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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대하 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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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찾았으므로 (대하 14:1~15)

2006년도에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선정한 베스트셀러 중에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행복한 인간관계'를 주제로 쓴 그 책에 보면 "평소에는 안부 전화 한 번 하지 않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친한 척 연락하는 사람, 잘 지낼 때는 아무 소식이 없다가 울적할 때만 전화를 걸어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 도움이 필요할 때만 찾아오는 사람, 추천서나 소개가 필요할 때만 선물이나 이메일을 보내는 사람, 세상에 이런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말 세상에는 이처럼 뭔가 급하고 아쉬울 때만 찾아오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세상에 이런 사람들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는 말도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사는 남조 유다의 세 번째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가서는 문제를 보여 주었던 남조 유다 왕들의 전형적인 케이스이기는 했지만, 그의 초기 통치 시절만큼은 정말 모범적이라 할 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 아사 왕이 통치 초기에 즐겨 쓴 표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찾자'라는 말이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아사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다."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여호와를 찾자'라는 말을 개인의 좌우명인 동시에 국가적인 표어로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호와를 찾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보통 우리는 이 말을 무슨 환난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린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합니다.
  
물론 그것이 여호와를 찾는다는 의미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전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야 도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오고 궁한 것이 있을 때에만 꾸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이란 만나는 쪽에서도 그리 반갑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유다의 아사 왕은 '여호와를 찾는 신앙'을 과연 어떻게 발휘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를 찾는 신앙은 평소부터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우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1아비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시대에 그 땅이 십년을 평안하니라 2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3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4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5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4절에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을 구하게 하며"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바로 '찾게 하며'라는 뜻입니다.
  
아사는 왕이 되자 마자 온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찾는' 이 신앙개혁운동의 분위기를 전 국민적으로 조성하고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온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함께 찾는 신앙생활을 회복함에 있어서 제일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유다 백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우상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당시 남조 유다에는 온갖 다양한 우상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사회 속에 깊숙이 스며 들어와 있었습니다. 

유다에는 이미 "이방 제단"과 "산당"이 있었습니다.
집안에만 모시고 개인적으로 우상숭배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공적으로 함께 우상숭배할 제단이나 예배 장소가 세워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상" 즉 돌 따위로 만든 반영구적인 우상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 버젓이 서 있어서 아무나 그 앞에서 절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세라 상" 즉 농산물의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 준다는 여신의 목상이 논밭 어귀마다 세워져 있었습니다.
"태양상" 즉 고대 근동 사회에서 유행하던 태양숭배 역시 이미 유다에 수입되어 있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전성시대가 엊그제 같은데도, 북조 이스라엘에는 두말할 것도 없고 남조 유다에조차 이처럼 각종 우상숭배가 급속히 번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사 왕은 바로 이것부터 없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나라가 평안해지고 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자기네들 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것부터 파악하고 제거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요 급선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찾는 바른 자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사 왕 초기의 십 년 동안 그 나라에 평안을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날 위해 무엇을 해 주지 않으시나, 하나님께서 날 더 사랑해 주지 않으시나?'하고 항상 불만에 차 있고 늘 무언가 보채는 아이처럼 목을 뽑고 기다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항상 나를 사랑해 주시고 기다려 주시는데, 내 쪽에서 과연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것을 먼저 스스로 돌아볼 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찾는 자의 자세입니다.
즉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막고 있는지, 그 우상들을 타파해 버릴 수 있는 결단력과 실천력이 반드시 선결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서만큼은 '질투'하신다고 스스로 명백히 천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만큼은 도무지 눈뜨고 보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해서 십일조조차 못하든지, 사람이 하나님보다 유흥이 더 재미있어서 연휴 주말만 되면 주일성수를 빼먹든지, 사람이 하나님보다 대학교 배지가 훨씬 더 중요해서 고등학교 3학년 내내 SFC와 담을 쌓고 살든지 하면, 그런 사람과 하나님 사이가 가까워진다는 것은 이미 원천봉쇄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옛날 이성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여전히 휴대폰에 저장하고 있으면서 지금의 연인이 자기만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기를 원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회사 일만 끝나면 날마다 술친구들과 어울리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가장이 어떻게 아내나 자식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과거의 관계들을 깨끗이 청산해야 현재의 연인과의 진실한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며, 술 좋아하는 버릇을 눈 딱 감고 끊어버려야 가족과의 화목이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 요소들을 먼저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길이 없습니다.
먼저 내 생활 속에서 무엇이 우상이 되고 있는지, 무엇을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귀중히 여기고 더 의지하고 있는지 이것부터 솔직히 살펴보고 찾아내고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는 길을 평탄하게 예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를 찾는 신앙이란 평안한 시기를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 줄로 알고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6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에 "6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7아사가 일찌기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저희가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 8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 만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팔 만이라 다 큰 용사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아사 왕과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를 찾는 신앙으로써 뭉쳐서 그처럼 우상을 제거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해 싸움이 없는" 완전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기 일생에 한 번만 전쟁을 겪게 되어도 아주 불행한 인생으로 쳐지지만, 당시 근동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평생토록 전쟁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고 살기가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십 년"이라는 평안의 시기를 주신 것은 유다 백성에게는 정말 복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태평성세를 구가하게 되었을 때 아사 왕이 유다 백성들에게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그는 우선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우리 앞에 있고,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고 상기시켰습니다.
즉 그 평안의 시기는 결코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찾는 신앙을 확립하고 우상을 제거하는 생활을 보여 준 데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 주신 상급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아사 왕은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들을 만들자"하고 백성들을 권고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국내의 산업 활성화에 힘쓰고 국방의 태세를 정비해 두자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는 곳곳의 성들을 "형통하게 건축"했을 뿐 아니라 유다 지파 중에서 "삼십 만" 명, 그리고 베냐민 지파 중에서 "이십팔 만" 명의 "용사" 즉 군인들까지 확보하게 됨으로써 나라의 안팎을 더욱 공고히 다지게 됩니다.
  
