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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합 3:16 ~19, 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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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합 3:16 ~19, 고후 13:5) 


오래 전에 많은 분들에게 읽힌 김춘근 장로님의 ‘와이 미’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능한 교수이고 교회를 잘 봉사하시는 장로님이 갑자기 중한 병을 얻었습니다. 그 분은 산속 기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납니까?”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데요?”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고쳐주심을 체험하게 되고 병원에 와서 다시 검사해보니 모든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 분은 병이 나은 다음부터 더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너무 아부를 해서 별명이 ‘아부쟁이’였습니다. 한번은 제직회 시간에 담임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제직원들 앞에서 본인의 신상발언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왜 목사님에게 아부하는지 아십니까? 목사님의 눈에 더 많이 띠어 목사님께서 기도 많이 해 달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아부도 끝까지 하면 충성이 되고 충성도 하다 말면 아부가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어찌하여 내가 이런 병이 걸려야 합니까?” “어찌하여”라는 말이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만날 때마다 반복합니다. 하박국 1장에는 “어찌하여”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러나 3장에는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찌라도”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어찌하여”와 “없을찌라도”의 차이를 보세요. 신앙의 차이이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차이이며, 자세의 차이입니다. “어찌하여”라는 말은 고난을 당할 때도, 억울할 때도, 실패할 때도, 아플 때도 항상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처럼 “어찌하여”의 투정이 “없을지라도”의 신앙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어찌하여”에서 “없을지라도”로 변하게 했습니까?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1평방미터 면적마다 13만 마력의 힘을 방출한다고 합니다. 이 힘은 8기통짜리 자동차 엔진 450개와 맞먹는 힘이라고 합니다. 태양의 능력은 인간이 세계 역사상 사용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1초 동안에 만들어냅니다. 태양은 현재 속도로 300억년은 더 타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태양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힘은 태양의 힘과 비교가 안 됩니다.
  
고대 게르만어 ‘kraft’는 힘이란 뜻입니다. 본래 능숙함, 완성, 기술, 수공을 의미합니다. 힘이란 단어는 근육을 팽팽하게 하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근육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근육을 강화하는 스테로이드와 같은 약품을 쓰기도 합니다. 이것은 운동선수들에게는 금지 약품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능숙하시고, 절대적인 기술자이시고, 절대적인 수공을 포함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힘의 시대입니다. 힘에는 물리적 힘이 있습니다. 물질의 힘도 있습니다. 지식의 힘도 있습니다. 이전 시대는 물리적 힘이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지식의 힘이 힘입니다. 그래서 힘의 이동이란 말을 합니다. 힘이 있으면 안심이 되고, 평안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승리합니다. 잠언 24:5에는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라고 합니다. 지식이 곧 힘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발견하면 힘이 납니다. 하나님이 힘이라는 것을 알면 그 것이 힘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힘이라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나의 힘이라”고 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사야 40:29에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합니다. 31절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힘이심을 알고, 그분을 통하여 힘을 얻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세상을 보면 두려움이 있고, 좌절하고, 근심이 커집니다. 하나님을 보면 즐거워합니다. 힘이 납니다. 하나님이 기쁨이며 힘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잡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을 의지하면 좌절하기 쉽습니다. 실망하기 일수입니다.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돈이 있으면 잃을까봐 걱정이 됩니다. 건강해도 약해질까 걱정이 됩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사실은 있는 자가 없는 자보다 더 걱정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양식을 의존할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갈 자를 헤아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삼손이 자기 힘만 의존하였을 때에 힘을 잃었습니다. 기드온이 2만 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가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너무 많아 300명만 데리고 가게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자랑할 때에 그의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세상의 것을 의존할 수가 있습디까?
  
하박국의 단호한 신앙 선언을 들어보세요. 하박국 3:17, 18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러분은 밭의 소출, 나무의 열매, 양과 소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은 영원하고 가치 있는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바라보고 기뻐하시렵니까? 여러분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만족하시렵니까? 절대 안 됩니다. 세상의 것들은 우리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뭘 줍니까? 유가 상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고물가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이나 러시아가 모두 우리 편이 아닙니다. 지구 표면의 온도가 상승하여 온갖 재해가 속출합니다. 어느 하나 우리에게 유리한 것이 없습니다.
  
후회는 기쁨과 평안을 앗아가는 첫 번째 도둑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은 두 번째 도둑이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리고 신앙만이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8:31에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조셉 마몽은 “기쁨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메아리다”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있는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찬송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것의 비유가 하나같이 파티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잔치를 벌립니다. 세 비유가 똑같이 “즐거워한다”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즐거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세상의 잔치, 세상의 즐거움과 비교가 안 되는 것이 하늘나라의 잔치, 기쁨입니다.
  
