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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의 빛 (마 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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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빛 (마 4:12~17)

지난 8월 북경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임수정, 손태진, 황경선, 차동민... 기억하십니까? 태권도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입니다. 그때 문대성씨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간절한 승리의 바람이 금메달을 따게 했다.” 금메달의 꿈이 태릉선수촌의 온갖 고된 훈련을 다 견디게 해 주었고,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그 어려운 시합을 다 이기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간절히 성공을 바랍니다. 간절히 바란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성공의 희망을 품고 온갖 고난을 다 이겨냅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주고 영광을 줍니다. 우리는 올림픽에서 그러한 빛을 많이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성공을 간절히 바랄 때,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바라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성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2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도 이 빛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무슨 빛입니까? 바로 천국을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신 바로 그 천국의 빛입니다.

창세기에 요셉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소년 시절, 요셉은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밭에서 곡식 단을 묶는데,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둘러서서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또 한 번은 해와 달과 11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인생은 꿈과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요셉은 17세 때 노예로 팔리어 갔습니다. 다음에는 이집트에서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요셉과 함께 하셔서 하는 일마다 성공했습니다. 결국 30세 때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38세 때 형들이 찾아와 꿈대로 절을 했습니다. 39세 때 아버지 야곱을 상봉했습니다. 요셉은 110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유언합니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고 하라.”(창 50:24-25)

무슨 뜻입니까?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로서 당시 인간의 나라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들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며 11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세상에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비옥한 나일강의 삼각주에 위치한 고센 땅이 아니라 그 너머의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버지 야곱에게 주신 약속의 땅을 소망하고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셉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도 나름대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감당하며 나름대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아닙니다.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부족합니다. 마귀도 많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지난 주 제가 섬기고 있는 서울장신대학교 채플에 ‘평양샬롬선교합창단’이 왔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김평일 교장의 인도로 9분의 여자분이 오셨습니다. 저들의 고난의 삶을 노래와 춤과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 동안 저들이 겪었을 환난의 세월을 생각하며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자기들에게 죽음의 땅이었다. 그래서 살려고 나왔다. 중국은 노예의 땅이었다. 숨어서 온갖 박대 다 받으며 억압받고 살았다. 대한민국에 와 보니 천국 같았다. 먹을 것도 있고 자유도 있었다.

그 말을 들으며 자는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천국이라니! 젊은 사람들이 화가 나서, 몇 달을 촛불 시위하는 나라가 무슨 천국이야? 불교 신자들이 종교 편향이라고 저렇게 항의 시위하는 나라가 무슨 천국이야? 자살률 1위 나라가 무슨 천국이야?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디 간들 완전한 천국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을 가면 천국일까? 사회 복지가 가장 잘 되어 있다는 북유럽에 가면 천국일까? 남태평양의 섬나라에 가면 천국일까?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 완전한 천국은 없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결국 하늘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지만, 이 땅의 천국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하늘 천국을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 천국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하늘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삶은 우리 삶의 목표를 하늘 천국에 두고 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삶입니다.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를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삼고 오늘의 삶을 도착지에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천로 역정]을 쓴 존 번연(1628-88)이 생각납니다. 번연은 영국 벳포드에서 땜쟁이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도 젊은 시절 무식하고 불량스런 떠돌이 땜쟁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653년 25세 때 침례교회 목사 존 기포드를 만나 회심했습니다. 은혜를 받이 많은 존 번연은 곧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660년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공화정이 무너지고 왕정이 다시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영국 성공회 국가 교회에서 안수 받지 않은 사람은 설교할 수 없다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존 번연은 1660년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바로 투옥되어 1672년까지 12년 동안 감옥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1667년부터 1672년까지 [천로 역정](Pilgrim"s Progress)을 썼습니다. 1678년 1부가 출판되었고, 1684년 2부가 출판되었습니다. 존 번연은 설교자, 복음 전도자로서 살다가 1688년 60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존 번연은 [천로 역정]에서 한 그리스도인이 멸망의 도시를 떠나 천상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잘 묘사했습니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몸이 굽은 상태로 등장한 크리스찬이 멸망의 도시를 떠나 영생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복음 전도자에게 복음을 듣고 좁은 문을 찾아 드디어 십자가에서 죄짐을 벗었습니다. 크리스찬은 곧 길고 고된 순례의 여정에 들어섭니다. 크리스찬은 절망의 늪을 빠져 나와 좁은 길을 따라 환난의 언덕을 올랐다가 다시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크리스찬은 더러운 악마 아폴리온과 싸워 이기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섭니다. 다음 온갖 세상의 유혹으로 가득찬 허영의 시장을 지나고 절망이라는 거인에게 사로잡혀 의심의 성채에 갇혔다가 다시 풀려납니다. 마침내 크리스찬은 다리가 없는 죽음의 강을 건너 천상의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 천국을 목적지로 사는 삶에 대해 조금 더 묵상해 봅시다. 과연 하늘 천국을 목표로 바라보고 사는 삶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일까요?

