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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만남을 위한 준비하는 삶 (암 24:12~13, 마 24: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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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만남을 위한 준비하는 삶 (암 24:12~13, 마 24:24~25)


한 전문의가 병원으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았습니다. 내출혈로 위급한 소년이 병원에 실려 왔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자동차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노란 모자에 검정 점퍼를 입은 괴한이 나타났습니다. 이 강도는 권총을 들이대며 자동차를 강탈하여 도망하였습니다. 의사는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갈아타고 1시간 늦게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의사가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 소년은 이미 5분전에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강도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소년을 얼마든지 살릴 수도 있었는데….” 중년의 아버지가 소년의 주검을 끌어안고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노란 모자에 검정 점퍼를 입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의사의 자동차를 강탈해간 노상강도였습니다.
  
만남은 생명입니다. 만남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만남은 사망입니다. 잘 만남으로 살고, 잘못 만남으로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생명을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처럼 마귀를 만난 것은 죽음을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참 좋은 만남도 많이 있고, 나쁜 만남도 많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만남은 좋은 가정을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루디아와 바울의 만남은 좋은 교회를 이루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잘못된 만남을 보세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만남이 나쁜 만남입니다.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사람이었다면 두 사람이 다 죽고 가정이 파괴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와 그 아내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아내의 말만 잘 들었어도 지금까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일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독일의 문학자 한스 카롯사는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태어나면서 만남이 시작됩니다. 어머니와 가족들 그리고 온갖 세상의 것들과 만납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사건도 만나고 일도 만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만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많은 만남 가운데 좋은 만남이 많아야 좋은 삶입니다. 나쁜 만남이 많으면 나쁜 삶입니다.
  
만남은 축복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아기들 세례 받을 때마다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 감사합니다. 좋은 믿음의 부모를 만난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교회와 같은 좋은 교회를 만난 것이 감사합니다. 그리고 살면서 좋은 스승을 많이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나고, 좋은 책들을 많이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꼭 우리 아기들의 삶이 좋은 만남으로 풍성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에서 좋은 것을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만남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모든 다른 만남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만 있으면 세상에서 형통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 만남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상대방과 사랑에 빠질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는 십오 초 내지 이 분쯤 걸린다고 합니다. 만남은 사랑을 가능하게 합니다. 만나야 사랑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데 결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모스는 주전 8세기의 선지자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짐’ 혹은 ‘짐진 자’입니다. 그는 정말 짐을 많이 진 선지자입니다. 원래 그는 예루살렘 남방 20킬로미터에 있는 드고아라는 작은 동네의 목자였고 농부였습니다. 흔히들 그를 ‘재앙의 예언자’라고 합니다. 재앙을 예언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는 가장 짐진 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축복의 예언자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다메섹,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예언합니다. 심판의 예언이 그에게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아모스의 시대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지고, 정의가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국가나 하나님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던 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우리 시대도 정의가 통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소리가 큰 사람이 이깁니다. 정의보다 폭력이 앞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공동체를 훼손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 시대에 공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의로운 마음입니까? 양심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의로워집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양심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공의가 물같이 흐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위기라고 합니다.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모두가 위기입니다. 위기를 벗어나면 새로운 기회와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기회를 피하면 위기가 찾아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 우리가 당면한 위기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행하리라’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6절에는 양식이 떨어지게 한다고 합니다. 7절에는 비를 멈추게 한다고 합니다. 8절에는 물을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9절에는 깜부기 재앙과 팥중이가 먹게 한다고 합니다. 10절에는 전염병을 보내어 청년을 죽게 한다고 합니다. 11절에는 성읍을 무너뜨린다고 합니다. 이런 열거된 재앙들을 똑같이 행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암시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재앙을 피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아모스는 최후의 통첩 같은 경고를 백성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태풍을 허리케인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허리케인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카트리나’로 인해 뉴올리언즈라는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는 ‘구스타브’라는 허리케인으로 190만 명이 피난을 했습니다. 요즘의 허리케인, 사이클론, 태풍이 왜 더 무서워집니까?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합니다. 열대 지역에서는 해수 온도가 1℃ 상승할 때마다 강력한 사이클론 발생 건수가 약 30% 증가한다고 합니다.
  
