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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총리, 그 이상으로의 요셉 (창 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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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그 이상으로의 요셉 (창 37:1~5)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대해서 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듯이, 위로 하늘의 복과 깊은 샘의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길 기원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털어 요셉의 이야기는 한국 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은 한국 교인들의 마음에 가장 극적인 복을 받은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노예로 고생하던 젊은이가 당시 가장 강력한 나라인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극적입니까? 여기에 적당한 러브스토리만 포함된다면 기가 막힌 드라마가 되겠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 이러한 우리의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셉이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노예의 신분에서 총리가 된 것입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요셉이 받은 진짜 복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의아하게 여기는 분이 계시겠지만, 요셉은 본래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너무 미화시켜왔습니다. 본래부터 요셉이 훌륭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많은 결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큰 인물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17세 당시의 요셉을 말해 줍니다. 당시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심각한 성격적 결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고자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을 보세요.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형님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습니다. 

교육심리학에 의하면 고자질은 4-5세 어린이의 경향으로서 일종의 의존 심리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고자질을 통해 남을 비방하고, 반대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여 인정받고 싶어하는 본능적 행동이라고 합니다.

고자질은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일까요? 오래 전 부친께서 계시던 경상북도 봉화에 갔다가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데, 이상했습니다. <이 분은 학교에서 선생질 해먹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이장질하고.......>라고 말했습니다. 표준말에서는 <질>자를 쓰면 그게 욕인데, 거기서는 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선생질하는 사람이 선생이고, 이장질하는 사람이 이장이라면, 고자질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고자질에서 질 자를 빼면 금방 압니다. 고자질은 고자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 궁궐에서 내시들이 궁궐 여인들의 사소한 일들을 살폈다가 임금에게 알린다는 것입니다. 그게 고자질입니다. 여러분, 고자질은 고자나 하는 짓입니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어떤 신부님이 성당 구내 뜰에 과일 나무를 심어 길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와서 열매를 훔쳐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화가 난 신부님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라고 경고장을 써 붙였습니다. 그런데 몇 일 후 거기 다른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째째하게 고자질 같은 짓은 하지 않으신다!> 

성도는 고자질을 하지말고, 자기 고백을 해야 합니다. 고자질은 남의 잘못을 일러바치는 것이고, 정직은 나의 잘못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직과 고자질은 비슷한 얼굴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정직은 나를 찌르는 것이고, 고자질은 남을 찌르는 것입니다.

17세 당시의 요셉은 고자질이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의 허물이나 파헤치는 사람, 남의 뒷말이나 하고, 비방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일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나 보는 태도를 꾸짖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요셉은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3절 이하를 보세요.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잘 아시는 것처럼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풍속에 따라 그에게는 여러 아내가 있었는데 그가 제일 사랑하는 여인은 라헬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늦게 아들 요셉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얼마 후 둘째인 베냐민을 낳던 중에 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라헬을 향한 사랑이 요셉에게 향하여 그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여러분, 자기 혼자만 채색옷을 입을 때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성공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물론 그 말이 맞습니다. 저도 종종 넥타이도 튀는 것으로, 옷도 튀게 입어볼까 생각도 하지만, 잘 안됩니다. 흰 양복에 빨간 넥타이에 흰 구두, 어떻습니까? 저는 천성적으로 평범하게, 남에 눈에 잘 띄지 않게, 그게 편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요셉은 혼자만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아버지, 저 혼자 채색옷을 입을 수는 없어요. 형님들도 입지 않는데, 왜 저만 튀게 입겠습니까?> 이렇게 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혼자만 누렸습니다. 아마 <형님들이야 장성하셨으니, 어떻게 알록달록하게 입는단 말인가?> 하고 합리화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요셉보다 어린 베냐민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경은 베냐민이 채색옷을 입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결국 요셉은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고, 좋은 것 혼자 다 누렸습니다. 형님들의 불편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왕자 병에 걸린 17세의 철부지 소년이었습니다. 

보세요. 좋은 것을 혼자 다 누립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신만 좋은 것을 누리는 데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큰 일을 하는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요셉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을 복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가 받은 진짜 복은 결함이 많은 사람, 성격이 왜곡된 사람이 변하여 위대한 성품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게 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첫째로, 그는 고자질이나 하면서 남의 흠을 들추어내던 사람에서 
           흠이 많고 실수가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관대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던 그가 애굽의 노예가 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를 시기하던 형님들이 그를 노예로 팔았기 때문입니다. 형님들에 의해 팔렸습니다. 그 후 13년의 고통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노예로 살아가면서, 나중에는 억울하게 감옥에까지 떨어져 살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겠습니까? 형님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형님들은 그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총리가 된 후 곡식을 사러 온 형님들에게 복수했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그는 딴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장례가 끝났을 때 형님들이 요셉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돌아가신 마당에 이제 동생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님들 모두를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그 죄를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큰 인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창세기 50장 18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더 이상 요셉은 남의 흠이나 들춰내서 고자질하고, 뒤에서 비방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큰 인물, 마치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인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진정한 복입니다. 저는 우리도 이런 관용과 용서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 마음은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맥밀란>은 <어떤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노예가 되고 만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늘 그 사람 때문에 마음이 괴롭게 되고, 결국은 그 사람의 노예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잘못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사과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누군가로 인해 화가 나셨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할 때 참된 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첫 아들은 <므낫세>였습니다. 창세기 41장 51절을 보면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님들이 자신에게 했던 그 원통한 일을 잊기로 작정했습니다.

