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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 것도 없어도 감사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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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어도 감사 (고후 6:1~10)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라고 ‘탈무드’는 말합니다.

한 청년이 맥도날드 앞, 벤치에 안아 햄버거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 한대가 가게 앞에 멈추더니 한 여자가 내려 햄버거를 사서, 자동차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년은…
‘나도 옆에서 챙겨주는 비서가 있어서, 저렇게 자동차 안에서 편안하게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던 사람이 벤치에 앉아 있는 그 청년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저 청년처럼 다리가 건강해서 집에서 혼자 걸어와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벤치에 앉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감사한 일이 사라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주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감사 할 수 없게 되고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내게 주어진 감사한 일들을 보지 않고 남에게 주어진 것을 비교하며 불행한 삶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행과 행복은 우리들 마음 자세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행하길 원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길 원하십니까?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약 7년 전 목사가 되어서 처음으로 교회 사택에 들어 갔을 때였습니다. 
그 사택은 30년도 넘어 보이는 7평 정도의 낡은 집이었습니다. 
8가구가 함께 사용하는 공동화장실이었고, 씻는 것도 불편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목사가 되어서 처음 들어 간 사택이라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비교하면 지금은 환경이 더 많이 좋아 졌습니다.
지금 저희 집에 저희 가정만 사용하는 화장실이 있습니다. 
저는 화장실을 사용 할 때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희 집에는 거실도 있어 감사합니다. 
거실에는 소파도 하나 있습니다. 항상 우리 가족 3명이 함께 소파에 앉을 때 마다 행복합니다.
제 방도 따로 있습니다. 방에는 책상도 있고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도 있어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댁 정수기에서 얼음이 나옵니까? 저희 집에는 얼음이 나옵니다.
자가용도 있습니다. 그래서 차를 타고 교회에 올 때도 감사하고, 차를 두고 걸어 올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출근을 합니다. 전 정말 행복합니다.
제가 좀 여유롭게 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저 정도 사십니까?
이 얘기를 제 아내에게 했더니 이야기를 듣던 아내가 갑자기 울먹였습니다! 
얘기를 하는 저나 듣는 제 아내에게는 같은 마음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왜 우냐고 물었습니다.  제 아내는   “당신은 그게 다지만,  
자기는 거기에다가 멋진 남편이 하나 더 있어서 더 행복하다고 감격해 했습니다.”
저도 사랑하는 아내와 천사 같은 아들의 존재에 정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을 복음전파에 사용했고 이제 아무것도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에 바울은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거짓말 같은 말을 합니다. 거짓말 같은 말이지 거짓말은 아닙니다.
‘육적으로는 거짓말 같으나,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맞습니다’
우리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거짓이라 말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바울은 스스로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고 고백했습니다. 
단지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아무것도 없는  감사’라는 제목처럼 
오늘 본문 9,10절의 내용도 앞뒤가 쉽게 이해 되지 않는 말들일 수 있습니다.

본문 9,10절 다시 한번 한 목소리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9,10절 두 절에서 ‘같으나’라는 단어를 6번 사용합니다.

앞에서 시작하는 말은  뒤에 이어지는 말은
육적으로는 ~처럼 보이지만, ~같으나 /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고 사실 ~ 이다. 라는 말씀합니다.

제가 9,10절을 단어와 배경을 헬라어 원문과 실제 상황에 적용해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시 당하는 자 같으나 /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이다.
죽을 만큼 힘든 것 같으나 /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 같으나 / 도리어 하나님께 보호를 받는 것이다.
육적으로 가난 한 사람 같으나 / 영적으로는 많은 사람의 영혼을 부요케 하는 사람이다.
세상의 물질은 넉넉하지 못한 것 같으나 /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아멘.

