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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더 나은 본향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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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 (히 11:13~16)


추석이 무슨 명절입니까? 추석은 한국적인 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조상의 은덕으로 생각하여 오곡백과를 차려 놓고 차례를 지내며 성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작년과 금년에는 장마도 없었고, 또한 추석을 전후해서 해년마다 한 두 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는데, 금년에는 태풍 피해 한 번 없이 추석을 맞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날마다 일기예보에 비상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얼마나 많았는지, 한편으로 성전 건축이 날씨와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지난 2년 동안 장마가 없게 해주시고 그러면서도 이 땅에 필요한 비는 꼭꼭 내려주시고, 일기 예보와 달리 수십 차례 비가 비켜가게 해주셔서 이렇게 성전을 완공케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금번에 지독한 가난으로 찌든 미얀마를 돌아보면서 불평불만을 잘하는 사람들은 꼭 한번 미얀마에 다녀왔으면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감사하며 삽시다. 감사하는 말만 합시다. 

영국의 한 부호가 카나리아를 한 마리 사서 금반지도 끼워 주고 꽃 관도 씌워주면서 18년 동안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화재가 일어나 새장의 문이 열리는 바람에 카나리아는 자유를 얻어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부호는 매우 슬퍼하며 카나리아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카나리아를 아프리카 키네아 지방에서 발견하여 다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카나리아는 영국에서 아프리카까지 장장 4천 8백km를 날아갔던 것입니다. 그 카나리아는 무려 18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아프리카 고향을 찾아갔을까요? 부호는 카나리아의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인해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카나리아를 다시 고향으로 보내 완전히 해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인생 7. 80년의 여정을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마치는 사람은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고향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노래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꿈엔들 잊으리요/그 잔잔한 고향 바다/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가고파라 가고파♪ ♪머나 먼 저 곳 스와니 강물 그리워라/날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 몸을 기다려/정처도 없이 헤매이는 이 내 신세/언제나 나의 옛 고향을 찾아나 가볼까/이 세상에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아 그리워라 나 살던 곳 멀고 먼 옛 고향♪ 

오늘의 본문은 우리 인생을 가리켜 외국인과 나그네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크세노이’라고 하는데 이는 낯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본국 사람들에게 좀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언어, 풍속, 생활양식이 달라서 이방인시 되고 이질적으로 취급되고 멸시받는 사람을 통틀어 외국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라는 말을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라고 하는데 이는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말합니다. 나그네는 고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타향에 얼마 동안 머물러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고로 그 생활은 항상 임시적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모두가 나그네와 같습니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브라질로 이민을 가야만 나그네인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살고, 고향에 살아도 나그네인 것입니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는 민족 대이동의 귀성 행렬을 바라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음의 몇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믿음의 족장들은 모두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 생각했습니다. 성군 다윗 또한 자신을 나그네로 여겼습니다. 대상 29:16에 “주 앞에서는 우리나 우리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인생은 나그네요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노인들이 자신을 가리켜 70객 80객이라고 하는 것은, 나그네로 70년, 80년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알고,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신령한 나그네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순례자 인생임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나그네는 짐을 가볍게 하려고 애씁니다. 짐이 무거우면 여행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늘의 신령한 나그네임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한다는 것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 길을 힘들게 할뿐입니다. 사람이 날 때와 죽을 때를 보면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에는 두 주먹을 꽉 쥡니다. 의욕과 야심의 표시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사는 동안 열심히 일하며 힘써 돈을 벌고, 지식을 얻고, 권세를 얻습니다. 그런데 떠나는 날에는 모두 두 손을 쫙 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인 것입니다. 땅 위에 쌓아 놓는 것을 결코 하늘로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은 출애굽 했으나 그 마음이 출애굽 되지 못하여, 항상 애굽을 뒤돌아보고 이 세상 것만을 추구하다가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북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었는데, 그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고향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 노인은 캐나다 국적을 가진 한국 교포였습니다. 고향에는 4형제 자식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후 평양에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올 때에 목사님은 공교롭게도 같은 비행기 안에서 그 노인을 또 만났습니다. 먼저 목사님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고향에 갔었습니까?” “갔더랬습니다.” “자녀들은 만났습니까?” “다 만났습니다.”  “모두 평안히들 있습디까?” “그저 그렇게 있습디다.” 그리고는 잠시 그 노인은 아무 말이 없다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으렵니다.”  “왜요?” “산천은 같으나 사람들이 다 변했습니다. 인심이 변했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주르륵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하고”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그토록 그립던 고향도 가보면 별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향에 찾아와도 그립던 고향은 아니로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온바 본향을 사모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육신의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갈대아 우르를 고향으로 삼지 않고, 오직 저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준비한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최후의 목표인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듯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3:11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에서 왔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서 하나님께로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고향, 영원한 고향은 하늘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 품을 떠난 탕자 같은 인생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찾아갈 고향이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키엘 케에골은 인간을 가리켜 말하기를 ‘고향 잃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보험회사 직원이 넉넉하게 사는 어떤 집을 찾아가서 집주인에게 생명보험에 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꼭 생명보험에 들어야 될 이유를 이것저것 설명하니까 주인이 대답합니다.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 말대로 생명보험에 들지요. 그 대신에 당신은 내가 말하는 참 보험에 들어주시오” 참 보험이라는 말에 보험회사 직원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입니다 마는, 생명보험은 그 보험에 든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세상에 생명보험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것 들면 안 죽는다는 것입니까?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돈인데 그것이 어떻게 생명보험입니까? 참 보험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보험회사 직원에게 전도했다는 이야깁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참고향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믿어야 참 생명 보험에 든 것이고, 그러한 성도에게라야 하늘나라가 참고향이 되는 것입니다.   


