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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마 1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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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마 18:10~14)
 
 
새생명축제주일을 두 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이 남고 그 다음 마지막 주에 그토록 전도하려고 애썼던 분들을 초청하는 주일이 됩니다. 오늘과 다음 한 주간은 새생명축제를 앞두고 전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 그 사람 참 대단하다. 소위 말하는 큰 사람! 이렇게 인정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아주 권력이 있고 재능이 있고 재산도 많고 또 배운 것이 많아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그렇게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만약에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것도 우리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전도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그런 추앙을 받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큰 자, 위대한 자로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나라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위대하고 능력 있고 대단한 사람을 알아주고 그들을 큰 자, 위대한 사람이라고 알아주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기준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이나 지식의 양이나 재산의 정도나 아니면 학위 외모 가문 이런 것이 좋으면 인정을 받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기준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8장 1절부터 9절까지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초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기준과는 전혀 다른, 아니 다른 것이 아닌 완전히 반대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라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로 일컬음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도대체 누가 큰 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1-9절에 있는 내용을 통해서 몇 가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큰 자에 대한 정의를 합니다.

 
첫 번째는 아이들처럼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이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에 아주 정치적인 권력이 있거나 아니면 박사학위가 몇 개가 있거나 아니면 재산이 많거나 외모가 특출 나거나 명예나 권력이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겸손한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많겠지요!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권력이 있고 재물이 많다고 해도 겸손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첫 번째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겸손한 자라고 했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가 잘나서 얻었다고 인간적인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 안에서의 겸손은 내가 얻고 내가 소유하고 나에게 있는 모든 환경과 처지가 나로 인해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을 주셨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자기에게 공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공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받아서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앙적인 겸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하나님에게 모든 소유권을 돌리고 자랑하지 않고 겸손한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세상적으로 굉장한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지위를 누리고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가진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세상에서 잊혀 진자 보잘 것 없는 자를 영접하는 자를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 끼리 모인다는 것이지요. 재물도 학식도 외모도 배경도 권력도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끼리 모여 삽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대단한 사람인데 주위에 격이 맞지 않는 수준 차이가 나는 사람이 곁에 와서 여러분과 동류의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좋아하시겠어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노는 물이 다르고 내가 노는 물이 다르다. 우리는 계급이 다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계급이 존재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람들은 그렇게 유유상종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정도나 권력이나 외모 배경 이런 것들과 굉장히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상류 사회를, 굉장한 사회를 이룰 수 있어도 그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아도 그런 기본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전혀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메시야로 오셨지만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과 주로 지내셨나요? 세리들, 죄인들, 거리의 여자들, 병자들, 가난한 사람들, 과부들, 고아들 예수님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땅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살고 그들을 영접하고 받아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로 일컬음을 받는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지체가 높고 더 부자고 더 잘난 사람만 쫓아다니면서 살지 않나요? 아니면 여러분보다 더 못하고 어려우신 분들과 함께 울고 함께 그들과 고통을 나누고 그들을 주면서 살려고 하시나요?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들을 영접하는 사람, 인정하는 사람, 함께 거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커다란 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세 번째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10절) 

