해야 할 이유도, 돈을 가질 이유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 가족처럼 약속의 땅을 팔고 모압으로 떠나지 마십시요!

약속의 땅을 다 팔고 떠났기 때문에 나오미는 두 자부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들어가더라도 돌아올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며느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유대와 모압 국경에 서서 두 며느리에게 친정 부모 곁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냐 잘못된 일이냐를 떠나서 분명 나오미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생각이었지만 분명 며느리들을 사랑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가들아,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나를 선대(헷세드)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길 원하노라. 새 남편을 얻어 부디 사랑받고 살아야 한다." 국경에선 세 여인은 서러움에 서로 얼싸안고 통곡을 합니다. 

이 장면에서 성경 연구가들은 왜 나오미가 "아버지의 집"으로가 아니라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을까 고민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인의 심정적인 문제입니다. 아마 길을 떠나려 할때 친정 어머니들이 남편도 없는 외국으로 떠나는 딸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 그 어미의 아픔이 나오미에게 전달되어 그 눈물 흘리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겁니다. 

나오미는 인생의 모진 시련과 어려움을 겪어 왔는데 그 마음이 전혀 강퍅해지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인생 풍파를 견디다 그 심성이 삐뚫어질만도 한데 고운 심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사의 어려움을 감당하다가 상처를 받고 거칠어져 있습니까?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정상적인 눈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건강한 인격을 잃어버립니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고은 심성이었습니다. 그런점에서 나오미는 참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모압 국경선에서 얼싸안고 한스런 눈물을 통해 내는 세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지은 시처럼 상처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의 저자 정채봉 님은 "세상사"라는 시를 읊었습니다. 

울지마
울지마

이 세상의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어
세상은 
다 그런 거야
울지 말라니까


II. 세 여인의 갈림길

고국 땅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 새 인생을 시작하고 잘 살라는 나오미의 말에 두 며느리는 울면서 시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그때 11절-13절에서 나오미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당시에 과부들이 재가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5-6 말씀을 따라 계대결혼(Lerirate Marriage)을 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을 때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남편의 대를 잇게 한 제도입니다. 물론 권장할만한 제도는 아닙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자신을 따르는 신앙적 결단에 대한 현실적 보상이 아무것도 없음을 설명합니다. 그대신 가난과 냉대뿐임을 알려줍니다. 그것이 자신을 따르는 댓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두 자부 룻과 오르바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먼저 오르바는 베들레헴으로 가지 아니하고 모압 땅 친정 어머니의 집에 남기로 합니다. 현실적으로 지혜롭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또 한편 자신이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시어머니에게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오르바가 나오미를 떠난 사실을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시어머니 나오미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안아주고 소리 높여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한 평가를 나오미의 입을 빌어 분명히 하고 넘어갑니다. 15절입니다. "그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세 여인의 갈림길을 냉혹하게 선언합니다. 14절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최고의 감정적 북받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는 얼음처럼 냉정한 선언을 합니다.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떠났습니다. 오르바는 그렇게 하여 성경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 이후로 오르바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간 자에 대해 성경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룻은 저 멀리 사라지는 동서의 등뒤를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훔치며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떠난 자리를 자신이 다 채우려는 듯 어머니 곁에 바싹 붙어 떨어지질 않습니다. 

성경은 룻이 시어머니에게 찰싹 달라붙어 따르는 모습을 참 재미있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도 재미있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붙좇다"는 우리말은 고유한 우리말이지만 현대어에선 좀처럼 잘 쓰여지지 않는 말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다바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① 창2:24에서 남녀가 결혼하여 한 몸으로 합하여 진다라고 할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② 시63:8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단단히 붙들고 계시는가 할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③ 신10:20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④ 잠언 18:24에서는 형제보다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로 다바크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즉 "붙좇다"는 이 말은 룻이 시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단단히 붙들고 목숨을 함께 걸고 따라 나섰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룻기에서 룻은 나오미를 어머니라 부르고 나오미는 룻은 딸이라고 부릅니다. 인류역사상 이처럼 아름다운 고부관계는 많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김집사님은 아들 딸을 미국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 딸로부터 초청이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하니 딸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딸의 집에 가서 며칠을 유하게 되었는데 아침 일찍 사위가 일어나더니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습니다. 밥을 다 먹은 후 설겆이를 합니다. 청소한다고, 어떤 때는 빨래도 한다고 주물럭 거립니다. 얼마나 사위가 기특하게 보이는지, '내 딸 시집 참 잘 보냈다' 사위가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위 등을 툭툭 두드리고 이쁘다고 칭찬을 잔뜩했지요. 