허리케인에도 꿈쩍도 못하는 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입김에도 파멸될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삽니다. 허리케인이나 쓰나미나 화산폭발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만나기 싫거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대표 시 ‘인빅투스’(Invictus)가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정복불능’이란 뜻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보세요. “좁은 문이 아니어도 좋다, 심판 날의 벌도 상관없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다. 내 영혼의 선장도 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방자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도 형벌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용감한 자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비겁한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사람 무시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신 것을 알면 사람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는 배은망덕에 대한 벌이다”라고 토마스 머턴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배은망덕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만들어놓았는데 모르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내가 당신을 모릅니다.”라고 하는 것이 가장 무식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에서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만나야 구원의 사람이 됩니다.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아십니까? 심판의 징계는 멸망이지만 사랑의 징계는 구원입니다. 사람의 징계를 받으면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라고 욥기 5장에서는 말씀합니다. 세상 채찍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채찍은 하나님을 만날 때에 피하고, 하나님의 채찍은 하나님을 피할 때에 만납니다.
  
마태복음 24:44에는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언제일지 모르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그리고 작은 자를 섬기세요. 그러면 그날 그분을 만납니다.


둘째, 만나야 할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13절입니다. “그의 이름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우리가 만날 대상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날마다 누군가를 만나면 살아갑니다. 만남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흔히 옛날 드라마에 보면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을 만나면 “대문닫고 소금 뿌려라”라고 합니다. 이런 남에게 혐오감을 주는 만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지 오십시오”라고 문을 열고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존재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오는 사람들은 지체 말고서 문 열었을 때에 들어오시오”. 하나님께서 만들게 하신 노아의 방주를 보면 모든 동물들이 방주 안으로 다 들어간 다음 방주의 문은 노아가 닫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닫으십니다. 하나님이 ‘쾅’하고 닫으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요즘 ‘묻지마’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묻지마 소개팅, 묻지마 투자, 묻지마 관광, 묻지마 살인 둥이 있습니다. ‘묻지마’ 그 자체는 잘못 된 것입니다. 대상이 없습니다.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관광을 하든, 투자를 하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대상이 분명한 사람이 삶의 방향이 분명합니다. 자세가 바릅니다. 목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삶의 방향, 삶의 자세, 삶의 목적이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란 말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 엘로헤이 차바오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많이 나타납니다.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엘 엘욘’(가장 높으신 하나님), ‘엘 올람’(영원하신 하나님), ‘엘 로이’(감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샬롬’(평화의 하나님), ‘여호와 차바오트’(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샴마’(거기 계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 등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란 크신 능력으로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창조주의 권리를 가지고 전 피조물의 세계를 다스리시고, 지으신 백성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뜻합니다.
  
존 칼뱅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체험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변화와 갱신을 경험하여 예배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예배를 가능하게 합니다. 여기에 참 행복과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벗어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명기 4:29에는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 찾기를 제일로 하세요. 반드시 만날 것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참 의미가 있습니다. T. M. 무어는 “영성훈련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훈련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훈련입니다.
 
탁월한 지도자를 만나면 중요한 것을 얻습니다. 바로 기회(chance)와 변화(change)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기회를 얻고, 변화를 받은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고, 신앙의 위인들이 그랬고,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잠언 1:24-25에는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교만한 백성의 모습을 말합니다. 잠언 1:28에는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라고 합니다. 이런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지 않는 것이 최고의 징계입니다. 가장 무서운 벌입니다.


결론

생물학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눈동자가 45%까지 확장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점점 더 눈동자가 작아진다고 합니다. 앞에서 여러분의 눈동자를 보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아요. 하나님을 만남은 축복입니다. 눈동자가 커지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면 여러분의 눈이 커집니다. 눈이 커지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눈이 커지면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하나님이 보일 때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이해합니다. 세상을 사랑합니다. 세상이 보이고 세상을 사랑할 만큼 눈이 커지세요.
  
하나님을 만나면 세상의 형벌이 두렵지 않고, 세상이 힘들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의지하고 삽니다. 

예레미야 29:13에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합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세요.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세상이 즐거움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행복할 것입니다. 형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 기쁨 속에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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