여기서 말하는 작은 자란, 누구를 이야기 할까요? 먼저 문자적으로 이야기 하면 어린아이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10장 1절 하반 절에 이야기 할 때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설명을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하지 아니하면, 또 어린아이를 영접하지 아니하면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10절에 나오는 작은 자가 문자적으로 어린아이가 맞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진 것 없고 버려진 존재가 전체적으로 봐서 작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작은 자는 사회적으로 약자가 작은 자입니다. 사회적으로 약자란, 지위나 권력이나 가문이나 외모, 능력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봐서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약자입니다. 이런 사람도 작은 자입니다. ‘작다’라는 말은 권력이나 재물이나 뭐가 없어서 소외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우리가 작은 자를 업신여겨서는 안 될까요? 일반적으로 강한 자, 능력 있는 자. 세상에서 이렇게 인정받는 사람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들의 지위나 명예나 학식이나 학위 이런 것들이 그들을 기쁘게, 행복하게,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소유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약자나 사회적인 약자는 그들을 즐겁게 행복하게 만들어줄 조건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사회적인 약자, 작은 자 편에 계시느냐 하면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뭔가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들로 인하여 벌써 기쁨이나 좋은 것들을 누린 사람들이 아닌, 그런 것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누릴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약자의 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런 작은 자 한사람도 업신여기지 말라.” 업신여긴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좋지 않은 말로 깔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위에 학식도 없고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 게다가 죄도 많이 져서 감옥소도 들락거리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일반적으로 우린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 사람 그렇지 뭐, 부모도 그렇고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깔보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그런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소외된 자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당연한 거야 자업자득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형상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을 내실 때에 다 똑같이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 어떤 사람은 환경이 좋아, 어떤 사람은 조금 능력이 있어서 나중에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자리에 있을 수 있을 뿐이지 그 사람의 조건이 그 사람의 모든 면을 다 결정짓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때에는 우리의 능력이나 외모나 조건을 보시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가 가지고 있는 조건이나 상황이나 환경, 소유를 보고 그를 업신여기거나 인정합니다. 이런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눈에 이 세상에 있는 사회적인 약자, 경제적인 약자가 작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재미있는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목자에게 양이 100마리가 있었다. 양을 치러 가는데 들어오려고 보니 1마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양들을 산에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다. 나중에 1마리를 찾아가지고 집에 데리고 오니 얼마나 기쁘겠느냐? 이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같으면 100마리의 양중에 1마리가 없어졌다고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1마리를 찾아 나서시겠어요? 아마 “뭐 찾아 나서야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유대 사회에서 왜 목자가 있는지 아십니까? 일반적으로 유대 땅에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나가면 막대기를 가지고 나갑니다. 왜 막대기를 가지고 가냐 하면, 들판에는 광야에는 승양이나 늑대, 여우가 많습니다. 꼭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다니면, 저 멀리서 어슬렁거리는 맹수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꼭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동물들이 맹수들이 못 오게 막습니다. 

그런데 양한마리가 없어졌다고 양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그냥 산에 두고 1마리 찾아가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랬다가 남겨져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맹수가 공격하면 한 마리 찾으러 갔다가 더 많은 양들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보면 아흔 아홉 마리를 그냥 두고 한 마리 찾으러 갔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논리로 보면 합리성으로 보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계산에 보면 1마리를 찾으러 가기보다 아흔 아홉 마리를 지키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한 마리쯤이야, 아흔 아홉 마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이것을 쉬운 말로 바꾸어 이야기 하면, 그 사람 뭐 별 볼 일도 없는데, 가난한데, 능력도 없는데, 재능도 없는데 하나님의 교회에 그 사람이 얼마나 공헌을 할까? 그러나 그 사람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 더 괜찮은 사람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아 그런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이 있냐고, 그런 사람들을 더 기쁘게, 그런 사람에게 더 잘해주는 것이, 그런 사람을 지키는 것이 옳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한다면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합리적이고 이 계산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 찾으러 나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논리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고 계산적이지 않지만 갑니다. 왜 갈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목자가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양이 골짜기에 가서 어떤 가시덤불에 걸려서 또는 맹수에 걸려 죽게 될 때 그가 당할 고통과 아픔을 목자가 실제로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녀석 맨 날 사고 치더니 이번에 가서 맹수한테 물려 다리 한번 부러져 봐라” 그럴까요? 세상에서 낙오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세상에서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 우리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전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목자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경험하게 될 고통과 아픔을 내 것으로 느낄 때에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에 찾아가서 그 양을 구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위에 교회도 안 나오고 고난당하고 힘들게 살고 어렵게 사는 분들 계시지요? 혹시 생각하시기에 그 사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어. 당연해 그렇게 살아도 당연해,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지키겠다는 세상에 있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가 아니고 잃어버린 한 마리에 초점을 맞춰 그들을 찾아 나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왔다. 아흔 아홉 마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라는 것은 목자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며칠 전 혼자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으려고 주문을 하는데 옆 테이블에 한 남자분이 한 분 오셨는데, 물을 따라주는 아줌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아마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그냥 그렇게 지내요,” 
“북한산에 좀 가봐 잘 생긴 남자가 많이 와” 그러니까 이 아줌마 하는 말이 
“내가 이 나이에 남자 만나러 거기에 가나요?” 
“재미있잖아?” 
“갈 시간 없어요.” 
“남편하고 같이 가봐” 그러자 이 아줌마가 
“남편이요? 그 술 주정뱅이하고 어딜 가요?”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다 아줌마 하는 말이 
“우리 남편이요? 인간도 아니예요. 살 재미가 없어요.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재미로 살아요! 그런데 내가 이 나이에 남자 만나러 어딜 간다고요? 식사나 하세요?” 그러면서 물을 주고 가더라구요.

