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고 보는 자와 보고 믿는 자 (요 20:24~31)

  • 잡초 잡초
  • 451
  • 0

첨부 1


믿고 보는 자와 보고 믿는 자 (요 20:24~31)


제가 어려서부터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믿는다. 믿습니다.” 하는데 믿음을 가졌다는 교인들의 생활이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믿음인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치시려고 실례가 되는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였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정말 겁도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단적으로 말할 때 썼던 표현 중의 하나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떠나라는 말씀에 떠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믿었기 때문에 그는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도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었고.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소년이면서도 9척 장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 장군 앞에서 아무도 그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지 않을 때 비록 소년이었지만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내가 너에게 나간다!” 그리고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골리앗은 전혀 무섭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비로서 믿음이란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뜻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심판도 두렵지 않습니다. 심판이 있어 지옥이 있고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섭지 않습니다. 구원받았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것이 믿어지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람도 두렵지 않고 시험도 두렵지 않고 환란도 두렵지 않습니다. 무서운 것이 내 안에서 떠나버립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너무너무 놀라운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 한번도 그동안 우리가 살아보지 않았던 믿음으로 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은 믿음으로 살아보았습니까?
여러분 성경 가지고 오셨지요? 성경을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성경대로 살면 잘 살 수 있고,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하고 불행하게 된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만이 복의 근원이시고 우리가 잘 살고 못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은 지금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음은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정말 놀라운 삶입니다. 

물론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는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의심많은 도마”란 오명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다른 어떤 제자들 보다 열심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인도에서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지금 인도에는 그의 선교를 기념하는 성 도마산과 도마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다,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이들도 도마처럼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른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도마의 마음이 매우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도 않고, 도마는 아주 강하게 부정하면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어!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내가 손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결코 믿을 수 없노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싶습니다. 도마의 마음이 매우 강팍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 성령 받았다 하면, ‘저 사람들이 이상해진 것 아니야?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나 저렇게 믿지.’ 하며 더 거부감을 갖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실제로 우리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고할 때 오히려 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이 이 자리에도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만나주셨다고 제자들이 이야기할 때 도마는 자기 손으로 만져보고 옆구리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년 때 5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참석하는 한 여름수련회에 참여했었는데, 수련회 마지막 날 목사님이 예수님을 새롭게 믿게 된 사람과 그 동안 믿었다가 다시 헌신할 사람들을 찬송을 부르면서 다 앞으로 나오게 초청을 하더랍니다. 그 때 500명이 모두 단상에 나가는데 혼자서만 회중석에 앉아 있었답니다. 그 순간 이렇게 버텼답니다. ‘내가 나가나 봐라. 나는 안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나타나셔야 믿지. 나는 저렇게 감정적으로 휩쓸려서는 안 나간다. 내 지성이 판단해서 확실하지 않으면 나는 예수를 안 믿는다.’ 그날 밤에 왠지 하나님께 화를 내고 씨름하다가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부터 고백하면서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팔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을 때,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을 하신 것을 보면 도마의 말로 인하여 마음이 섭섭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도마는 예수님의 몸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러나 도마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기뻐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제 보지 않고 믿는 시대가 올 것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시대가 올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대입니다. 우리야말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이 땅에 계신 것은 40일에 불과합니다. 그 40일 동안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그들을 당연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더 잘 믿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 28:16~17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부할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는데,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습니까? 믿음의 역사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확인이 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내 안에 일으키는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고 난 다음에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말 그런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증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한번은 부흥회를 마치고 그 교회 성도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번 부흥회 때 설교 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오래 전 큰 은혜 체험을 하였으나 하나님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였고 죄도 너무 많이 지어서 회개 조차 나오지 않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부흥회도 사실 어떤 기대를 갖고 참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습관과 같은 태도로 참석하였었는데, 목사님 설교 중에 성령의 근심에 대한 말씀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저는 그 날 비로서 그동안 제 마음을 무겁게 하던 것이 내 안에서 계셨던 성령님께서 근심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너무 오래 방황하였습니다. 목사님, 제게 성령님이 여전히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분은 두 눈을 뜨고도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영적인 눈이 뜨였습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며 말씀하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고 믿는 사람보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더 잘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만나지 못했으나 예수님을 영으로 만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방인 복음화와 재림에 대한 영적인 진리를 사도들 보다 더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고후 5:16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베드로도 그렇게 인정하였습니다. 
벧후 3:15~16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수제자  베드로도 알기 어려운 것을 사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듣고 본 바를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쓰임 받은 것은 초반부에 잠깐이고 그 뒤는 다 사도 바울에 의하여 일어난 이방인 복음화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믿는 것과 성령님으로 믿는 것 중 어떤 것이 분명하고 더 정확할까? 성령님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자 기도 모임에서 한 부목사님이 간증하였습니다. 지난 여름 행사로 몹시 피곤할 때, 수요예배 설교 준비로 고민하는데, 사모님이 영적 거장에 대한 책 100여 권을 사다 읽다가 “회개에 대한 주제로 설교해 보세요.” 하더랍니다. 설교 준비가 어려웠는데, 잘 됐다고 생각하고 마틴 로이드 죤스목사님의 책을 읽고 시편 51편 다윗의 회개를 주제로 두번 설교를 하였답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괴로웠답니다. 자기 안에 회개할 문제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 후 너무나 애통함이 밀려 왔습니다. 1주간 내내 십자가 보혈 예수님 이란 말만 나오면 눈물이 나서 일을 못할 정도였답니다.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절제를 위하여 기도 부탁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을 가지려면 성령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실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이 교회 외에 어느 곳이 있습니까?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믿음으로 세워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를 놓지면 안됩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의심 많은 도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믿음이 무너졌습니까?

