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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아노라 (욘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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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노라 (욘 1:8~16)
 

존 뉴톤(John Newton)은 온갖 악행을 일삼다가 노예로 아프리카에 팔려가 집단농장에서 노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 친구인 선장에 의해 구조되어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뉴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조되었음에도 하나님께 감사치 않았습니다. 도리어 배에서 옛날처럼 술에 만취되어 선원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행패를 부리고 싸움질만 합니다. 배가 캐나다 부근을 지날 때였습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더니 배가 뒤집힐 것처럼 흔들렸습니다. 식량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갔고 바닷물이 넘쳐 들어오자 선원들은 사력을 다해 물을 퍼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선원들은 배에 요나와 같은 존 뉴톤이 탔기 때문에 풍랑을 만났다며, 저를 바다에 던져야 된다고 고함을 지르며 뉴톤에게 달려들기 시작합니다. 

죽음을 앞둔 험악한 분위기에 이르자 강퍅하고 완악하던 뉴톤은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라며 하나님께 눈물로 울부짖자 바다가 이내 잔잔해졌습니다. 공포의 일주일 동안 단 한 사람의 희생자만 생겼을 뿐이었습니다. 죽음을 극적으로 모면한 존 뉴톤은 비로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깨달았으며 그 후로부터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목사가 되어 곳곳을 다니며 자신의 삶을 간증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작사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의 405장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은혜로운 찬송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도성 니느웨를 구원하려는 계획을 세우시고 선지자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때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가 탄 배에 폭풍을 일으키십니다. 폭풍으로 인해 배가 깨어지게 될 정도가 되자 예기치 않았던 두려움에 배에 탄 무리들은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배 밑에서 잠을 자던 요나를 깨워 그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재앙의 원인을 가져온 자를 찾으려 했을 때 요나가 뽑히게 됩니다. 무리들은 요나에게 무슨 연고로 재앙이 임하였는지 말하라고 청합니다. 그때 요나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데 여호와의 낯을 피함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두려움에 떨며 요나에게 반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이는 요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요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이켜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반성케 하는 질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비단 요나에게만 던져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명을 등지고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요나는 본문 12절에서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고 말합니다. 여기의 요나가 말하는 "내가 아노라" 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의 죄악을

어느 목사님이 죄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책망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때 교인가운데 지성인임을 자처하는 박사가 찾아와 말합니다. "목사님, 죄를 직설적으로 설교하면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죄악에 빠지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죄라는 단어 대신에 잘못(Error)이라든가 실수(Mistake)란 말로 바꾸어 말씀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때 목사님은 방에 들어가 독약이 든 병을 들고 나와 말합니다. "박사님, 이 독약이 든 병에 독약이란 표지를 떼버리고 '꿀' 이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죄란 말은 듣기 싫은 말이지만 분명하게 들어야 하며 그 죄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저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사람의 본능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과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의 차이점은 자신에게 잘못과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사울이나 다윗은 모두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왕의 권위를 가지고 제사를 마음대로 집행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꾸짖을 때 사울은 변명과 핑계만 댑니다. 또한 다윗은 밧세바를 취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하였더니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며 잘못과 죄악을 인정하였습니다. 사울이나 다윗은 똑같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죄악을 인정하였고, 한 사람은 죄악을 돌아볼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악을 알지 못한 사울을 왕위에서 폐하시고,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한 다윗은 용서해주시고 왕위를 계속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요나의 '내가 아노라' 의 고백에는 회개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풍랑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요나는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자신의 죄악 때문인 것을 깨닫고 나 때문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회개의 시작은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야 죄악에 대해 마음을 아파하고 돌이키게 됩니다. 요나는 철저히 자신의 죄악을 깨달았기에 '내가 아노라' 며 모든 탓을 자신에게 돌리는 회개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둘째로 나의 사명을