제가 가만히 앉아서 들으며 아주머니를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재미로 사는가! 맨 날 돈 벌면 술 먹고 다 탕진하는 남편, 내가 이 나이에 남자 만나서 무슨 재미로 사냐 하는 말을 들으니 인생에 별로 행복이 없어 보이는 것 아닌가? 너무 남편에게 고난을 당하고 인생의 목적도 없고 힘들게 사는 분, 우리 주위에 그런 분들 많습니다. 정말 그런 분들에게 예수가 전달이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런 분을 바라볼 때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전도할 수 있을까요? 

제가 밥을 먹는데 밥이 잘 안 넘어 가더라고요, 그분에게 전도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점심시간이라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는지 말을 걸 수가 없어요. 밥을 먹고 나오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분이 성경에 나오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일 수 있다고.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 많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약자로 작은 자로 소외된 사람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능력 있고 괜찮은 사람보다 주님의 관심은 작은 자, 잃어버린 자입니다. 우리가 그런 분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모셔 와서 그 분들의 빈 가슴에, 그 분들의 상처 난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어 그분들의 삶을 바꾸어 보자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자고 새생명축제를 하는 것 아닙니까? 전도의 동기가 이렇게 사랑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아름다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면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큰 사고가 났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그 옆을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지나가다가 차를 세웁니다. 얼마나 다쳤을까? 어떻게 사고가 났지? 차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경은 합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경찰과 보험회사 직원이 옵니다. 그래서 누가 잘했는지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그리고 벌금을 주고 어떻게 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가다가 사고 난 사람을 보면 내려서 싸매주고 응급조치 해 주고 경찰을 부르거나 앰블런스를 불러주고 명함을 주고 내가 증인 서겠습니다.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전도에도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힘들어 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삶에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치지요. 저 사람 어렵게 살고 있구나, 저 사람 죽어가고 있네.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쳐다는 봅니다. 그리고 지나가지요? 세상이야 어떻든 관계없이 보고 지나가는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관여는 하는데 당신이 잘했어, 잘 못했어 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경찰과도 같은 사람,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은 내려서 치료해 주고 앰블런스를 불러주고 조치를 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저 사람은 저렇게 어려움을 당해도 싸, 저렇게 사고치고 죄 짓더니 사업 망해도 싸, 그건 당연한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묻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위로해주고 싸매주고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끊임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전도하다 보면 언젠가 그들이 주님께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들을 사랑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족들을 만나시겠지요? 형제 친척을 만나시겠지요? 누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전도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그들이 언젠가 돌아옵니다. 그들을 향해 갖고 있는 따뜻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이 지속적으로 반복이 되게 되면 언젠가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죄 지은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27살 먹은 애기 엄마가 직장생활로 애기를 기관에 맡기고 다녔습니다. 1년도 안된 아기입니다. 이 엄마가 직장에서 동료들과 볼링을 치고 회식에 술을 마셨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아기를 데리고 왔습니다. 집에 와서 아기가 우니까 젖을 먹이는데 술김에 아기를 깔고 젖을 먹였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눈을 떠 보니 아기가 죽었습니다. 엄마 젖에 아기가 숨을 못 쉬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형을 받았는데 26년형을 받았습니다. 아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기는 천국에 갔겠지요? 엄마는 감옥에 가게 됩니다. 아기 엄마는 교회 다니는 사람도 아닙니다. 아기는 천국에 갔겠지만, 아기 엄마는 불쌍한 영혼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실수로 죽인 엄마는 얼마나 한을 품고 살겠습니까? 그렇게 보잘것없고 손가락질 당할 수밖에 없는 영혼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불쌍한 영혼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되고 사랑해야 될 불쌍히 여겨야 될 영혼입니다. 자기 아기를 술 먹고 젖을 먹이는 저런 여자는 감옥에 가도 싸, 감옥에서 썩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전도를 못합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한 명도 전도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죄 지은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전도할 수 있습니다. 새생명축제는 우리가 이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마음에 정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불쌍한 마음의 깊이를 보시고 누군가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두 주밖에 남지 않은 새생명축제! 주위에 정하신 영혼,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나눠드린 새생명축제의 초청장을 전달하고 많은 말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하고 있다고 함께 예수님 믿어서 행복하게 살자고 진심어린 전도를 하게 되면 주님은 그분들의 영혼을 감동 감화 시켜 그날 주님의 전에 오게 도와주십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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