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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두 준비된 것 같지만 오히려 부족한 것들 (출 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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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준비된 것 같지만 오히려 부족한 것들 (출 2:11~15)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인생은 삼기로 나누어집니다. 제 1기는 태어나서 40년간 바로 왕궁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기간입니다. 제 2기는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광야 훈련을 받는 기간입니다. 제 3기는 소명을 받고 백성을 애굽에서 이끈 40년 기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인생 제 1기의 마지막 부분 40세가 되었을 때의 기록입니다. 인생의 전환점 때 기록입니다. 아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젓을 뗄 때가지 친 어머니 품에서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젓을 떼자마자 바로 공주인 양 어머니에 의해 왕실 교육을 받았습니다. 처녀인 양 어머니가 직접 교육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당시 관습에 따라 이집트 궁정에서 교육 관리가 왕자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교육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대부분 친부모를 떠났기 때문에 정신적, 정서적으로 무엇인가 부족한 교육일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양 어머니는 역사적으로 하셉수트로 알려져 있는데 모세를 죽이려고 했던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제 6 대 왕인 투트모스 1세의 딸입니다. 공주의 아버지는 2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낳았으나, 왕자 둘 다 어려서 죽고 모세의 양 어머니 공주만 살았습니다. 그 공주의 양아들이니 얼마나 잘 교육을 시켰겠습니까? 그 공주의 이름은 하셉수트인데 결혼을 하여 그녀의 남편이 왕이 되었는데 그가 투트모스 2세입니다. 딸을 하나 낳았는데 딸이 일찍 죽었습니다. 남편도 치세 9년째에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양자였던 모세에게 대단한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공주가 지어준 이름 모세라는 이름 자체가 단순한 출생이 아니라 신적(神的)인 존재의 출생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아모세(Ahmose)는 “아(Ah)가 태어나다”, 투트모스(Tuthmosis)는 “투트(Tuth)가 태어나다”라는 말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신적인 존재라 함은 권력을 잡고 있는 한 나라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여기에서는 이집트 파라오(Pharaoh)의 자리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앞으로 바로가 될 수 있는 후보군에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유년 청소년 시절 공주의 모든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쩌면 과잉 사랑을 받으며 애굽의 왕자로서 전문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그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였고 최고의 학문과 문명을 갖추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세계 시민의식을 가진 나라입니다. 문명의 중심지입니다. 지금 말하면 하버드나 예일, 옥스퍼드에 가서 공부한 것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사도행전 7장 22절에서는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모든 학문, 모든 지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군사학, 기하학, 역사, 웅변술 등 당시 최첨단 학문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단지 혈통만 흠이었지 준수한 외모로 보나 든든한 권력자 어머니(하셉수트)의 후광으로 보나 화려한 교육으로 보나 이제 나이 40이 된 모세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청년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주목되었을 것입니다. 요즈음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오바바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가 투스모스 2세를 이어 애굽의 바로로 쓰시지 않았습니다. 애굽 바로는 투트모스 2세가 시녀와 낳은 아들이 투트모스 3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세를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로 사용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사건을 통하여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로 보내어 더 훈련시킨 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민족 지도자로 사용하십니다. 나이도 40살이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보내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다 갖춘 것 같지만 아직 부족한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1.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건강한 자아 정체성입니다(11-12). /나를 알라/ (40년 후 3:11절 내가 누구관대 갑니까?)

모세가 이렇게 최고의 교육을 받고 40세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각종 교육을 받아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갖추 모세가 나이 40살이 되어 무엇을 합니까? 살인합니다. 그 좋은 학문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살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데 그것을 쓰지 않고 죽이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형제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노예로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 감독관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없나 있나 좌우를 살펴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어 버렸습니다. 배운 것을 가지고 완전범죄를 노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왕국에서 배운 최고의 학문, 40년동안 그가 얻는 힘, 능력, 그의 신분을 한 순간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힘을 남용하고 오용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민족을 맡기겠습니까? 나라를 맡기고 회사를 맡기고 학교를 맡기겠습니까? 잘못하면 히틀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네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6명의 아내를 거느린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무함마드)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6살짜리 아내도 거느리고 9살짜리 여자 어린이와도 합방하면서 전혀 얼굴 붉히지 않고 종교 지도자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학문을 배웠고, 그 좋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치적 계산을 충분히 할 수 있는 40살 나이인데도 왜 그렇게 했을까요? 단지 분노를 참지 못해서일까요? 의분, 의협심 때문이었을까요? 성경은 그 동기를 정확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이 사실에 대하여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행 7:23-24)”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애 때문입니다. 자신과 핏줄이 같은 민족이 원통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민족이기 때문에 정의심에서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노예로 부당하게 압제 받는 것을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쳐 죽였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애굽 왕자로 자라며 교육을 받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히브리 민족의식이 자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유아기, 유년기, 청년기를 거치면서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자아 정체성으로 무척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 문제로 큰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두 분의 어머니, 두 분의 아버지, 이집트와 이스라엘이라는 이중 국적, 왕자와 노예라는 두 가지의 신분, 다신론과 유일신이라는 두 가지의 종교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애굽인이가 이스라엘 사람인가?” 피부색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인데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 모든 것이 애굽 사람입니다. 

