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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믿음의 가정 (딤전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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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가정 (딤전 5:4~8)


오늘, 민족의 고유명절 한가윗날입니다. 주님의 평강이 가정마다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미 부모님과 가족 친지를 찾아서 고향으로 내려가신 교우들도 계십니다. 우리교회가 모 교회이어서 부모님과 가족들을 찾아뵙고 가족이 함께 예배하러 오신 교우들도 계실 텐데,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행복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사는 내 믿음의 잣대]

하나님 말씀을 보면, 가정사가 내 믿음을 가늠하는 잣대라 할 수 있습니다. 가정 일이, 가정의 일로만 끝나버리지 않습니다. 때로 가정사는, 가정의 일을 넘어서서 사회적인 일이 되기도 합니다. 국가적인 일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일이 되기도 하고, 나아가 온 인류의 일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다름없이 명절을 되거나 집안의 대소사나 가정의 여러 일 때문에, 큰 영향을 받으면서 삽니다. 크고 작은 가정사는 나의 믿음생활과 직결되어 있다는 말씀이지요. 가정사는 나의 믿음이 바른 믿음인가? 건강한 믿음인가? 혹 경건의 모양만 있는 믿음이 아닌가?를 판가름해주는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디모데서는 사도 바울이 아들 같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입니다. 교회가, 목회자가, 교회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가족들이 있습니다. 연세 드신 어른, 젊은이, 어린아이, 특히 교우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의지가지도 없는 분들도 계십니다. 부부 중, 일찍 홀로 되신 교우들도 계십니다. 다양한 교회 구성원들에게 교회가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권면하고 있습니다(딤전 5, 1-4).

본문 3, 4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합니다. “참 寡婦인 寡婦를 존대하라(경제적인 돌봄을 주시오)/ 만일 어떤 과부에게 子女나 孫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자녀손들이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다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다.”

이렇게 권면한 사도 바울은, 8절 말씀에서는 아주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그는) 벌써 믿음을 버린 사람이요, 불신자(비신자)보다도 더 악한 사람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가정사와 믿음은 서로 상호관계적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사를 어떻게 하느냐?가 자신의 믿음의 유무와 믿음의 진위가 가려지는 기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족 간에 일어나는 일이, 나의 믿음 생활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님께 용돈, 생활비는 꼭 드려야]

연세가 팔순이 훌쩍 넘으신 어른이 계십니다. 그 어르신은 장남이셨는데, 형편이 좋을 때나 그렇지 못할 때를 가리지 않고, 연로하신 아버지를 지극정성 모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맏이가 부모 섬기는 일 책임지는 시대이지 않았겠습니까?(다른 형제들의 무관심에도 불평한마디 하지 않고, 부모님 섬겼다) 그런데, 막상 당신이 고령이 되시고 보니 아들 딸 여럿 자식 두셨지만, 당신 자식들은 누구하나 생활비는 고사하고 용돈조차 주는 자식이 없답니다(무관심). 

그러시면서, “우리 아버지는 참 복 있는 어른이셨구나”하셨답니다 ··· 생활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절기 때 용돈이라도 내 놓는 것이 자식 된 도리 아닙니까? (제 느낌입니다만)애써 겸연쩍은 웃음 지으시는 모습이 참 마음 팎枯윱求? 그 말씀을 잠자코 듣고 계시던 부인이 저 들으라고 그러십니다. “왜, 다른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당당하게 생활비와 용돈을 가져오라고 말한다는 데, 왜 당신은 자식들에게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느냐”고 하시는데, 아무 말씀 없이 그저 듣고만 계셨습니다(내리사랑이라고, 그저 자식만, 부인 걱정 안하셔서, 밉다고).

