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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 6: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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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 6:4~10) 
 

미국의 시카고(Chicago)에서 미술품 경매가 있었습니다. 값비싼 미술품들이 다 경매된 뒤에 오직 하나의 그림이 남았습니다. 이름 모를 작가의 그림이었습니다.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서 싸게 14불 75센트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뒤에 알고 보니 이 그림은 희랍 화가인 미네르바(Minerva)의 "애굽으로 가는 거룩한 가족" 이라는, 아기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 가는 장면을 그린 유명한 그림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17세기에 잃어버린 것인데, 시카고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내 그 그림은 다시 5만불에 팔렸다고 합니다. 5만불도 넘는 귀한 그림을 14불 75센트에 산 사람이나 판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가치를 모르는 자는 그것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깨달음에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바로 알 때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이나 ~이다" 라는 표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는 바울이 당시에 많은 오해를 받았던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바울이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예수를 전하러 다녔으니 그의 모습은 예수 믿기 전보다 훨씬 못하고 초라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믿고 얻은 것, 체험한 것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의 비난을 이용하여 오해를 하나씩 풀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누구인지, 예수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변증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 속에서 사물을 보는 눈을 깨닫게 됩니다. 역설적 표현의 앞 부분은 세상적 시각에서 본 것입니다. 즉 세상적으로 볼 때 우리는 속이는 자 같고 무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며,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단순한 시각입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이런 시각으로 사물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울도 거듭나기 전에는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바울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타난 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 지위와 명예와 재물을 다 버렸습니다. 자랑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나 현실을 불평하거나 원망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경에 매이지 않고 환경을 바꾸었습니다. 감옥을 별장으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난을 부요로 채웠습니다. 역설적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누구나 가능한 고백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죽으나 사는 자입니다

전도자 무디(D. L. Moody)에게 기자가 찾아와 "당신의 생애에 대해서 짤막하게 소개해 주시죠?" 라고 인터뷰를 요청합니다. 이때 무디는 말합니다. "나는 육신으로는 1837년 생, 영적으로는 1856년 생입니다. 육신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만약 신문에 내가 죽었다고 기사가 났을 때 당신은 그 기사를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갔으니 영원히 살고 있다고 믿으시오. 이것이 나의 생의 전부요."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의 사소한 것 때문에 결코 탄식하지 않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바울도 육체적으로는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다 죽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다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세상에서 육체로 사는 동안에는 별로 두드러지게 이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나 안 믿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예수 믿으면 영적으로 산 자입니다. 하나님이 영혼 가운데 임하여 계십니다. 육체의 죽음을 거친 후에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삽니다. 흔히 영생을 나중에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실은 세상에서부터 영혼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 자체가 영생입니다. 그 영생이 천국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겉으로 보면 동일하나 그 영혼에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육체적 죽음이 올 때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안 믿고의 차이는 언뜻 나타나지 않는 것 같으나 후일 죽음을 맞이할 때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본문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영원히 산다' 고 믿는 사람과 '나는 죽는다' 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이같은 영원을 향한 신앙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 라는 바울의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고문당하며 핍박을 받고 죽을 지경에 처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그릇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죽는 자 같으나 살아있다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근심하나 기뻐하는 자입니다

전래동화 '삼년(三年)고개'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고개에서 넘어진 사람은 3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 어르신이 이 고개에서 넘어졌습니다. 몸을 다친 노인은 아픈 몸도 몸이지만 앞으로 살날이 3년뿐이라는데 더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근심에 싸여있는 어르신에게 꾀가 많다고 소문난 소년이 찾아왔습니다. 그 소년은 "어르신 무얼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그 고개에 가셔서 한번 더 넘어지십시오" 라고 합니다. 어르신은 "이 녀석아, 네가 지금 날 놀리는 거냐" 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능청스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한번 넘어지면 3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니 두 번 넘어지면 6년을 더 사실 것이고 세 번 넘어지면 9년…" 어르신은 소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고개로 달려가 데굴데굴 굴렀다고 합니다. 어떤 일을 당하든 그 일로 인해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된다는 동화의 교훈입니다. 어려운 일에 마음이 약해져 있으면 기가 죽어 심신이 더욱 더 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바울은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 근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는 자, 슬퍼하는 자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환경적인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니 공허하고 불안합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쁨은 영혼에 무엇이 있느냐의 문제이지, 외적으로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적 기쁨이 웅덩이의 물이라면,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은 샘물과 같습니다. 웅덩이 물은 있을 때만 좋으나 마르면 사라집니다. 샘물은 솟아나므로 항상 있습니다. 흙이 메워져 더럽혀질지라도 곧 회복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항상 기뻐하노라 고백합니다.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감옥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기쁨은 환경이나 조건과 관계없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예수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기쁨입니다. 미래의 약속에 대한 기쁨이요, 고난 중에 예수와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그는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보고 살았기에 비록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셋째로 가난하나 부요케하는 자입니다

비행기로 여행을 하던 중에 두 사람이 만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첫눈에 부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부요해 보이는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사업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합니다. 한참 자랑에 도취해있던 부자는 미안한 듯이 상대방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당신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말씀 좀 해보십시오". 상대방이 입을 엽니다. "제 아버지도 엄청난 부자이십니다. 이 비행기를 포함한 동산이나 부동산을 소유하신 분이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부자는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을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세계가 다 아버지의 것이랍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도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곳에 가도, 무엇을 먹고 마셔도, 어떤 것을 가져도,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부자로 느끼며 살아간답니다." 

그때서야 부자는 상대가 영적 부요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확신에 넘치는 그의 자랑에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상대는 부자에게 말합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면 나처럼 참된 부자의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부자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내게 단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영적 부요함에 대해 당신처럼 확신에 차 이야기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 비행기에서 내릴 때, 부자도 부요하신 하나님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바울은 예수 믿고 가난해졌습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해도 후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장막 깁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론 가난했지만 영혼은 항상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은혜를 끼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로 인해 구원과 영생,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해도 영적으로 부요하면 자신도 평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전해 주고 나누어주어도 손해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달라집니다. 예수 안에 역설적인 은혜가 있기에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이 영생으로, 근심이 기쁨으로, 가난이 부요로 바뀌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바울처럼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부요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 라는 확신으로 세상을 이겨 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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