<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하여 우리 마음에 맺힌 것을 잊어야 합니다. 용서는 잊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사야 43장 25절을 보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다 잊으십시다. 마음에 상처로, 쓴 뿌리로 남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을 잊어야 합니다. 부모, 형제, 자매, 이웃, 친지 등 주변 사람들에게 맺힌 모든 것을 잊으셔야 합니다. 그게 용서의 시작입니다. 

잊고 용서하면 그 다음에 복이 옵니다. 요셉이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은 에브라임이었습니다. 창세기 41장 52절을 보면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잊고 나면 찾아오는 것은 번성함입니다. 하나님은 잊고 용서하는 사람에게 번성하는 복을 주십니다. 

욥도 그렇습니다. 욥이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와서는 그를 얼마나 힘들게 했습니까? 오히려 그의 마음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은 욥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 복이 임한 시점이 언제입니까?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한 후입니다. 욥기 42장 10절을 보세요.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아픔을 준 못된 친구들, 용서할 수 없었지만, 그들을 위해 축복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욥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둘째로, 요셉은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에서 
           세상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곱 해 풍년 동안 모았던 곡식을 일곱 해 흉년에 나누어주어 온 백성을 죽음에서 건진 일입니다. 남을 먹여 살렸습니다. 굶주리는 백성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애굽의 구석구석을 돌면서 굶주리는 백성을 살폈을 것입니다. 마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런 모습은 과거에 혼자 채색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눈을 떴습니다. 사랑에 눈을 떴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하나님의 겸손한 창고지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우리 교회 비전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창고가 되고, 우리 모두가 창고지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복, 이 땅의 기름진 복이 넘치길 기원합니다. 그것을 나누는 창고지기가 되길 원합니다. 나 밖에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자, 보세요. 고자질이나 하던 사람, 혼자 좋은 것을 다 누리던 사람이 변했습니다. 용서의 사람으로, 남을 살리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게 바로 기적이었습니다. 노예에서 총리가 된 것이 기적이 아니라, 변하여 새 사람이 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이제 기도 제목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여, 저를 총리가 되게 해 주세요>란 기도에서 <주여, 저를 새 사람으로 바꾸어 주세요. 새 성품을 주세요. 사랑의 사람으로, 생명의 창고지기로 바꾸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변하여 새 사람이 되길 기원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식 이름을 주었습니다. <사브낫바네아>란 이름의 뜻은 놀랍게도 <세상의 구주>란 뜻입니다. 누가 세상의 구주, 사브낫바네아가 될 수 있을까요? 총리와 같은 권력자가 되면 다 세상의 구주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폭군이 되어 백성을 도탄으로 끌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자가 구주가 되는 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야 세상의 구주가 됩니다. 

순서를 기억하십시오. 먼저 총리가 된 후 사람이 바뀐 게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바꾸신 후, 총리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될 때, 그에 맞는 사명과 권한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새 사람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그를 낮추셨습니다. 훈련시키셨습니다. 채색옷 대신 노예의 옷을 입음으로 그는 겸손을 배웠습니다.그 동안 자기 밖에 모르는 삶을 산 것을 회개했습니다. 노예로 살면서 그는 잘못도 없이 꾸중을 들었습니다. 지적을 받았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갔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별 잘못도 없으면서도 자신의 고자질 때문에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은 형님들의 괴로운 심정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철부지이던 17세 당시에 연거푸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 꿈들은 남에게 절을 받는 꿈이었습니다. 높아지는 꿈, 다른 이들 위에 서는 꿈이었습니다. 그는 그 꿈을 아버지와 형님들에게 떠벌였고, 더욱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높아질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로 살면서, 감옥에서 살면서 <높아지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절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노예로서, 감옥에서의 13년은 그를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놀랍게 성숙해졌습니다. 이제는 총리 일을 맡겨도, 수 백만 명의 생명을 맡겨도, 충분히 안고 갈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총리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 먼저 자리부터 맡습니다. 권력부터 차지합니다. 그러다 보니 늘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분, 이제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요셉이 받은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총리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변하여 새 사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복이 임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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