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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닮음꼴 (고전 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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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닮음꼴 (고전 4:6~13)

 
모든 동물 중에 흉내를 가장 잘 내는 동물이 있습니다. 원숭입니다. 원숭이는 어느 동물보다 호기심이 많고 흉내를 잘 내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원숭이 사냥꾼들은 원숭이의 호기심과 흉내 내기를 좋아하는 속성을 이용해 사냥을 한답니다. 사냥꾼들은 원숭이들이 서식하는 나무 그늘 아래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 둘려 앉아 자신들이 가지고 온 술을 나눠 먹는 시늉을 합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웃고 노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모습을 호기심 많은 원숭이들이 나무 위에서, 숲속에서 봅니다. 사냥꾼들은 얼마간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에 술을 그대로 두고 술에 취한 척하며 비틀거리면서 흩어집니다. 

사냥꾼들이 흩어지고 나면 어김없이 원숭이들이 나무와 숲에서 우르르 내려와 술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방금 전에 사냥꾼들처럼 서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을 흉내를 내면서 술을 마신답니다. 독한 술을 의좋게 나누어 먹은 원숭이들은 단번에 취해 버립니다. 손발에 힘이 풀리고 기운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때 흩어져 숨어 있었던 사냥꾼들이 나타나면 깜짝 놀란 원숭이들이 도망 가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술에 취해 몸이 제대로 움직여 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냥꾼들은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원숭이들을 손쉽게 생포합니다. 이것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랍니다. 

원숭이 보다 훨씬 흉내를 잘내는 고등동물이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은 흉내를 내는데는 천부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면서 하는 생각과 생활 습관을 보면 가정과 주변에서 보고 배운대로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모방이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문화가 발전되는 과정을 보면 모방성에서 시작됩니다. 모방을 통해 새로운 변화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창의성과 창의력도 모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은 위대한 모방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모방성이 모두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모방하느냐에 따라 유익한 것이 될 수도 있고 해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게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미 게가 새끼 게를 데리고 해변을 거니는데 새끼 게가 똑바로 걷지를 못하고 옆으로 걷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미 게가 새끼 게에게 ‘걸을 때는 똑바로 걸어야지. 그렇게 옆으로 걸으면 안된다’ 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새끼 게가 걷다 말고 어미 게에게 ‘똑바로 걷는다는 것이 어떻게 걷는 거예요. 엄마가 똑 바로 걷는 것을 보여 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어미 게가 새끼 게에게 ‘똑 바로 걷는 것은 이렇게 걷는 거란다’ 하며 걸어 보이는데 옆으로 걸어갑니다. 새끼 게가 ‘저도 엄마처럼 똑바로 걷고 있어요. 엄마의 걷는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걷고 있는 걸요’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느냐는 인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내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분파와 분쟁입니다.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많은 분파가 생겨 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아볼로파와 바울파가 더 심각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현재 고린도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사람은 아볼로입니다. 아볼로가 담임 목사로 목회를 하고 있는데 아볼로를 중심으로 한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교회를 처음 개척한 사람들과 갈등이 생긴 겁니다. 

아볼로는 교회 안에 있는 분파의 갈등을 해결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수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욕심을 부린다면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자기 중심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었겠지만 아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목회자 사이를 갈라 놓는 그런 분위기를 자기 중심적으로 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서 바울이 머물고 있는 에베소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 교회로 돌아가라고 권면하지만 아볼로는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은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서로 높아지기 위해 다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며 하나님만이 교회의 주인 되심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이 교회와 복음을 위해 하나가 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본문 6절 상반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볼로와 교회를 위해 하나가 됨을 강조하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만 ‘우리’라는 단어를 다섯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볼로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볼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와 자신의 관계를 ‘우리’라는 단어를 통해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복음을 위해 하나가 되어 있는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와 아볼로는 하나가 된 모습으로 분열되어 있는 너희에게 본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절대로 혼자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때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함께 있는 것을 보시고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만들어 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심은 혼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설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들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천사들입니다. 다른 성도가 없으면 내가 제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 혼자만 열심히 기도하고, 나 혼자만 성경 열심히 공부하고, 나 혼자만 열심히 봉사한다고 해서 교회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똑똑한 나 한 사람만 남고 부족한 모든 사람들이 떠난다면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부족해도 서로 의지하며 배워가며 함께 있을 때 바로 그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들이 하나가 되어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무엇보다 화목해야 합니다. 교회의 화목을 깨고, 성도간의 화목을 깨는 것은 바른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할 때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며 신앙 생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험담은 결국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 험담는 서로의 관계를 깨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할 때 가정에서 자녀들이 듣는 가운데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어느 권사, 집사가 어떻다고 흉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허물을 자녀들 앞에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절대로 자녀들에게 영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목사를, 장로를, 권사, 집사를 험담하고 비난한다고 자녀들이 우리 부모의 신앙이 최고로 좋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과 험담을 들으며 자란 자녀가 좋은 신앙인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지 마십시오. 제가 목회하면서 경험한 바로는 교회와 목회자, 다른 성도들을 비난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신앙 생활을 잘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을 잘 세우려고 노력하기 보다 항상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다른 성도들의 단점만을 지적하며 신앙 생활을 부정적으로 합니다. 그것을 핑계로 하나님과 교회를 멀리합니다. 자녀들의 아름다운 신앙은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와 교회의 직분자들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존중하며 화목하게 섬기는 모습에서 바르게 성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으니 우리에게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교회의 화목을 깨고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교만과 구별’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사용하는 교만이라는 단어는 ‘푸시오스데’입니다. 이는 ‘부풀어오르다, 우쭐대다’라는 뜻입니다. 대적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부풀어 오르는 겁니다. 상대방과 대적하면 반드시 자기 자랑과 자기 의에 빠집니다. 자기 위치나, 형편, 자기 신앙의 위치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부풀어 오릅니다. 

토끼하고 여우가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자랑했습니다. 누가 더 높이 뛰느냐고 서로 경쟁을 하다가 자기 자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서로 자랑을 하다가 거짓말이 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토끼가 ‘나는 하늘 끝까지 뛴다’라고 자랑했습니다. 여우가 ‘하늘 끝이 어떻더냐?’고 물었습니다. 토끼는 ‘하늘 끝까지 도달해 보니 그곳은 매우 매끈매끈하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이놈아, 그 매끈거리는 곳은 바로 내 배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서로 높다고 잘났다고 자랑을 하다 보니 서로를 부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구별’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자신을 항상 예외로 생각합니다. 자신을 모든 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족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항상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지도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별하는 사람은 자기 자랑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비하시키면 상대적으로 자신이 더 높아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몇 차례 말합니다. 대단한 표현입니다. 누가 감히 사람들을 향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자신이 예수님처럼 완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겸손히 섬기신 것처럼 바울 자신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부와 명예, 권력과 지식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낮아짐으로 교회를 섬겼고 지금도 섬기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자세를 배우고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바울로, 바울에서 아볼로에게로, 또는 예수님에게서 바울로, 바울에게서 디모데에게로 선한 신앙의 닮음꼴이 이어집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교만 속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섬김의 겸손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참으로 복된 삶은 인생에서 본받고 싶은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아내와 남편에게, 자식과 부모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에게 좋은 목사가 되고, 목회자에게 좋은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관계는 행복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로 인해 행복한 것처럼 너희들이 나로 인해 행복하기 바란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만나 행복하다면 너희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화를 내게 만듭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신 비결은 섬김에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을 닮아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로서 교회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아 서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닮아 우리 교회가 몸담고 있는 화곡동과 강서지역을 행복하게 만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닮아 행복의 전도자로 세워지기를 원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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