예수 안 믿는 자식들도 아닙니다. 다 괜찮게 사는 자식들입니다. 성공한 자식들입니다. 교회봉사 너무 열심히 합니다. 자기 삶이 바쁘지 않는 자식,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내가 정당하게 번 돈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 내 몫이 아닙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마땅한 부모님의 몫이 있습니다. 자식들 양육을 위한 몫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몫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몫이 일방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칠 때가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하면, 그것은 곧 우리의 믿음이 惡한 믿음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부모님의 입가에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서야, 어찌 바른 믿음이라 하겠습니까?

혹 부모님이 경제력이 있으시다 해도, 명절이나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께 용돈과 위로금은 마땅히 드려야 합니다. 저희 할머니께서 아흔 넷 되시던 해 하나님 나라 가셨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 집을 다녀오면서 제가 깜빡하고 할머님 용돈 챙겨드리는 일을 잊고 서울 온 적이 있습니다(저도, 몰랐지요). 제가 떠난 후에, 할머니께서 어머니께 그러시더랍니다. “야야, 은호 목사가 용돈 안 맡기고 가더냐?” 어머니께서 얼른 눈치 채시고는, 봉투에 10만원을 넣어서 할머니께 드렸답니다(다음에 집에 갔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흔 넘으신 할머니께서 무슨 돈이 필요하시겠습니까? 그렇잖습니다. 돈이 필요하십니다. 집안의 가장 웃어른으로서, 돈이 필요하시지요(야야, 고맙다 니가 무슨 돈 있노···).


[역기능 가정이 되지 말고 순기능 가정이 되어야]

가정에는 두 종류의 가정이 있습니다. 순기능 가정이 있는 반면에, 역기능 가정도 있습니다. 가정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夫婦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엄마와 아빠가 가정의 중심입니다. 위로 부모님이 계시고, 아래로 자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가정들을 보면, 부부가 가정의 중심이 도지 못되고, 다른 요인들이 부부 사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이 어떤 말을 하는 지 아십니까? 슈퍼마켓에서 우유를 살 때, 남편에게 줄 우유는 아무거나 집는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먹일 우유는 꼼꼼히 이것저것 따져보고 산답니다. 어느 제품을 먹여야 머리가 좋아질까? 하면서 성분을 비교해가면서 산답니다. 젊은 엄마에게는, 남편보다 아이의 위치가 더 우선시되고 있는 거지요. 이런 가정이 바로 역기능적인 가정입니다. 이렇게 사는 부모들은, 아무리 아이들에게 부모 말 잘 들으라고 해도, 절대로 듣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를 우습게 여길 뿐입니다.

2006년 11월 20일자 조선일보에서, '맞는 엄마가 늘고 있다'는 대서특필 된 기사가 있었습니다. 청소년들이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엄마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엄마들이 어떻합니까? 자기 남편에게까지 그 이야기를 못합니다. 왜요? 매 맞는 엄마에게 이 아이는 자기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의 목표인 자식의 허물을 어떻게 남편에게 얘기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더욱 매를 더 맞고 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창피해서 말도 못합니다. 자식에게 누가 될까봐 가정의 극비로 지켜지면서, 청소년 폭력이 점점 더 늘어간다는 겁니다. 역기능적인 가정입니다. 순기능적인 가정으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심심찮게 속을 썩이는 고등학생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속을 썩일 때마다 어머니는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느 사이에 어머니의 입에는 심한 저주의 폭언까지 스스럼없이 하면서, 감정 폭발의 강도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그 아들이 바로 잡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날도 그 아들은 어머니 속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어머니가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언제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아들은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에 자던 아들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자기 얼굴에 떨어지는 뜨거운 물 때문이었습니다. 눈을 뜨자,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캄캄한 방에서 아들의 얼굴에 눈물이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아들 얼굴 곁에서 꿇어 엎드려 기도하고 계셨던 겁니다. 