    3. 더 나은 본향을 찾는 사람은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나그네는 편안함이 없습니다. 늘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제나 저제나 고향 가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고향에 찾아가 안식을 누릴 때까지, 고난의 떡과 눈물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의 온갖 시련과 어려움들을 기쁨으로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비록 땅에서 때로는 환난을 당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오고, 육체의 질병으로 곤고함을 당할지라도, 그들의 삶이 위축되거나 비겁해 지거나 흔들림이 없이 굳세게 믿음의 길을 걸어 나아갔던 것입니다. 아무리 길이 막혀도 고향 가는 길이 즐거운 것처럼, 천국을 향해 가는 인생길은 힘들어도 즐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 가면 영원한 복락과 안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진 성도에게는 이미 마음의 천국이 있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마치 고향으로 가는 귀성 차표를 사 놓고 기뻐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민자의 망향가(望鄕歌)를 들어보십시오. <이민자들은 고향이 있어 행복하다. 이민 생활의 승리를 노래하며 설움을 참을 수 있는 것도, 승리의 보고를 해야 할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울컥 치미는 울화를 누르고 남의 땅에서의 시름을 달랠 수 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가슴 저 밑에 흥건히 고여 있는 고향의 정이 저력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사람은 어머니의 냄새를 모르듯, 고국을 떠나 보지 않은 사람은 애국을 모른다. 자고새면 어린애 마냥 손가락을 펴서 하나, 둘, 셋 한국과 미국의 시차 계산하며 하루에도 천만번 고향을 넘나드는 이민자들은 참 애국자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 김장김치, 무시루떡, 남대문, 동대문…. 눈만 감으면 어느새 그리운 고향은 코앞에 있다> 

