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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행복의 근원 (합 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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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근원 (합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17-19)

행복한 추석(Happy Chuseok!)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명절은 아무래도 추석일 듯합니다. ‘설날’도 있지만 추석만큼 여유가 넘치는 명절은 아닌 듯합니다.

추석이 되면 흩어져 있던 온 가족들이 부모님을 중심으로 한 곳에 모여 송편도 빚고 산소에 성묘도 가면서 그동안 못 다한 우애를 나눕니다. 너무 좋은 명절입니다. 송편을 비롯한 땀흘려 준비한 추석음식은 혼자 먹지 않고 동네 이웃들과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성탄절이나 설날에 주고받는 선물보다 추석 때 주고받는 선물이 훨씬 많고 여유가 있어 풍요로움이 넘실거리는 명절이 분명합니다. 

추석은 우리 기독교의 명절인 추수감사절과 같은 맥락의 명절입니다. 한 해의 농사와 삶을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명절의 본뜻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감사의 대상이 다른 것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님과 조상들에 대해 감사 제사를 드렸고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은 조상들과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다르다고 생각하는 하늘님과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따져서 다신론(多神論)의 하늘이냐, 아니면 유일신론(唯一神論)의 하나님이냐는 것은 서로 의견을 달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다스리는 神의 개념으로 보면 우리 조상들의 가슴에 들어있는 하느님이나, 기독교인들의 가슴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은 같은 神일 것입니다. 가슴속에서 숭배하던 유대인들의 하나님과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 다른 神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리(公利)적인 입장에서 보면 같은 神일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과 성경의 하나님이 만나는 자리가 추석명절이 아닐까요? 

추석명절의 중심은 “감사와 효”(感謝와 孝)에 있습니다. 감사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요, ‘고맙게 여기어 사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孝’는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이라는 뜻인데 여기 부모는 꼭 낳으신 부모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광의적으로는 ‘조상전체’를 나타내는 말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감사와 효’는 언제나 같이 가는 단어입니다. ‘감사’가 고마움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효’는 부모님의 은혜를 행동으로 보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은혜와 감사’는 공생관계의 단어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감사가 있어야 생명력이 더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라는 희랍어 ‘유카리스티스’는 은혜 ‘카리스’(χἀρις)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앙의 표현이요, 행동이며, 열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감사의 표현과 행동과 열매로 측정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이나 우리의 고유명절인 추석절 한가위는 하나님과 부모님께 향한 우리의 신앙과 효도를 측정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금년 추석에도 부모님을 섬기는 일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재점검하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허만슈타인이 쓴 시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며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성경적인 사랑, 성경적인 감사, 성경적인 축복을 잘 나타내는 내용이 이 시에 담겨져 있습니다. 일본의 사상가였던 우찌무라 간조도 “인간 최상의 저주는 마음속에 받은 은혜가 기억되지 않고 감사를 빼앗긴 인생이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민족은 복 받은 민족입니다. 감사를 되새기고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동기와 다짐을 하게하는 추석과 추수감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두 개의 감사절기가 있어 복잡하고 번거로워 하나로 통일했으면 좋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되새기고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아무리 많아도 결코 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우리 인생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은 감사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해야 되는 지를 깨닫게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 3:17-19)

하박국은 조건부적인 감사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많이 받거나, 받기 위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기쁨이요, 인도자이시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없어도, ~없어도,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가끔 감사할 수 없는 이유들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이 없어서”입니다. “돈이 없어서, 물질이 없어서, 집이 없어서, 자동차가 없어서, 피아노가 없어서, 땅이 없어서” 감사보다는 짜증과 불평이 앞섭니다. 또 “부모가 없어서, 아버지가 없어서, 어머니가 없어서, 형제자매가 없어서, 유산이 없어서, 일가친척이 없어서”, 등 타고난 운명에 대해 원망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중요한 것은 많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없다는 상대적 빈곤이나, 상대적 불리함만을 나열하여 불평과 원망과 짜증의 인생을 살 때가 있습니다. 이미 있는 것, 이미 받은 은혜와 축복을 세어보면 감사가 넘쳐 날 텐데, 그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없는 것만 발견하고 불평 가운데 사는 인생을 우찌무라 간조는 불행한 인생,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 감사요, 다른 하나는 적극적 감사입니다. 