요즈음 외국인 근로자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입니다. 한국에서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입니다. 자신의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민족의식으로 애굽인을 죽였을 때 모세는 자신의 동족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동족으로 환영해 주고 지지해 줄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4절에 보십시오.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애굽인으로 생각하지 히브리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끼리 싸울 때 모세가 그들을 책망하자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고 대듭니다. 너는 애굽 왕자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라는 이름 자체가 공주가 지어준 이름으로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너는 애굽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애굽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제까지 애굽 사람으로 애굽의 왕자로 대우해 주었는데 갑자기 돌변한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이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왕자가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가 왕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제 3자인 미디안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갔을 때 모세를 처음 본 이드로의 딸들이 모세를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애굽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모세는 광야에 나가 무엇을 더 배우게 됩니까?

40년 광야 훈련을 받은 후 하나님이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3: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누구관대 갑니까?” 자기 정체성을 다시 물어 보는 것입니다. 너는 내 백성을 이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일등 시민의식을 가진 애굽 사람도 민족주의 의식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 나라 의식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을 많이 담으려면 큰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작은 그릇은 아무리 퍼부어도 넘쳐 버리고 깨진 그릇은 아무리 부어도 흘러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섭리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해 부른 하나님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의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이스라엘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3장 12절을 보십시오. 호렙산 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 불러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합니다. 14절에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정하면 하나님이 보내었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무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3:10).

나는 누구입니까? 어떤 분야에서든 사람을 움직이고 많은 사람들의 리더가 되려면 건강한 자아관, 건강한 장아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병든 자아관을 가지면 혼자 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많은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조금 지나면 속이 드러나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를 미치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비행기 조종석을 맡겨 놓으면 머지않아 비행기는 추락하고 맙니다. 기분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회사를 맡겨놓으면 그 회사는 망하고 맙니다. 네로 같은 인간에게 나라를 맡겨 놓으면 나라는 기울어지고 맙니다.

다윗은 목동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겼던 아버지 밑에 자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살인 방조자였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연세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백낙준 박사는 무당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벧전 2:9)”라고 말씀합니다. 천하와 바꿀을 수 없는 예수님의 피값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귀중한 생명입니다.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고 얼굴이 이글어진 이지선 자매의 간증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원에 통원 치료를 받을 때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이가 저를 보고 ‘괴물’이라고 했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았답니다. 그녀는 유아교육을 전공했습니다. 앞으로 가르치려고 했던 아이들이 어느 날 ‘괴물’로 되었다는 생각이 되어 너무 서러워 울면서 기도했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괴물로 받아들이지 않았답니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보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괴물이라고 하는 자기 자신을 거울을 통해 보면서 “지선아! 사랑해!”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고 사단의 결박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놓으실 정도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2. 하나님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관입니다(12)./하나님을 알라./(40년 후 3:13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까요?)

오는 본문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아직도 부족한 모세의 두 번째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12절에서 그것을 발견합니다. 모세가 사람을 죽일 때 어떻게 합니까? 좌우를 살핍니다. 왜 살폈겠습니까?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있으면 죽이지 못할 것 같아서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순간 모세가 사람은 의식했지만 하나님은 의식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좌우는 보았지만 위는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람 눈치는 보지만 하나님 눈치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준수하다고 해도 이런 사람에게 구속사를 성취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가 되는 모세 오경을 기록하는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것이 부족하여 이 사건을 통하여 광야로 40년 동안 보내어 광야학교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알게 합니다. 

