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갈 4:8~20)

  • 잡초 잡초
  • 402
  • 0

첨부 1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갈 4:8~20)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바로 알아 때에 맞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때를 놓치고 난 다음에 후회하는 적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공부가 그렇습니다. 물론 요즘이야 평생 교육이라는 말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의 질을 보다 풍성하게 하기위한 일종의 추가 교육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고 원래대로 학교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학생의 시기에 해야 정상입니다. 물론 예전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거나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해서 한글조차 몰라서 뒤늦게 야학이라든가 한글교실에 등록해서 다니는 분도 계십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다 그래도 고등교육까지는 마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볼 때 참으로 후회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요? 결국 후회한다고 하는 것은 그 학창 시절에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다고 하는 아쉬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그건 다 아쉬움에 찬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안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왜요?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거든요. 막상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갖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지난날을 후회하면 돌아본다는 것은 결국 때를 놓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배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욕을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만도 못하다면 그 비난의 강도는 더 심해지겠죠.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 덧셈 뺄셈도 못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 장난치니 그러지 않겠어요? 
그건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바른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별별 것들을 다 섬겼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우리 풍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사업을 시작한다던가. 집을 새로 짓는다던가 하면 돼지 머리 갖다 놓고 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죽은 돼지 머리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듯 그 앞에 절하며 복을 빌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당연히 기제사를 드렸습니다. 선친들이 돌아가신 날이 되면 당연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또 다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래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상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던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당연히 여기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무엇이 참인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직 아닙니다. 아직 믿음 안에 있지 않는 가족과 친지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삶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래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고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사랑과 화평을 이루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말씀의 기본은 사랑으로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 말들이 과연 그 사람을 사랑으로 세워나가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잘못된 사람을 향해서 그건 잘못된 일이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정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 동기가 정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속에 있는 티와 들보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비난하지 말라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고 하셨습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어떻게 할까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누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내 눈 속에 들보가 들어있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날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유대교 사람들은 특정한 날이 되면 반드시 금식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왜 금식해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5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그렇다면 무엇이 바른 금식인지를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이 바른 뜻을 헤아려 실천할 때 그 금식의 의미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별개로 하고 단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비슷한 예로 오늘날 주일 성수와 십일조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왜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강조합니까? 그래야 구원받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그렇게 강조합니까? 단지 교회를 채우기 위해서 또 교회 재정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받아 누리는 첫걸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복된 인생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기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정죄하고 있다면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안타까운 것이죠. 힘든 것 같으나 오히려 가장 쉬운 길입니다. 부족할 것 같으나 넘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율법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쏙 빼버리고 단지 율법만 강조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법으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순종하라고 할 때도 순종할 때 주어지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유익을 가르쳐 기쁨으로 따르게 하기 보다는 먼저 정죄부터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비결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 모두가 이 사랑의 법으로 다가가기 바랍니다. 누가 바르게 지키지 못한다고 정죄하는 자신부터가 정죄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은혜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고 믿음으로 순종하셔서 하나님의 주신 약속대로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하면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쳤고 이방인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는 구원받는데 할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내가 여러분을 위해 애쓴 것이 헛된 일이 될까봐 두렵습니다.”라고 하면서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므로,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야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니 사실상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할례를 강조하고 육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자기의 약한 것을 그대로 내보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내게 잘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몸의 병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약함을 그대로 알렸습니다. 그럴 때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은 미워하거나 저버리지 않고 마치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지성으로 섬겼는지 그 때에는 할 수만 있다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섬기는 모습이 기쁨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성도들은 마음으로부터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섬기는데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비록 바울이 약하기는 해도 그 자신 병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진심으로 섬기며 따랐습니다. 바울의 전하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던 저희들이 바울이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떠들어대는 거짓 선생들의 말에 그만 홀딱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바울을 섬기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아마도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겠죠. “저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 이젠 그가 뭐라고 해도 못 믿어.” 하지만 바울이 달라진 것이 있던가요? 아닙니다. 바울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저기서는 저렇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의 말을 듣다보니 이상하게도 바울이 틀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거짓 선생들이 노리는 점입니다. 기껏 멍석을 깔아놓으니까 뭐가 먼저 올라간다는 말처럼 거짓 선생들은 슬쩍 바울을 밀어내고 모든 갈라디아 성도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그들이 이렇게 깜빡 속아 넘어가지는 했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정말 순수했습니다. 지성으로 섬겼습니다. 사랑이 넘쳤습니다.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마치 소 닭 보듯이 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대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바울이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한쪽 얘기만 듣다보니 그 말만 옳은 것처럼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대하는 것만 같은 그 모습이 과연 어땠을까요? 우선 기쁨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저들이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모든 걸 판단해 버립니다. 단지 내가 보고 내 귀에 들린 것을 가지고 소설을 씁니다. 하지만 그 결과 내 마음에서 기쁨이 사라진다면 그건 내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저도 실수가 많은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아니라고 정죄해버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결과는 내 마음으로부터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은 성령 안에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약한 모습 그대로를 그들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지성으로 섬겼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이 틀렸다는 그 말을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틀린 것입니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옳고 뜻이 좋아도 그 결과 기쁨을 잃게 된다면 그건 아닙니다. 그러기에 어떤 경우에도 우리 마음으로부터 기쁨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연약한 모습이 보이면 더욱 강력하게 중보기도를 해주십시오. 더욱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십시오. 그래서 항상 넘치는 은혜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주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마치 아기를 낳기 위해서 해산의 고통을 하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나를 몰라주는 그 모습에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고 합니다. 함께 만나서 그게 아니라고 큰 소리라도 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건 아마 주의 일에 힘쓰는 모든 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심정일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다른 말로 비난하고 욕하는 소리를 들을 때 정말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비참한 마음이 듭니다. 속이라도 다 내보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섭섭하다고 말이라도 꺼내면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더 엉망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는 그게 아니라고 외쳐대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마치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하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당신도 똑같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그러고서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느냐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시간이 해결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속은 시커멓게 다 타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변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방의 마음이 풀릴 수만 있다면 나 하나 속이 문드러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이 사람다운 자식 되도록 만들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야 내가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이끌어 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면 해산하는 수고 해산하는 고통이라고까지 표현하겠습니까? 자기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마음에 섭섭한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어떻게 부모가 돼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건 믿음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정말 들어야 될 말 지켜야 될 말은 흘려버리고 듣지 말아야 될 말 잘못된 말에는 어쩌면 그렇게 쉽게 흔들리는지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매를 때려서라도 바로 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던가요? 그런 말이야 철이 든 다음 얘기지 매를 들어보세요. 당장 튀지 않던가요? 아니 거꾸로 덤벼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죄인이라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자식을 미워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는 것처럼 믿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바울이 안타까워하면서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마음 좀 알아 달라 내가 바라는 것은 단지 너희들이 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야. 그것은 모든 목회자의 심정도 다 똑같을 것입니다. 아니 부모의 마음 역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래서 오직 사랑의 법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놀랍습니다. 그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리고 앞서서 수고하는 모든 분들이 기뻐하시도록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것이 어디 있냐고 합니다. 그래요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다 사랑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아니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누구나 자기 약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약점을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니 억지를 부르고 있다고나 할까요? 자기 약점만 생각하다 보니까 주어지는 사랑은 생각지를 못하고 그저 모든 것을 섭섭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상대방의 약점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이게 약점이다 싶으면 그걸 붙들고 늘어지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입니다. 

그 거짓된 마음에 속지 마십시오. 오히려 약점이 있다 싶으면 그것을 강점으로 바꾸어나가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세워 가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 내가 약할 대 오히려 주님의 능력은 더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오직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