이 말씀이 사도 바울뿐 아니라 여러분의 영적인 인생과 육적인 삶 속에서 믿어지고 경험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 사고 속에는 인과응보적인 논리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바울의 무명함과 죽음의 고난과 고통 그리고 가난함은 예수님의 사도라고 보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 유대교 율법을 무시하는 바울을 싫어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4,5절에서 언급된 고난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택한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울 자신이 누릴 수 없었고, 볼 수 없었고, 경험 할 수 없었던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됨을 고백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감사’ 할 수 있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고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전인격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세상을 보는 영적인 관점과, 영적인 해석의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통찰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사람 사울이, 영적인 사람 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그는 육적으로 부요했고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영적인 요소들은 갖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에 대해 열심이었고 헌신적이었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는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주님과의 만남과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 전에 없었던 영적인 통찰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바울은 이전에 경험 할 수 없었던 영적인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느끼고 체험하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관점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영적인 통찰력으로는 보여졌고, 알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될 때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주님 만나기 전 바울에게 불가능했던 일이 이제 가능해 졌습니다. 
율법주의자 사울에게서 상상 할 수 없었던, 아니 불가능했던 것들이 기적처럼 가능해 졌습니다.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 바울의 삶은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의 삶에서 보이지 않았던 주님의 손길이 보이고 경험되시길 소망합니다.
추석 명절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 삶에 있었던 감사의 순간을 기억해보려 하지만 밑줄 그을 만한 감사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모습들이 있지 않습니까?
항상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 어색한 감사를 드리지는 않았습니까? 아무일 없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눈물이 날 만큼 감사할 일이 왜 없는 건가요?”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신 분들 계십니까?
지난 인생을 돌아볼 때 “하나님 저에게는 왜 기적과 같은 일이 없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이 보이지 않는 것 같으나 / 이제는 보여지길 소망합니다.
세상의 위협과 공격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 같으나 / 주님의 보호하심이 보여지길 소망합니다.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 같으나 / 모든 것이 가능해 보여지길 소망합니다.

그 일들이, 그 감사의 기적이 가능하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 오늘 본문 말씀을 뒤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 가도록 하겠습니다. ]

본문 6, 7절에 ‘의의 무기’를 설명하면서 ‘그 무기’로 영적 싸움을 싸워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영적인 통찰력’을 가진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체질이 개선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고 9, 10절을 믿음으로 고백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적인 삶으로는 절대 볼 수 없고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의 무기’는 세상적으로는 전혀 무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무기도 막을 수 없고 공격 할 수 없는 무기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이길 때 사용 할 수 있는 강력한 하늘의 무기입니다.  
“핵폭탄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평화”라는 이치와 같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으로 살지 않는 사람은 이해 할 수도, 사용 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바울이 세상을 행해 사용했고 그것으로 영적인 삶에 눈을 뜨게 한 그 의의 무기는

1)깨끗함 입니다: 도덕적으로 생활에 흠 없는 삶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의의 무기이고 
동시에 영적인 통찰력을 가질 수 있는 능력임을 말씀합니다.

2)지식: 하나님의 뜻을 민감하게 파악 할 수 있는 지식이 의의 무기이고 
영적인 통찰력을 유지 할 수 있는 능력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3)오래참음: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적대,자들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갖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을 이기는 것이고 세상을 이기는 의의 무기라고 말씀합니다.

4)자비: 오래 참음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 타인에 대해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성품이 의의
 무기라고 말씀합니다.

5)성령감화: 자신의 육적인 능력을 의지하거나 인간적인 성격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은사 또는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의의 무기라고 말씀합니다. 

6)거짓 없는 사랑: 진실한 사랑이 세상을 이기는 의의 무기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2:1 사람을 구분해서 사랑하지 말하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사랑하거나, 조건에 따르는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세상을 이기는 의의 무기이고 영적인 삶에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7절,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은 앞에서 언급한 6가지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살았고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또 이러한 성품으로 살았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사단이 공격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격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세상적이고 육적인 방법으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6,7절 처럼, 영적이고 거룩한 삶, 진실하고 거짓 없는 사랑으로 무기를 삼아 세상을 이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삶, 육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영적인 관점과 영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육적인 성품을 가지고 누군가와 대적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혈기로 싸워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육으로 이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겨도 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깨끗하고, 자비하고, 성령을 의지하는 거짓 없는 삶뿐임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본 절에서 말하는 ‘의의무기’란 너무 영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영적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표현들이 보여 질 때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 변화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고, 그들도 주님을 믿게 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우리의 영적인 삶은 세상이 이해 못하는 표현 방식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6,7절의 의의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거나 거리낌이 되지 않도록 도덕적,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도바울과 같은 마음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은 영적인 통찰력으로 사도바울처럼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체험하지 못했던 것을 체험하고,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서도 감격의 눈물이 있는 진실한 감사를 경험할 수 있는 영에 속한, 의의 무기를 사용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절, 마지막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육적으로는 아무것도 늘어난 것도, 많아진 것도, 좋아진 것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생겨야 감사 할 수 있었고 어려움이 찾아오면 아무런 갈등 없이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행복의 기준은 같았습니다.
내 삶이 좋으면 하나님도 좋지만, 좋은 일이 사라지면 하나님도 더 이상 좋은 분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3절,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6~7절에 의의 무기를 사용하여 영적인 통찰력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젠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주기적으로 찾아 오고 감사할 내용이 늘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감사가 보이고 감사할 수 있는 영적인 삶과 통찰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기도) 

하나님 사도바울처럼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늘 채워주셔서 영적인 삶을 살게 하시고 영적인 통찰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 동행하는 저희들의 삶이 되게 하시고 육적인 욕심을 버리고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영적인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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