며칠후 아들 집에 가서 머물게 됐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들녀석이 앞치마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밥 짓고 빨래한다고 빨래통을 뒤적거린단 말이죠. 속에서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내 아들 그렇게 안 키웠다. 어디서 배워 먹은 벼르장 머리냐?" 그러고 한참을 나무라다 생각해 보니까 자기 꼴이 우습기 짝이 없더랍니다. 

여러분, "시어머니" 그러면 머릿속에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나갑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어떤 상황이 스쳐갑니까? 

이 시어머니에 관계된 옛 속담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며느리가 미우면 뒷 발축이 달걀같다고 나무란다." "며느리 자라 시어머니 되니 시어머니 티를 더 내더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나쁜 시어머니 베지 않은 아이 낳으라고 하더라." 서양 격언에 보면, "어머니는 요람을 흔드나 시어머니는 가정을 흔들 수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결같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며느리된 여러분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자를 떼 버리십시오. 언어속에도 시아버지 시어머니 떼 버리고요, 우리 의식속에서도 가치관속에서도 '시'자를 떼어버려야 됩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할 때마다 독특한 여러 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 부부간에 서로 결혼을 서약한 다음에는 반드시 한걸음 내려서서 아버지 어머니를 향하여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신랑이 고백합니다. "이토록 아름답게 건강한 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올 수 있도록 이 사람을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제 아내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내 아내가 두 분을 아버지, 어머니를 섬겼던 것처럼 저도 이제 두 분을 친아버지, 어머니로 공경하고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아버지, 어머니를 바라보게 한 다음 신부가 고백합니다. "아무개씨를 이토록 건강하게, 육체도 정신도 믿음도 튼튼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며느리로 받아주시고 이 사람을 남편으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남편을 위해서 지금까지 기도해 주셨던 것처럼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남편이 두 분을 어버이로 공경하고 섬겼던 것처럼 나의 친아버지, 어머니로 섬기고 공경하겠습니다." 고백하게 합니다. 이 고백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결혼생활이 벌써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30년동안 살면서 크고 작은 부부관계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우리 어머님이 내 편을 들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그것이 어머님의 지혜였습니다. 어버이된 여러분들, 내 피붙이 편드는 것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못나 보입니까? 성숙하지 못한 태도입니까?

시어머니된 여러분, 곧 시어머니가 되실 분들, 아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 유교적인 관념보다는 성경적인 교훈을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오미가 보여준 시어머니상을 보십시다. 나오미는 중요한 가정문제 결정에 며느리의 자유의사를 존중했습니다. 나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갈 필요가 없다. 네가 원하면 너희들이 좋아하는 이곳에서 살아도 좋다. 당시 사회관습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결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또 나오미는 룻을 일컬어 단 한 번도 며느리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내 딸아, 내 딸아"라고 부릅니다. 그 호칭 속에는 이는 어디서 데리고 온 여인이 아니고 내 딸이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며느리 룻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룻기 3장 1절에 보면,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행복을 나는 내 행복보다 먼저 생각하고 있다. 나와 함께 손잡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네 행복의 길이 이곳에 있는 것이 네가 행복할 수 있다고 하면, 너는 이곳에 있어도 좋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부관계입니까?


III. 한 여인 룻

나오미는 신앙의 세계를 떠나 모압 땅에 와 살고 있었지만 신앙의 인격과 향기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룻은 그런 시어머니와의 만남을 통하여 야훼를 믿는 신앙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룻은 결단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리라. 어머니의 신앙세계를 나도 맛보리라. 나도 어머니의 백성의 일원이 되어 살리라. 