소극적 감사는 조건적 감사나 소원적 감사를 말합니다. 무엇을 많이 받았을 때 나오는 감사가 여기에 속합니다. 소원적 감사는 기대하는 것을 위해서 미리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미리 감사의 행동을 나타내어, 도움을 주실 주체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여기에 속한 감사일 것입니다. 이는 가장 기초적 감사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기본을 모르는 자이기 때문에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로 여깁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보살펴주시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교육하고 훈련시켜주신 부모님의 은혜, 더구나 자식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신 부모님의 사랑은 하늘아래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하면서 노래합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잊고 살아가는 불효의 시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더구나 부모님이 내게 흡족히 해주지 못한 것만 기억하는 습성이 우리에게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하고 후회의 눈물을 짓곤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훌륭한 점은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방황할 때도 많이 있었으나 성경의 역사는 마침내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살다가도 다시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온다는 깨우침을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돌아오라” 그것이 히브리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성경의 근본입니다.


두 번째로 적극적 감사가 있습니다. 이는 긍정의 감사(The Positive Thanksgiving)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하박국의 감사노래가 바로 적극적 감사요, 긍정의 감사입니다. 이것을 어떤 학자는 “but-if-not”의 감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아니더라도”의 감사를 말합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하나님은 신앙은 “but-if-not”(아니더라도)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2:4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중심 메시지가 3:17에서 아름답게 꽃피고 있다고 했습니다. 외부적인 상황의 변화에 관계없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려는 긍정적 신앙의 모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심을 표현할 때 “그가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실 것이다”와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슴은 거친 지역에서 발이 빠르고 발디딤이 탄탄한 짐승입니다. 험난한 바위가 많은 고생길에서 불확실한 발아래를 밟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신다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위험한 길을 갈 때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십니다. “높은 곳에 다닌다”는 표현은 높은 위치를 승리롭게 소유한다는 말이니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은 약속된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분이니 나의 힘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힘이요, 반석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모든 것을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이어지는 긍정적 감사가 우리의 인생길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박국은 바로 이 신앙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면 감사가 넘치는 신앙이 긍정의 감사를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추수의 열매입니다.

느티나무에 올라가 모든 가지를 한 가슴에 다 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슴이 넓고 팔이 길어도 모든 가지를 한꺼번에 가슴에 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무 아래로 내려와서 나무 밑 둥 줄기를 안으면 나무 전체를 안게 되는 것입니다.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면 끝도 없이 뻗어나간 것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가장 중심되고 기본적인 것을 잡으면 나무 전체가 내 품안에 안깁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지엽적인 곳에 맞추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을 잡아야 합니다. 그 근본이 바로 “긍정적 감사”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어제 교회에 왔다가 심방가려는 저를 멀찌감치서 보았습니다. “어디 아프세요? 피곤해 보이시네요?” 일부러 다가와서 추석을 잘 지내시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나는 악수를 하며 행복한 추석을 맞이하라고 덕담을 했습니다. 그날 오후 그분이 과일상자를 들고 다시 교회에 오셨습니다. 집에 가다가 다른 차와 부딪쳐 교통사고를 냈답니다. “목사님과 악수를 하고 가서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도 다친 곳이 없어요. 멀쩡해요. 하나님이 보호해주셨습니다.” 감사해서 다시 오셨답니다. 어떤 이는 목사님과 악수하고 가다가 교통사고 났다면 재수 없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목사님과 악수를 하고 갔기 때문에 교통사고를 냈는데도 몸을 다치지 아니해서 감사하답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본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긍정적 감사를 찾는 이가 훨씬 더 인생을 즐겁고 풍요롭게 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하늘의 문을 여십니다. 행복의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여기서 갈라지게 됩니다. 어느 쪽을 택해서 살아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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