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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드시 가져야 할 두 가지 지식 (출 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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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가져야 할 두 가지 지식 (출 4:1~17)


1. 반드시 가져야 할 지식

1) 두 가지 지식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자신이 지은 기독교 최고의 교리서인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첫머리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두 가지 지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가진 모든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관한 지식이다. 이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하는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사람이 ․․․․․․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바르게 살펴 볼 수 없으며 알 수 없다. ․․․․․․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칼빈이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두 가지 지식은 첫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칼빈이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그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자신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며, 그리고 자신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지식, 앎의 의미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이 ‘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대로 성경의 ‘안다(야다)’는 말은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 등을 ‘감각 기관을 통해 얻는 여러 가지 지식’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안다’는 말에는 반드시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함께 나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말은 경험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보고 듣고 경험해서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경험적이라는 말은 좀 더 구체적이고 세밀하고 또 은밀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것이 창세기 4장 1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 1절에서 이 말은 아담과 하와가 '부부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즉 부부가 서로를 아는 만큼의 지식, 다른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오직 두 사람 만이 경험을 통하여 공유하는 상대에 대한 지식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앎이요 지식입니다. 이러한 앎의 의미는 구약성경의 11군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창 4:1, 창 19:5,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19:22, 삿 19:25,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앎, 즉 지식의 개념에 대해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이고 이론적인 지식과는 달리, 구약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끊임없는 경험과 인격적인 만남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앎,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어떤 것입니까? 그 대상과의 끊임없는 만남과 반복적인 경험으로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개념으로 먼저 여러분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아십니까?(4:1~9)

시나이 광야에서 평범한 목동으로 살고 있던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에 타지 않으면서 불이 붙어있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명령을 거절했습니다(출3:11).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면서 반드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모세는 ‘나를 보낸 분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갑니까?’ 하면서 거역했습니다(3:13).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세 번째 거절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면서 내세우는 주장이 무엇입니까? ‘제가 가서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도 백성들이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신 사실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그들이 저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할 때, 이 ‘믿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아만'입니다. 이 말은 '어린아이를 양육하다', '부모를 신뢰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40년 만에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갈 것이라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모에게 양육받는 어린아이들이 그 부모에게 하듯 신뢰하면서 따라 나서겠느냐?,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비록 오래 전의 일이지만, 백성들 중에는 40년 전 자신이 애굽 사람을 살해한 일과 그런 자신의 모습을 두려움으로 지켜보았던 기억이 남아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과거 애굽인을 죽인 일과, 동족들조차도 자신을 썩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런 자신이 시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다가 어느날 갑자기 백성의 지도자와 구원자가 되겠다고 나설 때 누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고, 또 자신을 신뢰하여 따라나서겠느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의 거듭되는 거역을 잘 살펴보면,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백성들이 모세를 믿어주지 못할 것이라는 점보다는, 모세 자신이 아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떨기나무 가운데서 만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는 되었지만, 그것이 분명한 확신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가지고 있던 것은 목동의 지팡이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더니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필이면 뱀이 되었을까요? "긴 막대기가 살아있는 생물로 변화될려면 뱀만큼 적당한 것이 뭐가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지팡이가 길기 때문에 뱀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목동의 지팡이로 말이 되게도 하시고, 소가 되게도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신 것은 당시 애굽 문화권에서 뱀은 바로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궁과 왕이 사용하는 집기 등에는 뱀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셔서 그것을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꼬리를 잡으라"는 말은 '아하즈'로서 '제지하다', '조롱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모세가 꼬리를 잡자 지팡이가 된 이 일을 통하여, 모세로 하여금 애굽으로 가서 바로를 조롱하듯 이겨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이적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이 모세를 자신들에게 보낸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우선적으로는 모세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능을 확신하도록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지팡이 이적을 경험하고도 뭔가 부족하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의 이적을 더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6절 이하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셔서 모세가 손을 자기 품에 넣었더니 갑작스럽게 그 손에 나병이 발병하여 피부가 하얀 눈처럼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손에 나병에 걸린 것을 본 모세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그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라’ 하신 후에 보니, 원래의 제 살로 되돌아 와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병은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한 병으로 여겼지 않습니까? 그리고 당시엔 불치병이었습니다. 병 중에 가장 부정한 병, 그리고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나병이 순식간에 생겼다가 다시 깨끗하게 고쳐지는 것을 모세가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하나님은 8절에서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의 표징은 믿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팡이 이적을 보고도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을 보내신 것을 믿지 않으면, 두 번째 손 이적을 행하라는 말씀이고, 그러면 백성들은 다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손 이적 역시 우선은 모세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즉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확실하게 알고 믿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그 권능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지를 경험하여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다음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고 믿으시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성도인 여러분의 삶에서 실재로 활동하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뜻하시고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대로 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셨다면, 여러분은 ‘안됩니다. 못합니다. 못갑니다. 그들이 듣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반대할 겁니다’ 하면서 모세처럼 머뭇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이후 여러분들은 이러한 분명한 믿음,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하나님 지식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게 던지는 두 번째 질문에 여러분이 답하실 차례입니다.