(1) 우선 하늘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삶은 이 땅에서의 성공을 너무 부러워하지 않는 삶일 것입니다. 인간의 나라는 성공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실패한 사람은 인간 대접을 잘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을 많이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우리들은 이 땅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그렇게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 나라에서 성공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성공한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많이 벌 수도 있고 조금 벌 수도 있습니다. 귀한 자리에 갈 수도 있고 비천한 자리에 갈 수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과정에서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 다 지나가는 삶입니다. 하늘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는 이 세상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어느 정도 초연해서 살 필요가 있습니다.

추석입니다. 친척 친지들과 많이 만납니다. 예전에는 명절에 서로 만나면 덕담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만나도 덕담을 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결혼해라.’ 그러면 이미 싱글로 살고 있는 젊은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취직해서 효도해라.’ 그러면 아직 취직 못한 젊은이들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일어나려 합니다. 우리는 덕담에 상처받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덕담에 비상 걸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한번 상기시켜 주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님이 네 인생을 친히 인도해 주실거야.”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거야.” 이 정도 영적인 덕담이 낫겠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와 조금 거리를 두고 영적인 덕담해야 하겠습니다.

추석은 한 해의 수확을 기뻐하며,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움과 풍성함을 만끽하며 친지들과 그 즐거움을 나누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이 있듯이, 이럴 때일수록 더 소외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인생의 최종 목적지를 제시하는 덕담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다가 삶의 방향도 없고 목표도 알지 못한 채, 더듬거리면서 어리석고 소망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인생의 끝을 보여주며, 인생의 지혜를 알려 주는 덕담을 하시기 바랍니다.

 
(2) 또 하나, 하늘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순례자들은 자기 묘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고대인들은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이집트에만 피라미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멕시코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습니다. 어떤 피라미드는 300미터 높이에 5킬로 미터의 미로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 천국을 향해 여행하는 순례자들은 자기 무덤에 대해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생각납니다. 하나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이고 다른 하나는 장로교회의 아버지 요한 칼뱅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유명한 [고백록]에서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에 대해 말해 놓았습니다. 모니카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아들 어거스틴이 회심하고 세례받자, 아프리카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서쪽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모니카는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나를 그냥 이 곳에 묻어라. 그리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단에서 나를 기억해 다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고향에 묻히기를 소망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무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

요한 칼뱅도 그랬습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평생 목회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칼뱅은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나를 그냥 제네바 공동묘지에 묻고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래서 제네바 교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100년이 지나, 칼뱅을 존경하는 외국인이 제네바에 들렸다가 칼뱅의 무덤을 수소문한 뒤, 겨우 벽돌에 칼뱅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도 이니셜로 “J. C.”라고만 표시해 놓았다고 합니다. 

  
(3) 하늘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들은 이 땅에 많은 재산을 남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1963년 11월 22일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했습니다. 온 세계가 텍사스 달라스에서 벌어진 이 충격적인 저격 사건에 경악했습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가 죽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날 또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바로 20세기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였던 영국의 C. S. 루이스가 죽었습니다. 4일 뒤, 11월 26일 영국의 헤딩턴 쿼리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루이스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그 날 아주 적은 몇 사람만이 장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케네디의 죽음에 온통 관심이 쏠린 때라, 루이스의 죽음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30여 년 동안 루이스의 막연한 친구였던 조지 세이어의 말에 의하면, 루이스의 개인적 친구들만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루이스는 조용히 죽었을 뿐만 아니라 돈도 얼마 남기지 않았습니다. 루이스의 남은 재산은 3만 7,772파운드(현재 원화로 약 7,600만원)였습니다. 루이스는 그의 작품의 수익금을 대부분 기부했고 집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루이스는 오랫동안 함께했던 집사 팩스포드에게 100파운드의 유산밖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사 팩스포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이렇게 적은 유산을 받았네요.” 그러자 루이스의 집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뭐, 재산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선생님은 돈에 대해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분의 생각은 늘 높은 데 있었습니다.”

루이스는 20세기에 이 세상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늘 천국을 바라보고 살았던 대표적인 순례자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하늘에서 자기 장례식의 초라함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추석입니다. 가을 추수에 대해 감사하고 조상을 생각하는 이 명절에 우리는 오히려 천국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인간의 나라에서 성공과 실패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고, 죽음 뒤 자기 무덤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지 말고, 이 땅에서 너무 많은 재산을 남기려 하지 말고, 루이스처럼 늘 높은 데 마음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 

천국의 빛이신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하나님 나라에 참 소망을 두게 하옵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천국의 기쁨과 평안이 우리 심령을 주장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참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주께 늘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소망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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