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22)

  • 잡초 잡초
  • 341
  • 0

첨부 1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22)  
 
 
예수님의 제자들이 옛날처럼 갈릴리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가버렸습니다.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후 3년간이나 ‘사람을 낚는 어부’로 수업을 받아온 그들이 또 다시 옛날의 그 자리에서 옛날의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까지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생선을 구어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다음 베드로를 불러놓고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이루어지는 질문과 대답은 평범하게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1. 불완전한 인간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나”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실수를 통하여 자기의 불완전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 신앙의 불완전함입니다.

성경적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베드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며 칭찬하셨습니다(마 16:13-17). 그러나 베드로는 이런 확실한 신앙고백을 하고도 곧 바로 사탄의 충동을 받아 예수님을 실족케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마 16:23). 베드로는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형상을 보았을 때 그 자리에서 초막 셋을 짓고 주님을 모시고 살겠다고 말을 했으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눅 9:33).

2) 열심도 불완전합니다.

베드로는 성만찬을 마친 다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나”하고 큰소리 쳤습니다(마 26:31-33).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 하시는데 그는 또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마 26:35). 그렇게 큰소리를 쳤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끌려가는 현장을

따라가다가 비천한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 말았습니다(마 26:69-72). 사람의 열심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식어지곤 합니다. 평온할 때보다도 환난과 핍박을 당하거나 말 못할 역경에 시달릴 때, 흔들림이 없이 지켜나가기가 어렵습니다.

3) 내일 일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셨습니다(18절).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가 말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순교의 죽음을 죽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9절).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은 자기의 몸과 생명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께 바쳐진 생명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도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에 맡기며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만 여간 담대한 사람도 막상 죽음이 눈앞에 이르게 되면 비겁하여지고 구차하게 연명할 궁리를 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말년에 로마에서 박해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 되돌아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2. 주님께 의탁하는 고백입니다.

신앙은 인간이 자기의 부족과 허물을 인식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내심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도 말에 대한 책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거기에다 의존하였습니다.

1) 이해하시는 주님입니다.

17절에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다 알고 살피십니다. 다윗은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하였습니다(시139:2-4). 베드로의 경우 저는 큰소리를 쳤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달아날 것도 아셨습니다. 자기 제자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해를 하신 것입니다.

2) 용서하시는 주님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와 허물을 그대로 갚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그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고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멀리하고 옛날의 고기잡이하던 그 장소로 달아났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곳까지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의 과오나 배신행위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조반을 같이하시며 측은한 말로 타이르시고 당부하셨습니다. 일찍이 제자들에게 이른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그가 말씀 하신 대로 제자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7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3) 채워주시는 주님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약점을 잘 알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몇 번이나 실수하고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주시고 위로와 권면을 하시며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2:31-32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연약한 우리들이 언제든지 사탄에게 흔들리고 시험을 당할 것을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시며 다시금 일으켜 세우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십니다. 잠언 24:16에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3.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하였습니다. 실패와 허물로 얼룩졌던 베드로가 이 시간 이후 주님의 양무리를 먹이며 신약교회를 이끌어 갈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 믿음이 새로워졌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이나 반복된 질문을 받고 베드로의 마음이 착잡하여졌을 것입니다. 이전 같으면 “그렇고 말고요, 목숨을 걸고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큰소리쳤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변치 않는 그 사랑을 간직하려고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 장담할 수 없는 사람임을 잘 압니다. 여기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한 것은 그의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주님께서 아실 것이고 또한 주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 대한 그의 믿음까지도 자기의 의지나 결단에 따라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지와 능력에 있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믿음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사명감이 새로워졌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그가 거역할 수 없는 의무요, 사명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처음부터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거기에 충성을 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측근에서 듣고, 보고, 배우며, 제자의 수업을 하였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는 주님의 부르심에 선뜻 나섰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하였으나 그는 지금 옛날의 그 자리에서 부름받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얽매였던 옛날의 모습이요, 생업을 통하여 물질과 번영을 추구하는 육신적 삶의 전형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제자된 사람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기에 전념하여야만 됩니다. 

3) 주님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다짐입니다.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게 되면 살기위하여 발버둥이치게 됩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필사적으로 전진을 도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보다 선두에 서서 예수님의 수제자 노릇을 해 왔고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른 허약한 모습을 여러 차례 노출시켰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시는 골고다언덕 십자가 현장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버려두고 앞장서서 물고기 잡던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간 예수님과 마주 앉은 갈릴리의 새벽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변화의 현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지를 마음에 담고 평생 동안 제자로서의 삶을 실천하게 하는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