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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롬 8: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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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17절~18절 
제   목 : 고난 
  
1. 성도에게 반드시 따르는 것

몇 달 전부터 우리나라 안팎에서는 “9월 위기설”이 파다했었습니다. 1997년 IMF 때보다 더 심각한 경제적인 위기가 올 것이라고 했었지요. 그렇지만 정작 9월이 되어서는 그런 외환 환난과 경제적인 위기가 오지 않았고, 그래서 당시의 주장이 ‘다소 부풀어진 것이다, 과장된 것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거대 금융회사들의 몰락은 미국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정말 위기가 오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을 다시 일으키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경제적인 위기는 지금까지 계속 되어 온 국내의 여러 갈등, 북한과의 단절, 그리고 중국의 혐한론(嫌韓論) 등과 더불어 우리 정부와 국민들에게 큰 악재(惡材)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가장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 이명박 대통령일 것입니다. 어느 신문의 칼럼니스트는 이명박 대통령을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초기의 잘못된 인사 문제와 섣부른 쇠고기 협상 등은 그와 그 정부의 잘못이라고 쳐도, 북한과의 관계 악화, 중국 네티즌으로부터 시작된 혐한론, 그리고 미국발 금융 악재, 오일쇼크 등 외부적인 요인이 그를 더 힘들게 했기 때문에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면 ‘불행 끝, 행복 시작!’, ‘도전 끝, 최정상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지요. 대통령이 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국가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과 그리고 범세계적이고 시대적인 문제 속으로 들어가고, 그로 인하여 한 사람으로서는 짊어지기 버거운 짐을 지고서 험한 여정을 걷게 됩니다. 

이런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주제를 떠올렸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고난”입니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악재 속에서 힘들게 사업하고, 어렵게 직장생활하고, 소규모의 자영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몸으로 겪고 있는 여러분 모두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난”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답은 무엇일까요?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그 즉시로 행복의 집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선 또 다른 삶의 시작이자 국가와 국민과 시대적인 아픔 속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습니까? 성도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되는 것 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존 칼빈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 “구원의 서정”, 즉 구원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초청인 소명 2.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생 3. 중생한 자가 죄에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 4.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 5. 믿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셔서 의롭다 하시는 칭의 6. 의롭게 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얻게 되는 양자됨 7.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성화 8.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견인 9. 장차 성도가 천국에 갈 때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영화.” 

칼빈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원하시어 천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인도하시는 논리적인 순서”라고 하면서, “양자됨까지는 단번에 되는 것이나 성화에서부터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영화롭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신다. 그렇게 하다가 죽음의 문을 열고 하늘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직접 대면하기 때문에 주님과 같이 변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칼빈과 같은 시대에 함께 종교개혁을 담당했던 마틴 루터는 이런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롭게 된 후에 곧 바로 고난이라는 단계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고난의 문제를 그렇게 크게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구주를 믿어 의롭게 된 성도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온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께서 일부러라도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를 고난 속으로 몰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루터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루터의 신학에 의하면,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리고 성경의 첫 사람인 아담에서부터 마지막 저자인 사도 요한까지 그들에게 반드시 있었던 것이 고난이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성경의 인물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 고난을 면제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고난 없이 평생을 산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각 책들을 살펴보십시오. 그 속에 고난이 언급되지 않은 성경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성경과 성경 인물들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한 루터는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필연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속으로 몰고 가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루터 자신의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고, 오늘 본문인 로마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성도인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6장과 7장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에 대해서 아주 특별하고도 신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6장 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6장 4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6장 5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졌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존재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연합의 의미 그대로 오늘 본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음으로서 우리의 삶에 고난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성도의 삶에도 반드시 십자가와 같은 고난이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이고,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아마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으나 누구누구는 그렇지 않은 것 같더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난도 피해 가더라.’ 물론 그렇게 볼 수 있고,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배우자와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진로의 문제 등 겉으로 드러난 고난만 고난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성도의 삶에 고난이 필수적이라고 말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루터는 성경적인 구원의 도리를 깨닫기 전까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욕구들, 즉 내면의 죄악들 때문에 엄청나게 고통 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학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구원의 도리를 깨달은 후에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외부적인 고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루터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성도에게 고난은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구원의 순서를 이야기 하면서 고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고 해도, 칼빈의 삶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체적인 약함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릅니다. 칼빈 역시 종교개혁에 대한 반대자들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비록 고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다고 해도 칼빈도 고난 속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견인”의 교리를 말했습니다.

제 얘기를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제 속에도 루터가 고민했던 것 같은 본능적인 죄성이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저 스스로 겪는 마음의 고난, 영혼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지난 주간 초 한 3일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굉장히 피곤하게 하루를 보내었음에도 자정 이후까지 잠을 잘 수 없었고, 잠을 자도 선 잠을 잤으며, 잡다한 꿈까지 꾸었습니다. 그러다가 사흘째 밤, 엎드린 채로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제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집착, 탐욕! 그것을 이루지 못함에서 오는 분노, 그리고 몇 원초적인 본능들을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제 마음속에서의 죄악이고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혼자만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조차도 거룩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는 치열한 싸움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것은 곧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저는 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고난이든, 속에 감추어진 고난이든, 성도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말씀 드릴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예수를 믿음으로 저와 여러분 역시 십자가 지는 삶 즉 고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소망의 기도>에 인터넷으로 기도 사연을 올린 분이 있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신앙생활을 잘 했으나 믿지 않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그 이후부터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의 불화, 여러 가지 외적인 어려움, 자녀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너무 괴로워서 다시 주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교회 나가자마자 갑자기 가족과 친척들이 “네가 교회 나가서 이렇게 되었다”라고 그 성도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떠나 있었더니 너무나 어려운 일이 겹쳐서, 다시 교회 나오게 된 것인데,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고 그 모든 책임을 그 성도에게 떠넘기면서 그녀의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그 사연으로 기도하기 전에 그 분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가족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성도의 삶에는 그가 성도이기 때문에 분명히 고난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님이 예수를 믿으므로 고난의 삶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삶에도 십자가와 같은 고난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을 기억하시 바랍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맙시다. 고난을 친근하게 여깁시다. 고난을 친구라 부릅시다. 