3. 자신을 아십니까?(4:10~17)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필이면 가장 형편없는 때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광야에서 무명소졸로 지낸 지 40년, 목동으로서 광야의 햇볕에 그을리고 짐승의 똥오줌 냄새가 뱃속에 까지 배였을 때입니다. 이제 나이도 80세로서, 연세드신 분들에게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가장 보기 좋을 때는 이미 지났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이때에 모세를 부르셨을까요? 좀 더 잘 할 수 있을 때, 기력이 남았을 때, 능력이 있을 때, 부르실 것이지, 다 늙어서 부르시다니요 ․․․. 

그래서 일까요? 본문 10절 이하에 보면 모세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주께서 제게 나타나신 후에도, 제게 애굽으로 가서 당신의 백성을 구하라고 명령하신 후에도, 저는 여전히 저일 뿐입니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되었다. 준비 완료! 가라!'고 하셨지만, 모세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모세는 아주 정직하게 말합니다.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좀 더 능력 있는 사람, 좀 더 젊은 사람을 보내세요. 저는 아닙니다.‘ 여러분, 이 장면은 다소 부정적으로 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면, 모세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거절은 입으로의 거절이 아니라 진심의 거절이었습니다. 모세는 "오, 주여"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어로 "오, 아도나이"하는 절규인데요, 이러한 그의 절규는 지금 그의 거절이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경험하기 전에는 쓰라린 기억이 있는 애굽이 싫었고, 배신자요 범죄자로 낙인찍힌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으며,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을까봐 걱정이 되었기에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분명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자신은 이 위대한 구원역사의 중심에 설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지를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심에 비추어본 이사야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가를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순간, 이사야는 본능적으로 탄식을 쏟아내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다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자마자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십시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5:8). 

사도 바울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본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깊은 절망감에 빠져 소리 질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어거스틴은 주님을 만났을 때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 
루터는 "나는 버림받을 죄인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분명하게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면, 오늘 본문의 모세처럼,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처럼, 자신의 실제 모습으로 인하여 번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 있습니다. “내가 아직도 망하거나 심판을 받지 않고, 오히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잘 살고 있는 것은 아직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의 은혜 때문이구나! 나 같은 죄인을 향하신 주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이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게 두 번째 묻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여러분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세상의 것으로 우열을 따지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직하게 자기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겸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심이 아닌 겸손이요 위선된 겸손입니다. 이 위장된 겸손은 은밀하게 감춰진 교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낮은 자리에 앉아도, 검소한 옷차림을 해도, 고분고분한 말투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남자로 군에까지 갔다 왔다가 여성으로 성을 전환한 ‘하리수’라는 사람이 어느 방송에서 화가 나니까 자신도 모르게 굵은 남자 목소리로 “야”라고 후배 연예인에게 야단을 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감추어도 진심이 아닌 것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참된 겸손은 하나님 안에서 이미 죽었고 또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애쓰지 않으며,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 정직할 뿐입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스즈키 이치로(29)라는 대단한 선수가 있습니다. 동양 사람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미국 무대에서 최고의 타자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작년엔가 그에게 '국민 영예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이치로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에게 "국민 영예상은 최고의 상이며 역대 수상자는 훌륭한 인물뿐이었습니다. 저의 야구 인생이 끝난 상태에서 상을 준다면 고맙겠지만, 저는 아직 젊습니다"라고 하면서 수상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선수들보다 잘하기 때문에, 미국인들과의 경쟁에서 당당히 승리했기 때문에, 그래서 조국 정부가 주는 상을 받을만하다고 모두를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신앙은 자신을 잘 아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것입니다. 아니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의 자리에 여러분이 서시기 바랍니다.


4. 가장 위대한 깨달음, 가장 위대한 자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권능을 경험하여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자신을 똑바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 자신의 실체를 항상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결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 이 두 가지 신앙의 모습, 신령한 지식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그를 깨닫게 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 권능을 아는 것은 결코 지식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 권능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누리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오늘 보문 이후에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요? 그의 하나님 지식은 살아계셔서 권능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곁에 모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아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호렙 산에서 만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알게 된 이후로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바로 안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권능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아, 항상 진실과 겸손과 온유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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