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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든지 ( )이 부족하거든 (약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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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  )이 부족하거든 (약 1:2~8)


학교 다닐 때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뭡니까? 시험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시험은 치러야 합니다. 
학생이 시험 보는 것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실력이 향상되고 상급반에 지급하고
또한 상급학교로 진학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험은 학생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시험이 있습니다.

벧전5:8절 [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라 ] 

가만히 보면 학생들이 시험지를 받아 들고 싱긋이 웃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온갖 상을 찌푸린 학생이 있습니다.
왜 똑 같은 시험지를 들고 웃고 울고 합니까?
그것은 답을 아느냐? 모르느냐? 차이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비결을 아는 성도는 얼굴에 웃음을 짓지만
모르면 어찌할 바 몰라서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험에 이기는 비결이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의 기록 목적은 로마 네로 황제 때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환난 가운데서 더욱 인내 하도록 권고하며, 
성도로써 부끄럽지 않은 생활에 힘씀으로써 
서로 간에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당시 성도들이 당하는 환란 즉 시험에 대한 교훈적인 말씀입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성도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은혜의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시험에 대해 먼저 이해를 해야겠습니다.

1. 성도가 당하는 시험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2절)

2절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그러니 시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크게 분류하면 성경에는 3종류의 시험이 있습니다.

1) 14절 욕심에서 오는 시험, 유혹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한다. 
사람은 욕심을 부리다 보면 눈이 멀어져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2) 시련입니다.
3절에 믿음의 시련이라 하는데 믿음의 연단이라고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두 번째 시련을 말합니다.
이때는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12절에도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3) 사명의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들 반드시 사명의 고난이 있습니다.
이때는 바울처럼 각오해야 합니다.
행21:13절 [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오늘 본문 말씀의 시험은 바로 믿음의 시련입니다.
내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삶의 어려운 문제 닥치는 것은
바로 나의 믿음을 연단하는 믿음의 시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시련 당하거든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온전히 기뻐하라고 합니다. 
왜 온전히 기뻐하라고 합니까?


2. 야고보는 왜 성도가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하라고 합니까?(2-3절)

3절 [ 이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 
인내, 즉 갈5:22절 오래참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인내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신앙생활은 참는 것, 목회는 참는 것, 주의 일은 참는 것

특히 벧전1:7절에
[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 ] 

이 말은 믿음의 시련은 돈 주고도 못사는 더 귀한 것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하여 
자신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예수 믿는 한 사람이 남의 집에 하인으로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하인을 조롱하기를 
“나는 예수 믿지도 않아도 아무 시험도 없이 잘 만 사는데
 너는 예수를 믿는데도 왜 늘 어려운 일만 당하느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예수 안 믿는 게 낫겠다.” 고 하니 

하인이 하는 말이
“주인님 노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만약 사냥 중에 사슴 두 마리가 있어 총을 쏘았는데
 한 마리는 그 자리에 즉사하고 한 마리는 다리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도망가고 있는데 
 주인님은 어느 사슴을 보고 달려가겠습니까? ”

“그냐 두 말할게 뭐가 있어
 죽은 놈은 내 수중에 있는거나 마찬가지이니 산 놈부터 좇아가 잡아야지”
“그렇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시련이 없는 것은
 영혼이 죽어 마귀의 것이 되었으므로 그냥 버려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는 마귀가 자기의 수하에 넣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사용하여 시험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게도 시험이 있다는 것 
내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되려 시련을 통해 믿음의 거장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조용한 섬나라인 뉴질랜드. 
그곳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다섯 종류나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화산지대에 살고 있는 키위라는 새입니다.
화산지대에는 키위의 천적인 뱀과 같은 파충류가 살지 않기 때문에
키위는 살아가는데 긴장 요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키위는 시력도 잃었고 날개도 퇴화되어 사라졌고 
꽁지마져 없어진채로 땅바닥에 기어다니면서
그래도 먹는 부리만큼은 길어 먹이를 찾는데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안일은 삶을 무기력하게 하지만 시련은 새를 날아오르도록 합니다. 

이렇듯 시련은 우리의 삶을 높이 끌어올리는 필수 요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시련 당하거든 기뻐하라고 합니다. 

물론 시험 그 자체는 기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시험을 당할 때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삶이란, 우리 인생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험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3. 시험을 당할 때 성도가 우선적으로 취해야할 

신앙적 자세는 무엇입니까?(4절)

4절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끝까지 참아라는 말입니다.

참아도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약5:11절 [ 보라 우리가 인내하는 자를 복되도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느니라]

시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 뜻을 깨닫고 이루기까지 참아야 합니다.
욥을 통해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양7000, 소500, 나귀500, 약대3000, 지금 시가로 수백억 되는 제산
거기에다가 10자녀까지 다 잃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참고 신앙을 지키므로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에게 시련이 있다는 것 - 인생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예능에 대해서는 재능이 없습니다만 
음악으로 말하면 멜로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리듬이 있어야 하고
미술로 말하면 명암이 있어야 합니다. 
문학으로 말하면 희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극이 있어야 합니다.

한숨이 없는 인생은 하나님의 창작품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듯이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삶의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을 때 - 계3:10 인내하는 자는 시험의 때를 면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온전하고’ 란 성숙이란 뜻이며
‘구비하여’ 란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성숙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게 합니다.

신학자 <폴 트루니>의 ‘고통보다 깊은’ 이란 글에 보면 
고통에 대해 ‘예’라고 반응하는 태도는 하나님에 대해 ‘예’라는 태도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모든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기에
우리는 고통 앞에서도 ‘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시련을 당할 때 그분이 내 곁에 계시고 임재하시며 
내 삶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을 때

1) 문제를 해결할 힘이 생깁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가면 문제가 점점 더 작아 보입니다.