아들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속으로 울면서, 가만히 어머니 기도를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참을 울면서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불을 잘 덮어주고는 방을 나가셨습니다. 아들은, 늘 화만 버럭버럭 내면서 무섭게 저주를 퍼붓던 차돌 같던 어머니에게서 첨으로 따뜻함을 느낀 겁니다. 또한 눈물로 기도하시는 연약한 어머니를 경험한 겁니다. 모두가 잠든 밤에도, 잠 못 이루며 아들을 걱정하는 따스한 어머니를 만난 겁니다. 그날 이후로, 아들이 바뀌어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 6-7). 아멘.


[자식에게 상처 받으신 부모님 계십니까?]

그러시더라도 자식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어 주셔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5, 11-24 집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계시던 하나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노아라는 아버지를 보십시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였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 세 아들을 둔 자입니다. 

그런데 홍수 후에,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어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포도주가 익었을 때 마시고는 벌거벗은 채로 장막에 누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벌거벗고 자는 아버지 하체를 둘째 아들 ‘함’이 보고는, 나가서 두 형제에게 떠들면서 아버지를 힐난했습니다(창 9, 22). 그 사실을 들은 큰 아들 ‘셈’과 막내 아들 ‘야벳’이 곧 옷을 가지고 뒷걸음으로 아버지가 벌거벗고 누워 주무시는 장막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덮어드리고 나왔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가 둘째 아들 ‘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는 분노했습니다. 그 분김에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손자)에게 저주를 선포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 24-25). 부모님은 자녀에게 권위자이십니다. 권위자의 말에는 항상 권위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권위자인 부모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자녀에게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부모의 말이 자녀에게 현실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혹시 부모를 화나게 했다고 해서, 감정대로 함부로 자녀에게 분노하거나 저주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노아가 그 때 ‘함’을 불러다가 권고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여 주었더라면, 그 후손들과 인류사회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 노아가 화를 낸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저주를 선포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모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노아의 그 저주가 가나안과 그의 후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까?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쏟아 붓는 언어폭력이 자녀에게는 아픔과 고통과 저주의 사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솔로몬은 잠언 18, 21에서 말의 권세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저주를 선포하면, 그 저주의 말은 자녀들의 생각과 의지와 사고방식까지 잡아 삼켜버리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반대로 부모가 감정을 다스려 축복의 말을 하면, 핵발전소의 에너지처럼 자녀를 일으켜 세우는 큰 동력이 될 것입니다. 


[부모의 연약함을 축복의 통로로 바꾸는 자녀가 되어야] 

노아의 두 아들 셈과 야벳을 보면서 한 가지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軟弱함이 도리어 자식된 나에게 축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께 상처받은 자녀들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연약함이, 내 인생을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연약함을 저주받는 기회로 삼지 말고, 축복의 통로로 삼을 줄 아는 지혜와 용서, 인내와 덮어줌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노아가 셈과 야벳에게 한 축복을 보십시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하나님이 셈의 하나님 되신다) ···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창대하게 되는 복)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은,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모두를 공평하게 똑같이 복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9, 1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런데, 이와 같은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 그들이 창세기 9, 22절에 오면, 서로 다른 정반대의 인생을 사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축복의 길이 선포되고, 저주의 길이 선포되고 있잖습니까? 자녀 되신 여러분, 부모님의 연약함을 내 인생의 상처와 저주의 기회로 삼지 말고, 그것을 도리어 내 인생의 기회와 축복의 통로로 만드는 믿음의 사람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사는, 우리의 믿음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우리는 자식인 동시에, 부모이기도 합니다. 아직 자녀의 신분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우리 가정에서,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가정을 회복하고, 살리고,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님께 자녀 된 도리를 다 하도록 노력하십시다. 자식들이 혹 부족하여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식을 축복하고, 자식의 연약함까지도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 주는 믿음의 부모들이 되시도록 노력하십시다. 가정사가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6, 8). 아멘. 


[기도하십시다]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정이,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부모님이, 자식이, 바로 나 자신이, 우리 가족들을 세우고 축복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상처와 연약함도 치유 받게 하옵소서. 감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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