룻도 오르바처럼 좋은 남편 만나 사랑 받으며 자식 낳고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룻은 모압의 백성, 모압의 신들을 등지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룻은 믿음을 얻기 위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기로 결단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룻처럼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붙좇는 것입니다. 

룻은 끊임없이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시어머니 앞에 연설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에서 이만큼 위대한 연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듣는 사람이라곤 오직 한 사람 뿐입니다. 그 연설은 인류를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구하라는 거창한 웅변이 아닙니다. 거기엔 잘 꾸며진 화려한 문장도 아름다운 미사어귀도 없는 소박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을 뿐이었습니다. 

16절 - 17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없어 사람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제멋대로 살던" 사사시대에 모압 여인의 입에서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충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단 말이요. 

지금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위대한 설교였습니다. 하늘이 감동하고 땅이 기뻐할 만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그 누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감탄하신 그 감탄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여러분, 나비효과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서울에서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태평양 저 멀리에서 폭풍이 되어 바다를 뒤덮을 수 있다는 논리 말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룻의 지금 이 날개짓이 훗날 얼마나 어마어마한 태풍으로 휘몰아쳤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는 여인이 당당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됩니다.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됩니다. 그 가문을 타고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십니다. 

룻기 안엔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동참하는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룻기는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가족이 되어 구원받은 천국 가족이 된 이 사실보다 엄청난 사건, 엄청난 기적은 없습니다. 


IV. 헷세드 - 어머니 마음!

지난 룻기 서론 시간에 룻기의 주제는 따뜻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 - 헷세드라고 했습니다. 

① 헷세드는 그들의 남편들도 돌볼 수가 없어서 이 땅에 남겨지고 버려진 세 여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② 헷세드는 홀로된 며느리들을 딸이라 부르며 그들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고 배려하는 나오미의 진심어린 사랑이었습니다. 

③ 그리고 룻을 통하여 보여준 헷세드는 부드럽고 따뜻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른길 신앙의 길을 얻기 위해 당찬 댓가를 지불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큰 소리로 울며 나를 떠나는 것이 오히려 나를 위하는 길이라고 설득해도 룻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어머니를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를 향한 끈질긴 사랑 그것이 룻이 보여준 헷세드였습니다. 

하나님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 - 그것이 헷세드입니다. 헷세드를 잃어버린 오르바는 결국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 나오미의 헷세드와 며느리 룻의 헤세드가 하나님의 어머니 마음과 어우러져 룻기를 이끌어가고 다윗 왕조를 탄생시킵니다. 메시야 족보를 만들고 이 땅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만들어 갑니다. 

병든 자식을 살리고 자신은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 씨가 쓴 또 다른 감동작 "등대지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재우는 어려서부터 똑똑한 그의 형과는 엄청다른 차별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도무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고 그 차별대우를 이길 수도 없어 집을 나와 등대지기가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형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동생 재우에게 맡겨놓고 이민을 떠나버립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맡아 섬긴다는 건 재우에게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누워 있던 어머니가 자식을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재우야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님께 "어머니, 저는 가야 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하고는 등대를 고치러 나갑니다.

등대에 올라가 끊어진 퓨즈를 갈아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듯 몸은 오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 수 백 계단을 올라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소리쳐 보지만 그 목소리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다가와 어머니가 하는 말 - "너 왜 밥 안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리고는 곧바로 "너 힘드니, 내가 너 살려줄게." 그리곤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 타들어 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치매와 모성본능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그 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 입에 넣어 줍니다.

나흘 뒤에 구조대가 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어갔던 겝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 그러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등대지기를 지키고 있었던 힘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사랑 - 헷세드였습니다. 

룻기 말씀을 먹다보면 하나님의 자애로운 헷세드의 강물이 내게 흘러 들어옵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헷세드가 되살아 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그곳에서 헷세드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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