존 맥스웰(John C. Maxwell)의 "당신 안에 잠재된 리더쉽을 키우라" 라는 책에 등대지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암벽 해안의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는 한 달에 한번씩 기름을 받아 등대의 불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등대가 마을에서 멀지 않기에 마을 사람들이 기름을 자주 얻으러 옵니다. 한번은 불쌍한 할머니가 등대지기를 찾아와 말합니다. "돈이 없어 굶을 죽을 형편이 되었다네. 기름을 조금만 주면 팔아서 끼니라도 대신할 수 있을 테니 기름을 조금만 주게". 동정심에 등대지기는 할머니에게 기름을 조금 주었습니다. 며칠 뒤 동창생이 찾아와 말합니다. "차에 기름이 떨어져 급하니 기름을 조금만 주게." 인정상 또 기름을 조금 주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아내가 찾아와 아들의 학자금을 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등대지기는 기름을 빼어 팔아 학자금을 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밤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다음날 아침 지난밤에 배 한 척이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침몰 원인은 배가 표류하는 동안 등대의 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름이 떨어진 등대에 그만 불이 꺼진 것입니다. 상부에서는 등대지기를 질책했습니다. "당신에게 기름을 공급한 이유는 단 한가지, 등대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등대의 사명은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등대가 사명을 감당치 못한다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때 존재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이요, 선지자인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버리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 밑에서 잠만 자고 있으니 풍랑을 자처한 것입니다. 사명을 피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기만이 아니라 배 안의 사람들도 함께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풍랑 속에서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나가 사명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니느웨를 향해 호통을 치고 앗수르 왕을 책망하였을 텐데, 사명을 피했기에 오히려 이방 선장에게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 빛나고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의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게 보이고 귀하게 보입니다. 교회 부흥도 성도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 이루어집니다. 요나는 이제 자신의 잃어버린 사명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사명에 돌이킬 때 하나님은 예비한 물고기를 통해 그를 구하심으로 사명의 길을 다시 열어주셨습니다. 


셋째로 나의 책임을

두 집이 이웃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집에서는 자주 싸움 소리가 나고, 다른 집은 웃음소리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어느 날 싸우기를 잘하는 집에서 웃음소리가 나는 집으로 찾아가 싸우지 않고 웃고 사는 비결을 물었습니다. "어째서 당신 집에는 웃음소리만 납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 집에는 나쁜 사람들만 살아서 그렇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 내가 방 한가운데 놓여있던 물그릇을 모르고 엎질렀다고 합시다. 제 아내는 '제가 그곳에 물그릇을 놓아두어서 그렇게 되었으니 내가 잘못했다' 고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아니야, 내가 잘 보았어야 하는데 부주의해서 그랬으니 내 탓이요' 하지요. 그 때 어머니는 '아니다. 나이 살 먹은 내가 보고도 치우지 못했으니 내가 잘못했구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집에는 문제만 생기면 모두 자진해서 '내 탓이요, 내가 잘못했소, 내가 죄인이라' 며 서로 책임을 지려합니다. 서로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요나는 풍랑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현재 요나가 처한 상태는 육지도 아닙니다. 산도 아닙니다. 풍랑이 일고 있는 배 안에 있습니다. 바다로 던지라는 것은 책임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바다에 던져 죽이라는 뜻입니다. 잘못이 내게 있으니 책임을 지고 죽겠다는 강한 의미입니다. 요나는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회가 삭막해지는 이유는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점점 더 적어지기에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고 남이 잘못한 것만 들추어내 책임을 추궁하기만 합니다. 모두 상대의 잘못을 감추어주는 데 인색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의 공동체에서 상대보다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많아지면 소망이 있습니다.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공동체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이니 바다에 던지라며 책임을 지려는 요나를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계획하십니다. 큰 물고기를 통해 요나를 구하시고 다시 니느웨의 구원을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요나와 같이 책임을 알아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닥쳐온 풍랑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요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삶도 분명히 인도하시리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환경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남의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 아노라 는 요나처럼 자신의 탓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나아가면 반드시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요나처럼 스스로의 죄악을 아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명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임을 아는 회개를 통해 다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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