제자 도마가 의심에 무너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24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도마가 그 날 왜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을까요? 늘 같이 있다가 그 날만 잠깐 볼 일을 보러 갔던 것일까요? 그런 뉴앙스가 아닙니다. 도마의 마음이 공동체에서 떠났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신 것을 보고 큰 낙담과 좌절에 빠져 이제라도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서야지 다락방에 모여 있기만 하면 무엇하나?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완강하게 강팍한 말로 부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까 도마로서는 너무 당황스러웠고, 예수님이 부활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생각까지도 하였던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거짓 소문이라도 솔깃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정말이야?”

그런 도마가 다시 믿음을 회복하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일어났습니다.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도마를 만나주셨습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여러분, 도마가 그렇게 믿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혼자 있을 때에라도 찾아주실만하지 않습니까? “도마야, 너 어떻게 그렇게 믿니? 한번 내 손을 만져보아라,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봐라.” 하시면서 도마가 혼자 있을 때에라도 예수님께서 은밀히 찾아가실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 만나주셨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도마는 완강히 부인하였지만 마음 한편에 “에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정말일까?” 하는 숨은 갈망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도마는 제자들과 늘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교회 공동체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늘 드리는 예배, 매일 똑같은 새벽기도회가 늘 그렇다! 별로 은혜가 안된다!고 그런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예배드리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예배를 늘 드리는 사람과 들쑥 날쑥 드리는 사람은 믿음에 차이가 큽니다. 늘 교회 공동체 안에 거하는 자여야 은혜의 순간이 찾아올 때, 그 순간을 놓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잊지 아니하고 그 시간에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은혜의 역사가 임할 때, 예수님께서 내게 성령으로 임하실 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이지만,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까? 비오는 수요일 밤에 주님 재림해 오실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지간한 사람이면 비오는 날 수요기도회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그 시간에 오실 것이다. 도마는 정말 동의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시간이 어떤 때는 ‘바쁘고 할 일 많은 세상에 내가 언제까지 여기에 이러고만 있어야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도마는 결정적인 은혜의 순간을 놓져버린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맡기는 사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얕게 경험합니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올까요? 그저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고 은혜만 받고 “나는 일이 바빠서 그 이상은 못합니다.” 그렇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속회에서 선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기면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그것은 못합니다.‘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때에 은혜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해서 은혜를 주시는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명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주님을 경험하는 것에 너무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명 정도에 비례합니다. 

목회자 모임에서 한 전도사님이 간증하였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수석 입학했지만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서 10년이 넘도록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였던 분입니다. 그에게 성령의 역사에 대한 상처가 있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 ‘전도사가 방언도 못하느냐?’는 책망을 받고 기숙사로 가서 상급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방언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간단해. 희랍어 알파벳을 말해. 그것이 희랍어 방언이야. 히브리어 방언도 있고 제일 쉬운 방언이 일본어 방언이야. ‘다마네기쓰메끼리’ 계속 해 봐!“ 그 말을 듣고 너무 실망하고 성령의 역사에 더욱 마음이 닫혔답니다. 그런데 전도사로 일하는 교회에 성령 충만한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으로 오셨는데, 성령의 살아계심에 대한 갈망이 생기더랍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다면 저도 방언하게 해 주세요!“ 기도하며 날짜까지 정하였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성령을 받는지 몰라 안타까와 하던 중, 어린이 수련회 때 강사님이 방언받기 원하는 어린이는 나오라고 하는 순간, ‘지금 방언 받지 못하면 안된다.’는 갈급함에 아이들 사이에 나가섰답니다. 그리고 10분 정도 후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답니다. 
  “내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의심 중에도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에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속회에서든 선교회에서든, 전도행사, 집회, 기도회, 섬김의 기회가 주어지면 힘들다 부담된다 하며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 공동체 예배공동체를 떠나면 죄의 법, 세상의 법에 사로잡힙니다. 혼자서는 믿음을 유지하고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성도의 존재는 너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은 분이 있으십니까? 마음 속에 의심이 가득차 있고 두려움이 있어, 나는 정말 믿음은 모르겠고 마음 속에 도마와 같이 믿어지지 않는 것 밖에 없다.‘고 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으로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그 자리를 놓지지 않으면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예배 시간, 전심으로 예배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예배를 드려도 예배 시간 전에 미리 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전심으로 예배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주의 역사를 기다리며 매번 은혜 받는 자리에 나가면 성령님께서 도마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위대한 사도가 됐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찬을 통해서, 성찬은 정말 놀랍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나와 한 몸이 되셨음을 보여주시는 시간입니다. 성령님으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가 취하는 것도 아니고, 성찬은 떡과 포도주를 우리에게 먹여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고 내 피라! 예수님과 우리가 어떻게 한 몸이 되었는지를 입으로 먹고 마시게 하시면서 확인시켜 주시는 시간이 성찬식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정말 마음이 열려 “주님, 제가 주님을 바라봅니다.”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성찬을 받으시면 여러분 마음 속에 믿음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정말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다같이 기도하시고 성찬을 받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