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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다스림 (삿 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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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스림 (삿 8:1~35)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명목상의 하나님의 백성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에브라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미디안의 두 방백을 처지한 후 기드온에게 따졌습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1). 원래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인데 야곱으로부터 장남인 므낫세보다 더 큰 자가 되리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창 48:19). 그리고 실제로 에브라임 지파는 므낫세 지파보다 큰 지파로 성장했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의 지도자 여호수아도 에브라임 지파 출신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들은 자긍심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쟁에서는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기드온이 큰 공을 세웠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시기심도 생겼겠지요. 그들은 마치 기드온 때문에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것처럼 비난합니다. 하지만 미디안에게 압제받는 7년 동안 이미 충분한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불평은 생트집에 가깝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도 그들은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는 힘든 일은 가담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에브라임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하나님의 다스림 대신 ‘명예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주셔서 번성케 하셨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내가 더 큰 일을 해야 하고, 내가 더 큰 공을 세워야 하고, 내가 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회개해야 할 순간에도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놓는 것 같습니다. 용기 없던 지난 삶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불평하지요. 위험을 감수하며 수고하기는 싫지만 더 많이 인정받으려는 그릇된 명예욕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름을 부끄럽게 합니다.

반면에 기드온은 온유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그들의 분노를 풀었습니다.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 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죽을 각오로 싸워서 얻은 승리였지만 기드온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공로를 자기보다 훨씬 더 높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세우셨으니 오렙과 스엡도 자기 손에 붙이셔야 했는데 왜 너희 손에 붙이셨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에브라임 사람들의 불평까지도 수용합니다. 만일 기드온도 명예욕의 지배를 받았다면 이러한 태도를 보일 수 없었겠지요. 기드온은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둘째는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싸움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 “떡 덩이”(5) 지원은 할 수 있는 역량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피곤해진 기드온의 요청을 냉담하게 거절합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세바와 살문나가 쫓기는 형편에 있지만 그들의 병력은 기드온의 삼백 용사들보다 50배나 많은 1만 5천 명 가량입니다(10). 언제든지 전세가 역전될 수 있음을 파악한 그들은 기드온을 돕기는커녕 죽을힘을 다해 추격하는 그들을 조롱합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 뜻을 위해 자신이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거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한가를 따지는 기회주의자의 모습만 부각됩니다. 전쟁 결과를 보고 이긴 편에 붙어서 조금도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싸우는 기드온을 돕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피곤을 무릅쓰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사기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하나님의 다스림 대신에 ‘이기심’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삼백 용사들은 요단을 건너고 “피곤하나 따르며”(4)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성취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피곤할지라도 순종했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순종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협력해주지 않고 조롱할 때 사기가 떨어 질수 있었지만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생겼을 수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치고 피곤하였으나 상황을 봐가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믿고 50배나 되는 적군에게 도전했으며 마침내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군대를 파”했습니다(12). 삼백 용사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13-17절을 보면 기드온은 패잔병들을 소탕한 후에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방문합니다. 숙곳 성읍 장로들 70인을 잡고 들가시와 질려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했고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기드온이 강한 지파인 에브라임에게는 겸손과 온유로 대처하면서도 작은 성읍들을 강력하게 징벌한 것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받기도 합니다. 사실 기드온은 “전에 나를 기롱하여”(15) 말한 것을 징벌의 이유로 삼았는데, 이는 그의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에 개인적으로 복수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추격하는 상황에서는 내란 방지를 위해 자중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젠 전쟁이 종결된 상황이라 마음이 달라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복수심을 사용하셔서 숙곳과 부누엘 사람들을 처단하셨습니다. 기드온의 적은 군대를 멸시했던 태도는 사실상 삼백 명을 선택한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삼백 명을 돕지 않았던 것은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며 구원하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보다는 50배 전력의 미디안을 통솔하는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더 강력해 보였겠지요. 이기심의 지배를 받은 그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할지에 대한 분별력까지 잃고 하나님 백성에 대해 반역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 12:30)는 말씀이 이 상황에 참으로 적절해 보입니다. 숙곳과 부누엘 사람들은 하나님 백성을 대적한 미디안 사람들과 동일하게 처단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22). 이 사람들의 특징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지할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음을 보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기드온이 구원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보다 항상 ‘눈에 분명히 보이는 어떤 것’에 지배를 받거나 지배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의 삶의 양식은 어떠했습니까? 33-35절을 보면 기드온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과 바알브릿을 신으로 섬깁니다.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했습니다. 또한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했습니다. 지조도 없고 의리도 없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상황이 바뀌자 너무나 쉽게 변절했습니다. 평화로운 환경도 그들을 성숙시키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겼기에 항상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선호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쉽게 망각하고 은혜도 쉽게 잊었습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식하고 있었던 기드온과는 대조가 됩니다.


넷째는 기드온입니다. 18-21절을 보면 세바와 살문나를 체포한 기드온이 개인적인 복수심을 근거로 그들을 처단합니다. “그들은 내 형제 내 어머니의 아들이니라 …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드온은 여호와의 전쟁을 자신과 자기 가문을 위한 싸움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강하게 받던 초기 모습에서 점차 이탈됩니다.

물론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의식에 있어서 뛰어났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는 선언에는 나는’ 다스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생생하게 체험한 그는 대대로 백성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명예’와 ‘권세’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생활의 모든 부분까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했습니다. 

24-27절을 보면 기드온은 노략한 귀고리를 청구했습니다. 1700세겔(약 20kg)의 금과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왕들의 의복과 사슬들을 얻어 그것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습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옷으로 우림 둠밈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사용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성전이나 대제사장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드온 집으로 몰려와 금 에봇을 의지했습니다. 집안의 우상을 무너뜨렸던 기드온이 새로운 우상을 제조한 셈입니다.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왕의 보좌는 거절했지만 많은 아내를 두고 왕처럼 호사스럽게 살았습니다(30). 재정의 사용 문제, 하나님의 뜻을 묻는 문제, 호사스러운 가정생활 등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답지 못함이 드러납니다. 

성도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의식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기에 구별된 삶의 양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명예’나 ‘이익’ 혹은 ‘사람’ 같은 것들에 지배를 받기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보이는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더 실재적임을 인식하면서 현재 여기에서 살아가는 존재라야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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