2) 우리의 신앙인격이 성숙해져 갑니다.
우리의 신앙인격이 성숙해야만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그 복을 복되게 누릴 수 있는 그릇부터 만드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결코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장차 받을 영광을 소망하며 
인내함으로써 통과해야 합니다. 

인내는 고요한 확신이라고 합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과 상황을 주관하심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고요한 확신 중에 인내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시험은 참는다고 안 되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4. 어떤 시험은 참아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5절)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수가 모자라 문제를 못 푸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기도하라고 합니다.

5절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기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출15:에 마라의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 기도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조금만 더 가면 엘림의 열 두샘 있다고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기도하면 

1) 응답해 주십니다.
2)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은혜 받습니다.
   그러면 문제 가지고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천천히 주실 때는 더 온전하게 주신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익한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  )이 부족하거든’ 입니다.

제가 이런 제목을 정한 것은 
박사의 글에 보면 

약1:5절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이 구절 중에
지혜 대신에 믿음으로 어떤 것을 대입해도 하나님은 들어 주신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 너희 중에 누구든지 (   )이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할렐루야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출3:14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니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야훼] 라고 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 - 영어 성경에는 ‘ I am that I am ’ 입니다.

미국의 <메킨토쉬> 박사의 출애굽 강해에 보면 
이 ‘ I am that I am ’을 나는 (   )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중간에 비워놓았어요.
즉 내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중에 (   )이 부족하거든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이 이 구절을 보고 

어 ! 성경에도 부자 방망이가 있네, 맞습니다. 하나님의 부자 방망입니다.
단지 요술 방망이는 우리에게 해 되는 것도 준다면
하나님의 부자 방망이는 해 되는 것은 주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할 때 응답하십니다.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시리라. 할렐루야 !

그런데 오늘 야고보는 
너희가 시험 당하여 수가 모자라거든 
하나님께 한 수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가르쳐 주면 되지 왜 꼭 기도하라고 하는가?
여기에는 기도의 중요한 교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산에 목회하는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다섯 살난 아들이 말썽을 부리다가 값비싼 도자기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사모가 열을 받아 아들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종아리를 맞던 아들이 갑자기 엄마의 목을 앉고는 울면서
“엄마, 엄마도 한번 맞아봐 얼마나 아픈데 내 다리에 피나면 좋아?” 하니

사모가 그만 아들을 안고 울면서
“엄마가 잘못했다 얼마나 아팠니 다시는 말썽 부리지마” 

그 장면을 보고 목사님이 깨닫게 되었답니다.
자식을 기르다 보면 가지각색인데
체벌을 하면 도망치며 부모의 맘을 아프게 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맞으면서도 엄마 품에 뛰어드는 자식이 있습니다.

찬송가에도 이런 가사가 있지요.

527장 3절중에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우리가 하나님게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부자 방망이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그 한 수를 가르쳐 줄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주시리라 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자 방망이가 아닙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믿음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6-8절)

6절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마21: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막11:24절[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기도에 절대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미국의 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가난했으며 
정규 학교도 못 나온 보잘것없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미국에 가장 큰 부를 가져다준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알래스카는 미국의 5분의 1, 남한의 17배나 되는 엄청나게 큰 땅입니다. 
원래 이곳은 구소련 땅이었는데, 앤드류 존슨이 의회의 동의도 없이 
당시 720만 달러(한화 약 1백억 원)에 구소련으로부터 구입했습니다. 
그래서 의회가 대통령을 소환해 알래스카를 사들인 것에 대해 공격하자, 

앤드류 존슨은 공동조사단을 구성해 알래스카에 탐사를 보낸 후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탐사단은 아이스박스에 불과하다는 알래스카를 탐사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석유, 순금, 백금 등 헤아릴 수 없는 지하자원과 
엄청난 어류, 산림 자원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천연자원이 묻혀 있는 보물 창고였습니다. 

모든 매스컴은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아이스박스가 아닌 황금박스를 거저 얻었다고 대서특필했습니다. 
비난의 공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앤드류 존슨은 
일생 가운데 소중한 신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환경이 아무리 불리해도, 
 하나님 안에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 

결국 그런 자세가 자신은 물론 조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게 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는 신앙정신이었습니다. 

6절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 ] 고 합니다. 

마치 비누 방울처럼 잡으려고 하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7절 [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왜? 8절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즉 의심하는 자는 결국 자기 뜻대로 안되면 주를 떠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광야에는 메추라기와 비슷한 자고새가 살고 있습니다.
자고새는 알에서 각 깨어난 다른 새의 새기를 품고 키웁니다.
이 새는 모습이 다른 새의 새끼를 거느리고 다니며 
자신의 세력을 한 껏 뽐내고 다닙니다.
그러나 새끼들은 자라면 어미와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어미의 품을 더나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립니다.. 

절반의 확신이 자고새 어미에게 절망과 공허를 가져다줍니다. 
완전히 가라앉은 배는 다른 배의 항해를 방해하지 않습니다만
절반 가라앉은 배는 다른 배의 항해를 방해합니다.

반쪽의 진리는 무지보다 더 위험합니다. 
반쪽만 믿는 것은 불신앙보다 더 위험합니다.
반쪽만 믿는 다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는 것입니다.

창17:에 99세까지 기다려도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고 합니다.

즉 믿으려거든 끝까지 믿으라고 합니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기까지 끝까지 믿고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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