3.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이제 왜 여러분에게 고난이 오는지 확실하게 정리를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두 번째로 기억해야 될 또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나, 오늘 본문을 보나 십자가는 반드시 부활 혹 영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부활 없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물론 십자가 없는 부활도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십자가 신학은 또 다른 말로는 영광의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주제로 바꾼다면 성도의 고난에는 반드시 영광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영광”은 헬라어로 “독사”라고 하는데요. 이 단어는 일반 헬라어에서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 히브리어 본문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카보드”를 번역한 단어로 쓰였습니다. “카보드”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예', '하나님의 장엄', '하나님의 권능' 등을 지칭한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 이 말은 '하나님의 존재 양식' 자체를 표현한 말로도 쓰였습니다. 따라서 장차 성도가 얻게 될 영광이란 바로 신적인 영광, 곧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성도의 삶에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혹시 이 구절에 있는 수학 공식을 발견하셨습니까? 이 구절에 있는 수학공식이란 다름이 아니라,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하면 소위 “새 발의 피”라는 말입니다. 고사 성어인 “조족지혈(鳥足之血)”을 해석한 이 말에서 새란 참새를 말한다고 합니다. 참새의 크기는 어린아이 주먹만 하지 않습니까? 그 참새의 발은 얼마나 작겠습니까? 그리고 그 발가락은 또 얼마나 작겠습니까? 아마 볼펜심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발가락에 핏기가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것처럼 장차 성도 여러분이 얻을 영광에 비하면 지금의 고난이 아무리 크고 힘들어도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는 것이 오늘 본문 속에 있는 수학공식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정이 깨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직장이나 자신의 진로의 문을 열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생과 수고와 손해가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당한 그 고난이 100이라고 한다면 고난 끝에 얻을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이 말은 고난과 영광을 저울에 달았을 때, 영광이 너무나 크고 무겁기 때문에 영광 쪽으로 아예 기울어버린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고난의 크기와 영광의 크기는 비교 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만큼 고난을 이겨낸 성도가 얻게 될 영광은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으로 인하여 얼마나 기쁘고 또 기대가 되는지 모릅니다. 지금의 고난이 크면 클수록 영광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대가 됩니다. ‘장차 제가 얻을 영광은 얼마만한 것일까?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셨듯이 나도 그 영광을 얻을 것인데, 그때 영광은 어떤 것이고 어떤 모습일까?’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기대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로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고난조차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4. 고난이여, 오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고난은 성도를 천국 백성답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세상의 옷, 세상의 문화, 세상의 정신으로 너무 덕지덕지 감싸고 있는 것을 한 겹 한 겹 벗겨내시는 것이죠. 이 땅의 것을 좋아하고 가지려는 사람은 세상의 것 대신에 천국을 소망하도록 세상의 것을 내려놓는 고난을 주십니다. 사람을 붙잡는 사람은 그 사람보다는 주님을 붙잡도록 사람으로 인한 고난을 주십니다. 물질에 매이는 사람은 그 물질에 매이지 않도록 물질의 고난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순수하고 맑은 정신과 영혼과 모습으로 천국에 서게 하시려는 것이죠.

분당 샛별교회의 이한규 목사님은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은 ‘딱딱한 밭을 가는 쟁기’ 입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은 수많은 잡초의 온상이 됩니다. 그때 고통의 ‘쟁기’가 없으면 잡초가 핀 마음으로 '자기 잘난 맛'에 취해 살다가 영원히 진리와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찾아오면 그 고통의 ‘쟁기’로 마음의 밭을 갈아 위대한 인격의 싹을 피우십시오. 

고통은 ‘해변을 쓸고 지나가는 폭풍’입니다. 때로 우리의 마음에는 더러운 오물이 묻게 됩니다. 그때 고통의 ‘폭풍’이 없으면 거짓, 위선, 음행 등이 난무하는 더러운 돼지우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찾아온다면 그 고통의 ‘폭풍’으로 마음의 오물을 씻고 은혜의 바다를 맞아들이십시오. 

고통은 ‘잡철을 정련하는 대장장이의 망치’ 입니다. 때로 우리는 정련되지 못한 잡철과 같은 모습을 많이 노출시킵니다. 그때 고통의 ‘망치’가 없으면 아무 데도 쓸모없는 잡철의 근성을 벗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찾아오면 그 고통의 ‘망치’로 겸손을 배워 쓸모 있는 인생으로 준비되십시오. 

고통은 ‘소리를 증폭시키는 확성기’ 입니다. 때로 우리는 진리와 양심의 소리에 둔감하게 됩니다. 그때 고통의 ‘확성기’가 없으면 진리와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불신과 미신의 늪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찾아오면 그 고통의 ‘확성기’로 양심과 진리의 세미한 소리를 들으십시오. 

고통, 고난에 대한 너무나 아름다운 설명이지요?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성도의 고난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고난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장차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신의 영광, 너무나 영광스럽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주시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으십니까? 인생살이가 힘드십니까?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고난이 크고 깊을수록 장차 여러분이 받게 될 영광은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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