아사 왕은 평안한 시기란 것이 그저 놀고먹고 즐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평화시대야말로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기회이며, 또한 반드시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 할 기회인 줄을 깨닫고 실천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안의 때를 주셨을 때, 그때를 일할 수 있는 기회로 볼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찾을 줄 아는 성도의 또 하나의 자세입니다.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평화시대에 사는 성도는 그 평화시대에 사는 값을 해야 한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성도에게는 환난과 핍박의 시대를 살도록 하시고 또한 그런 와중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순교자가 되게도 하십니다.
  
반면에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성도에게는 평안의 때를 주셨다면, 거기에도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것은 마음대로 놀고먹으라고 주신 시간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 평안의 시기야말로 '견고한 성읍'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당시의 사회는 소위 'Pax Romana'(팍스 로마나) 즉 로마제국의 지배에 따른 평화시대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그리고 박해가 시작되기 전까지 초대교회는 바로 그 평화시대가 제공하는 온갖 이점과 편의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전도와 선교에 힘씀으로써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뿐 아니라 이방지역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인 교회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그 평화시대를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라는 식으로만 만족하고 즐겼다면 '땅끝'은커녕 '예루살렘'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곧 이어 닥친 300년에 걸친 환난시대도 결코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리켜 세상의 역사가들은 흔히 'Pax Americana'(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빗대어 표현합니다.
  
'팍스 로마나' 이후 그야말로 최대의 국제적 평화시대가 바로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평안의 시기'에 교회를 더욱 굳게 세우고 또한 장차 언제 올지 모르는 환난시대를 대비하여 개인의 신앙을 단련해 나가야만 합니다.
이런 평화시대에 살면서 전도할 줄 모르고 선교사업에 후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정말 그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일 뿐입니다.
  
환난시대에 살던 성도들은 자기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우리에게 이 신앙을 전해 주었는데, 우리가 이런 좋은 때에 살면서도 기도의 시간을 바치지 못하고 헌금의 물질을 바칠 줄 모른다면 정말이지 이런 평화시대를 받을 자격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방에 평안을 주실 때'에 방심하고 나태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하고, 더욱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선한 일에 봉사와 충성을 다함으로써 그 평화시대를 하나님께 더 간절히 찾고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로 선용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를 찾는 신앙이란 정작 환난을 당할 때에는 아예 하나님 품속에 자신을 뉘어 놓고 안심하는 것입니다. 

9절 이하 15절에 기록하기를 "9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 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10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치고 11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12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13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더라 14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15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약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고 했습니다. 

십 년의 평안한 시기가 지나고 유다는 이윽고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웃의 "구스 사람 세라"가 "백만 군사와 병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유다를 침공해 왔던 것입니다.
유다 역시 '오십팔 만' 명의 병력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의 기동부대라 할 만한 "병거"는 전혀 없었던 까닭에 전체적으로는 압도적인 열세에 있었습니다. 