이 때 모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을까요? 어머니로부터 어릴 때 신앙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40년 궁중 생활 동안에 그렇게 철저한 믿음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애굽은 다신교입니다. 수십 개나 되는 신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천체와 하늘과 관련이 있는 신인 태양신 라(Ra), 동물과 관련이 있는 신 등 여러 가지 기원을 갖고 있는 신을 섬겼습니다. 고대 절대 군주 사회에서 왕자로서 궁중에서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모세는 40대까지 신앙의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여호와 신앙과 실제적인 자신의 보호자이며 미래의 인생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양 어머니가 믿고 있는 다신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의 수준은 양심에 근거하여 좌우를 살피는 정도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코람데오 정신이 없습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절대적 윤리 의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없자 그저 이집트 사람을 죽여 버리고 완전 범죄로 땅에 묻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큰 일을 맡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준 위대한 구속사를 이루기에는 부적합니다. 애굽의 모든 학문을 배웠다하여도 성경을 기록하기에 아직은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큰 백성을 이끌기에는 부족합니다.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해고 회사에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큰 일을 맡기겠습니다. 좌우만 살피고 사람 없으면 다 훔쳐 가는데 어떻게 큰 일을 맡기겠습니까? 밀실에서 별짓 다하는 데 어떻게 나라의 큰 일을 맡기겠습니까? 일을 맡겨 주신 분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생각으로 일을 저질러 버리는 데 어떻게 큰일을 맡기겠습니까? 이 때 상황을 성경은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행 7:23-2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돌아볼 생각이 났다는 것입니까? 모세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애국심의 발로, 민족의식의 발로 중요합니다. 민족을 구출할 동기, 민족과 함께 고난받고자 하는 동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것으로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때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가 하나님을 분명히 체험하고 알아야 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실제적으로 배워야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광야에서 40년 간 훈련받게 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줄 때 모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장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까요?” 하나님이 누구입니까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까? 3장 6절을 보십시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이후 모세가 모세 오경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까?

40년 훈련을 마치게 한 하나님은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너에게 맡겨 준 일은 너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모세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4장 10절을 보십시오. 말을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도 못가겠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아론 준비시켜 놓았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준시시켜 놓고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이 땅에 부르시고 사명을 맡겨 주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속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 누구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 초라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기르는 일, 사업하는 일, 공부하는 일, 운동하는 일, 전도하는 일, 설거지 하는 일 등 그 어떤 일일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면 참으로 가치있는 일이고 위대한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능력이 없다고 돈이 없다고 힘이 없다고 낙심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가 자기 일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할 때는 그 작은 일에도 실패해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니까 얼마나 위대한 일이 벌어집니까? 홍해가 갈라집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집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보호합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옵니다. 권위를 세워줍니다. 능력을 줍니다. 200만의 사람들이 광야에서 일사분란하게 따릅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교만해 지고 혈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인간적인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열정도 중요하고 열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열정과 열심히 되어야 합니다. 방향이 다르면 아무리 빨리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세가 배우고 익힌 그 많은 지식도 하나님의 뜻의 바구니에 담길 때 옥구슬처럼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흙밭에 버려진 돌이라도 위대한 예술가가 다듬으면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도 시인이 사용하면 위대한 시가 되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인 "황소의 머리"도 자전거의 좌석과 손잡이로 만든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을 지라도 피카소의 손에서는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 없는 돌일지라도 미켈란젤로에게 가면 걸작「모세」와 같은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설탕을 조금 가지고도 유명한 조리사에게 가면 음식 맛이 달게 되고 비누를 조금 가지고도 어머니 손에 가면 아이의 몸을 깨끗이 할 수 있고 조금의 햇볕으로도 조경사는 새싹을 자라게 할 수 있고 조금 남은 몽당연필로고 위대한 작가는 책 한 권을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면 지팡이로도 홍해를 가르고 조약돌로도 골리앗을 넘어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 불능자 왼손잡이 에훗도 쓰시면 민족을 구원하는 사사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물건 처럼 취급당하는 여인 드보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됩니다. 사기꾼 야곱, 40년 간 처가살이한 모세, 아내를 내어 놓은 아브라함, 배반자 베드로, 살인 방조자 바울도 하나님이 사용하셨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하나님이 쓰시느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해야할 사업을 놓고 자금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도망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1세기의 변화는 포기하지 않으신 12명의 제자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는 성령 충만한 베드로 한 사람의 설교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300명의 용사로 135,000대 300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여 미디안을 정복합니다. 하나님은 10명이 부정한다해도 2명의 지지자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십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3. 사람에 대한 폭넓은 인간관입니다(13-15)./이웃을 알라./(사십년 후 4:1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 모세가 더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3절부터 15절까지 나오는 말씀입니다. 인간 이해입니다. 지혜의 문제입니다. 폭넓은 인간을 이해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자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동족애를 가지고 그는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가 동족이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 주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나가 보자 자기 민족끼리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 때 의협심이 강한 모세가 왜 같은 민족끼리 서로 싸우느냐고 간섭을 하였습니다. 이 때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는 것입니다.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말합니다. 아무도 몰래 살해하고 모래에 묻어 완전 범죄를 한 줄 알았는데 탄로 난 것입니다. 