비에 젖어 춥고 허기진 날에 어딘가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대했던 일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사람들에게 철저히 실망한 날에도, 반가이 맞아 줄 그리운 분이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부르고 따뜻하여도 돌아가 쉴 만한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나그네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명성이 높아져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진실 된 사랑만으로 반가이 맞을 그리운 분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이 이북에 있거나 이런 저런 까닭으로 고향을 못 가는 사람들은 가슴이 시릴 것입니다.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참 본향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뜬구름만 잡으려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본향 삼고 이 땅위에서의 삶을 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동네에 모여서 구슬치기를 하고 딱지치기 땅 따먹기를 합니다. 옛날에는 모두 그런 놀이를 하고 자랐습니다. 많이 딴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잃은 아이는 시큰둥해 있습니다. 딱지도 구슬도 다 잃어버린 아이는 아예 울고 앉아 있습니다. 많이 딴 아이에게 딴것 중에 조금만 달라고 통사정해도, 다 딴 아이는 욕심 많게 하나도 주지를 않습니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갑니다. 땅거미가 깔리면서 점점 어두워집니다. 놀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머니들이 나와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데려 갑니다. 그러면 모두들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돌아갑니다. 

그런데 딱지와 구슬을 다 따고 땅도 다 따먹은 아이는, 날이 어두워 졌는데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연연합니다. 손에는 구슬과 딱지가 한 아름입니다만 그에게는 조금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집도 없었습니다. 누가 불러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낮에는 딱지를 많이 따 모으고 구슬을 다 따서 모아도 땅따먹기에서 모든 땅을 다 땄어도, 해가 지자 그는 갈 곳이 없는 비참한 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리 땅을 많이 가지려고 아우성을 치고, 돈을 많이 벌려고 발버둥을 치며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밤이 찾아옵니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때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의 황혼이 되어 주님 부르실 때에, 다들 행복한 표정으로 주님의 품으로 가는데, 아무도 불러 주는 이 없고 갈 곳 없어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갈 곳 없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고해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는 자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고향은 영혼의 안식처와도 같습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아가고 싶어 합니다. 물은 바다로부터 왔기에 바다로 흘러갑니다. 불은 태양으로부터 왔기에 하늘로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란 자기의 본향이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품이란 사실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성도라면,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달려갈 길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서순석 목사 칼럼-1980년 봄 프랑스의 부르세 병원에서 사르트르가 입원했습니다. 병명은 폐수종이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지성인이었습니다. 사르트르처럼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글로, 특히 그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글을 발표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런 사르트르였습니다만 병원에 한달 가까이 있는 동안,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쳐 댔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물어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 세계를 풍미하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사르트르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발악을 하다가 1980년 4월 16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프랑스 언론들이 떠들어댑니다.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자유를 그렇게도 외치던 그의 마지막이 그토록 비참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사르트르를 자랑했다면 독일에는 ‘본훼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앞서서 세계 대전 중 독일 수용소에서 나치에 항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그의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고, 함께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형제 여러분! 나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일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으로 갑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감방을 나섰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뒤덮고 있는 기쁨과 평안을 보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와 본훼퍼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과, 돌아갈 고향을 준비한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미국의 어떤 농부가 교통사고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으니 많이 좋아 졌습니다. 조금만 더 치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도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후부터 점점 더 아프기 시작하더니만, 몸에는 별 이상이 없는데 이상하게 사람이 점점 시들시들 해가더니 급기야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그의 침대에서 그가 남긴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하나 없는 나의 집은 고된 일과 고독과 외로움뿐, 차라리 나는 여기서 죽는 것이 낫다.” 

갈 곳이 없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된 일 뿐이라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들이지만,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영혼이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며,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고해와 같은 세상에 살지만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하늘나라의 나그네들은 이 땅에서 선한 일에 힘을 쓰게 됩니다. 이웃을 위하여 가장 좋은 일, 곧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과 시간을 바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 성/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한 밤을 새웠네/저 망망한 바다 위에/이 몸이 상할지라도/오늘은 이 곳, 내 일은 저 곳/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길 다 가고/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주께서 아시리/빈들이나 사막에서/이 몸이 곤할지라도/오 내주 예수 날 사랑하사/날 지켜 주시리♪

성도 여러분!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머물 동안 주의 일을 힘쓰며 주의 구원함과 은총 전하고, 나의 생명 마치는 날 저 본향에 올라가 주의 얼굴 그 곳에서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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