양쪽 군대가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서 서로 대진하고 전투에 돌입할 즈음에 아사 왕은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올리면서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차이가 날 때에는 그 사이를 메울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즉 약한 자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사 왕은 그런 불가피해 보이는 양자의 차이를 간단하게 메워 버릴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고전 1:27) 분이심을 그는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오니"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 '의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는 '쉬다, 눕다, 기울어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사입니다.
즉 자기를 완전히 하나님 쪽으로 기울여서 눕혀 놓은 가운데, 자신은 마음 푹 놓고 쉬고 있는 것이 바로 '주를 의지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끝으로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속에 뉘어 놓고 맡겨 놓았으니, 이제 저 적군이 상대하는 자는 유다 백성이나 아사 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인 것입니다.
'저는 완전히 하나님 품속에 들어와 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을 상대하시고 처리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두말할 것 없는 대승이요 신나는 역전승이었습니다.
  평소부터 여호와를 힘써 찾는 신앙은, 이처럼 환난 중일수록 더욱 자신을 하나님 속으로 완전히 뉘어 놓고서 전적으로 의지하고 안심하는 믿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찾는 신앙이란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이리로 찾아와 주십시오, 저기에도 좀 가 주십시오. 이것저것을 빨리 해결해 주십시오.'하고 당황하고 다급해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오시라고 하는 대신에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하나님 품속에 집어넣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품속에 안긴다는 것은 그 상대방과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서먹서먹하던 관계라면 설사 상대방이 손을 벌리고 안기라고 해도 그 품에 들어가기는 무척 쑥스럽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평상시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가까이 하지 않던 사람은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도 그렇게 마음 턱 놓고 하나님 품에 안겨버리는 기도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아이는 무언가 무서운 것을 보게 되면 반사적으로 부모의 품에 뛰어듭니다.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연인 사이라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절로 상대방을 안아 주게 되고 또 안기게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 품을 찾게 되는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항상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지 않으실 수 없는 '하늘 아버지'이심을 철저히 믿는 성도는 환난이 찾아오면 반사적으로 "주님, 제가 주님만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 아예 그 품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까지 대신 져 주실 정도로 날 사랑하시는 구세주이심을 확신하는 신자는 자기 주위에 '강한 원수'들이 사방으로 진을 치고 있어도 '암탉이 자기 날개 아래로 새끼를 모음 같이' 자기 자녀를 품어 주시는 주님의 품안에서 오히려 따뜻하고 평온하게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심하고 환난이 극할 때'에 오히려 이 믿음직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의 품속에 자기 전 생명을 완전히 뉘어 놓고서, '사람으로서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전능자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체험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사 왕이 여호와를 찾는 신앙은 이처럼 평소 때부터 차근차근 쌓여졌던 것이었으며 위급할 때에도 똑같이 발휘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 시작하는 처음부터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게 만드는 우상 요소들을 아예 깨끗이 제거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안의 때를 주셨을 때 놀거나 방탕하지 않고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자기 사명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 생명과 나라의 존폐가 흔들리는 큰 환난이 닥쳐왔을 때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 놓음으로써 그처럼 '하나님을 찾는 신앙'의 최후 승리까지 거둘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평소에 잘 알고 지내야 어려울 때 의지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거래처 사람과 평소에 좋은 관계를 쌓아 두어야 불경기에 자금 운용이 어려울 때에도 신용 거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생신이나 명절 때에도 인사조차 하지 않던 자식이 꼭 무슨 아쉬운 일이나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에만 찾아온다면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 해도 어느 부모가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기꺼이 도와주고 싶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고 있다가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평소에 주일예배도 걸핏하면 빼먹고 새벽기도회는 아예 한 번도 참석하지 않던 교인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변이 생기고 나서야 무슨 '백일기도'니 뭐니 하면서 부랴부랴 하나님 찾는다고 난리를 치면, 하나님께서도 참 민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그저 다급할 때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불신자들조차도 깜짝 놀랄 일이 생기면 그저 본능적으로 '아이구, 하나님!'(Oh, my god!)이라고 외치지 않습니까?
그것은 진정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아니라 오직 신성모독의 소리일 뿐입니다.
하나님 찾기를 무슨 집안의 잡귀 쫓아내기 위해서 점쟁이를 찾듯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소방서에 전화하듯이 그런 식으로 찾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평소부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들, 내가 무의식중에라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가려내고 제거해 버림으로써 하나님과 더 친하게 지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평화로운 시대를 주실 때에 그것을 내 인생을 즐기는 일에만 남용하지 말고 교회를 섬기고 충성하는 일에 선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환난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겁내지 아니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주님의 품안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의지하며 결국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나 환난 때나 '오직 여호와를 찾는' 이 신앙의 순수한 본능을 발휘함으로써 평생을 통하여 항상 주님 앞에 바로 서 있고 그 주님과 점점 더 가까이 사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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