기쁨은 크리스천의 삶의 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테스터튼은 “기쁨은 기독교의 거대한 비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쁨을 누가 알 수 있습니까? “기쁨의 근원은 예수”입니다. “이 기쁨 비길 데 없네”라고 찬송합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경차를 샀습니다. 경차라고 하니까 경유를 넣어서 차를 고장 나게 하였답니다. 고유가 시대의 넌센스입니다. 휘발유 차에 경유를 넣으면 자동차가 고장 나고 멈추고 사고가 납니다. 힘이 나기 위해서 무엇을 넣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적인 지혜입니다. 경유와 휘발유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아무 것이나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채워야 바르게 갑니다. 힘 있게 갑니다.
  
여러분, 세상의 열매, 나무의 소출, 내 손에 가진 것, 현재 잡을 수 있는 것, 현재 나의 지위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모든 의심이 물러가고 사슴같이 높은 곳에 다니기 때문입니다.

19절에는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힘이시면 발이 가볍습니다. 높은 곳으로 사슴같이 다니게 됩니다. 높은 산도 높지 않게 느껴집니다.
  가벼운 발걸음은 편안한 걸음을 의미합니다. 기쁜 걸음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발걸음 혹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마음에 의심이 가득하고 아직도 불평이 차 있으면 발걸음이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천근만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고, 뜻을 안 다음에는 기쁨과 용기와 힘이 넘치게 됩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가릴 때에 요즘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자이크를 벗겨내고, 안경을 닦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안개가 자욱하면 길이 보이지 않지만 길이 있습니다. 산이 보이지 않지만, 집이 보이지 않지만 산도 집도 분명히 있습니다. 안개가 걷히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확실하게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심이 그치면 힘이 솟구칩니다. “의심의 안개 걷히고 근심의 구름 없는 곳 기쁘고 참된 평화가 거기만 있사옵니다”라고 찬송합니다.
  
하박국은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라고 표현합니다. 사슴이란 신성한 동물을 뜻합니다. 보은의 상징입니다. 진리의 안내자라고 합니다. 장수의 상징 혹은 길조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오래 사는 십장생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슴은 깨끗하고 정한 동물을 의미합니다. 사랑스럽고 예쁜 동물을 상징합니다. 힘이 있고 빠른 동물을 뜻합니다.
  
사슴이 높은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지니고 위를 향해 달려가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언제나 높은 곳을 보면 힘이 납니다. 아래로 세상을 보지 말고 위로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내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면 기장과 승무원들에게 내 몸을 맡깁니다. 맡기지 않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습니다. 맡기면 높이 올라가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맡기지 못하면 높이 올라가면 두렵습니다. 고도를 높이면 구름도 아래에 있고, 빗방울도 비행기 아래에서 떨어집니다. 높이 올라가면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이것이 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한 조종사가 비행 중에 쥐 한 마리가 무엇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쥐를 잡으려다 부속품이나 전기선을 잘못 건드릴까봐 고민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기장은 고민을 하다가 고도를 높여 쥐의 호흡곤란을 유도하기로 했습니다. 비행기의 고도를 높였을 때에 쥐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착륙해서 쥐가 있던 곳을 열자 쥐는 죽어 있었습니다. 영적 고도 높이면 삶을 갉아먹는 것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힘이십니다. 고도를 높이면 힘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힘을 얻습니다.
  
작년 여름에 캄보디아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22명 전원이 사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한국인이 13명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비가 오고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습니다. 관제탑에서는 “고도를 더 높여라”고 했지만 조종사는 “이 지역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지식, 자신의 느낌에 의존하면 실패합니다. 더 고도를 높여 하나님을 의지해야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높고 높은 곳에 계십니다.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높은 곳에서 힘을 얻게 하십니다. 최근에 유해석 선교사님이 쓰신 ‘높여주심’이란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셔야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셔야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5에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이 믿음이 의심을 물리치고 높은 곳을 향하게 합니다.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에 우리의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주어집니다. 더 높이 올라가면 하나님을 만나고 여기에 우리의 힘이 있습니다.


결론

외손자 이삭이 4살입니다. 엄마에게 과자 달라고 보챕니다. 엄마가 밥 먹어야 과자 준다고 하니까 “엄마, 나 밥 앨러지 있어” 그럽니다. 밥 앨러지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어야 하는데 말씀 앨러지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씀만 대하면 거부반응을 나타냅니다. 스데반이 설교할 때에 그 말씀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돌로 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이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앨러지 때문에 귀를 막고, 이를 갈고 돌로 쳤습니다. 지금도 이런 앨러지 환자들에 너무 많습니다. 감동을 받지 않으려고 앴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세상의 것입니까? 무화과나무 열매, 포도나무의 포도, 감람나무 열매, 우리의 소, 외양간의 양을 의지한다면 불쌍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도를 높이고, 영생의 말씀을 먹고, 하늘 양식을 사모하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하박국이 살던 시대와 비슷한 세상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외교, 안보, 어느 하나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박국처럼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라고 탄식할 수 있습니다. 이 탄식은 아래를 쳐다보는 소리입니다.
  
사슴처럼 높이 올라가 영혼의 고도를 높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찌하여”에서 “아니할지라도”로 발전해야 합니다. 여기에 힘이 있고, 여기에 소망이 있고, 여기에 비전과 용기가 있습니다.

  힘이신 하나님의 의지하여 종말의 승리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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