바로는 어떻습니까? 이제까지 왕실의 한 식구로 생각했습니다. 같은 세계 시민의식을 가지고 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이 벌어지자 그 작은 일로 자신을 죽이려 합니다. 결국 모세는 애굽 사람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이스라엘 사람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모세가 궁중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아직 그 많은 민족을 이끌만안 사람을 이해하는 지혜가 부족했습니다. 인간의 속성을 몰랐습니다. 많이 안다고 실제 상황에서 사람을 잘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랜 기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고 그 많은 사람을 이끌기 위해서는 40년이란 긴 기간의 광야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40년 광야 훈련을 받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줄 때 모세가 어떻게 합니까? 계속적으로 거부합니다. 40세 때 같으면 당장 나가 백성을 이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망설입니까? 사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속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속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40세 때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겁 없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광야 훈련을 통해 실제적으로 가정 생활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 이해에 대한 폭넓은 지혜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베운 것입니다. 이런 지혜는 학교에서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체험과 긴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모세 오경을 기록합니다. 애굽이 교육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필요했습니다. 모세에게 사명을 주실 때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4장 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백성의 속성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4장 10절을 보십시오 “말이 능하지 못합니다. 무능력합니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무능력을 잘 깨달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아무리 많이 배웠다고 해도 최고의 학문을 취득했다고 해도 내 힘으로 안된다는 지혜를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지혜를 통해 모세 오경을 기록하게 합니다. 통제하기 힘든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게 합니다.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민 12:3) 어떤 상황에서도 혈기 부리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사악합니까?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얼마나 간사합니까? 우리가 자녀들만 몇 명 되지 않는 자녀들 기르는데도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200만을 이끌 때 얼마나 인간 냄새가 싫겠습니까? 회사에서 사장만 되어도 얼마나 직원들 다루기가 힘이 듭니까?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모세는 안정된 직장에서 퇴출된 것입니다. 보장된 직장에서 정리해고 된 것입니다. 실직자 아니 빚에 쫓기는 사람처럼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했던 가족들로부터 배신당한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 돌보았던 교인들로부터 배신당한 것입니다. 믿었던 친구로부터 배반당한 것입니다. 사랑했던 애인으로부터 실연당한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아직은 더 많은 지혜를 배우라고 그런 일을 주셨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억울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도 충성했던 사울에게 배신당하고 반역자로 쫓겨 다녔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 이년이 아닙니다. 10년 넘게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사랑했던 교인들로부터 이중인격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돈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합니다. 침을 뱉습니다. 신뢰하여 돈을 맡겼던 유다가 인신매매합니다. 그렇게도 정성을 다해 가르쳤던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립니다. 심지어는 베드로 마저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실패 했다고 포기하거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도 실패했습니다. 야곱도 실패했습니다. 요셉도 실패했습니다. 여호수아도 실패했습니다. 베드로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핸리 포드는 서른 아홉에 두 번의 도산으로 폭삭 망했지만 다시 일어나 "실패는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준다. 그것도 좀더 영리하게 출발할 기회를."이라고 말했습니다

꿀이 되기까지는 꿀벌이 4천 2백 번이나 꽃을 왕복하여 얻은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매미는 여름 한 철 노래하기 위해 애벌레로 7년을 기다립니다. 영어사전 웹스터를 집필한 웹스터는 36년 동안 밤낮으로 수고한 결과물이며 요셉 하이든은 천치창조를 작곡하면서 무려 8백 번이나 반복했다고 합니다. 좋고 값진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주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현대 기하학의 기초를 세운 쟝 빅토르 퐁슬레라는 감옥에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여 투영기하학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유명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저자 디포가 감옥에 있을 때 쓰여졌습니다. 다산 정약용도 18년간의 유배기간에 실학(實學)을 집대성하는 명저들을 쏟아냈습니다. 수많은 신제품 중 살아 남는 것은 10개 중 1개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차 1대 개발 때마다 200여대 부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매년 3만개 이상의 소비재 관련 신제품이 쏟아지지만 이 중 80% 이상이 실패한다고 합니다. 홈런 왕 베이브 루스는 714개의 홈런을 치기까지는 1,330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다고 합니다. 링컨은 사업가로서 2번 실패했으며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주 선거 및 전국 선거에서 6번이나 낙선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실패 없이 성공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넘어지지 않고 걷기를 배울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야구방망이로 단번에 공을 날릴 수는 없습니다. 넘어지지 않고는 자전거를 타기를 배울 수 없습니다. 물 마시지 않고 수영을 배울 수 없습니다. 실패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실패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실패는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모세는 이 실패를 절망과 포기 증오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일어서는 기회로 활용하여 광야에 가 훈련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다 갖추어진 것 같은데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고 있는가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비행기는 아무리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해도 중력보다 양력이 커야 이육할 수 있습니다. 추력(추진력)이 항력(저항력)보다 커야 이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갖춘 것같지만 더 갖추어야 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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