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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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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마 8:1~4)


주님의 첫 번째 이적은 문둥병자, 곧 나병, 요즘은 한센 병이라고 하는데 그 나병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나병은 천형, 곧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즘은 많이 사라졌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AIDS와 같이 불치병이었으며 전염성이 있어 이 병에 걸리면 거의 죽은 목숨과 같았습니다. 나병은 신경이 무뎌지고 살이 썩고 손가락과 발가락 등 신체부위들이 떨어져나가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나병 환자들이 있었고, 전남의 소록도는 이런 분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유명하였습니다. 나병 시인 중에 한하운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가 쓴 ‘소록도 가는 길’은 나병이 얼마나 끔찍한 병인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 문둥이들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 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나병이 더 무서운 것은 일가친척, 친구, 직장 등 사회적으로 고립이 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나병에 걸린 자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쳐야 합니다. 그들은 성에 들어올 수 없고 따로 격리된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피부에 난 상처들은 마치 인간의 죄악처럼 여겨져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고대의 어떤 랍비는 문둥병자가 지나간 거리에서는 계란도 사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죄가 오염될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유대 기록을 보면 바람이 나병 환자 쪽에서 불어올 때는 약 50m 정도 떨어져 있어야 죄에 감염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옛날에도 나병 환자가 보이면 돌멩이를 던져 내쫓았습니다.

그런 하늘의 벌을 받은 자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사람을 피하여 살던 자가 사람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힘이며, 복음의 힘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꽁꽁 닫혓던 문들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온 이 문둥병자는 보통 문둥병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분명한 신앙고백의 소유자입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단지 랍비, 곧 선생님이라 불렀을 뿐입니다. 문둥병자는 그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우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여 저를 고쳐주옵소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문둥병자는 “주여 원하시면” 하고 먼저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묻습니다. 고침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지만 그것이 자기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일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요청은 마치 겟세마네에서 주님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하는 기도와 같습니다. 문둥병자는 주님의 뜻이 더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문둥병자의 신앙은 오랜 고난 끝에 얻어진 인격 성숙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렸을 때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자신의 운명을 탓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무의미와 사람들로부터의 고립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분노의 시기가 지난 후 그 마음에는 이제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체념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욕망의 부질없음과 인생의 짧음과 덧없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참 실상을 보는 진리의 눈이 열렸을 것입니다. 자기는 비록 육신의 문둥병에 걸렸지만 소위 건강하다는 사람들은 영혼의 문둥병이 걸려 제 영혼 썩는 줄 모르고 아등바등 사는 인간들이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온 문둥병자는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뜻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의 중심을 아시고는 흔쾌히 “내가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원함,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축복과 평안을 주시려고 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29:11) 그러니 자기 필요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 소록도에 가면 나병환자들의 믿음이 더 좋은 것을 알게 됩니다. 상담학으로 유명한 정태기 목사님의 간증을 제가 들은 바가 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삶의 전환이 일어났던 것처럼 정 목사님도 자기 신앙의 전환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이 바로 소록도였다고 합니다. 이 분이 젊은 시절 신앙의 회의가 들었다고 합니다.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되지 않고 아무리 기도해도 신앙의 회의가 들더랍니다. 그러다 훌쩍 떠나 아무 생각 없이 갔던 곳이 소록도였다고 합니다. 소록도에 있는 교회에 가서 수요 낮 예배를 드리는 중 통성 기도 시간에 누가 뒤에서 울며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그렇게 간절하고 가슴을 울리더랍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큰지요? 어찌하면 이런 주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길이 있겠는지요?”

무슨 은혜를 받았기에 이렇게 기도하나 하고 그 기도의 주인공이 너무나 궁금해서 이 분이 뒤를 돌아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흉측한 몰골을 한 문둥이 노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골처럼 머리카락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얼굴은 이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도록 일그러져 어디가 눈인지도 모를 곳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손가락이 다 떨어져 나간 손으로 연신 그 눈물을 훔쳐가며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에 정 목사님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사람은 저 모습으로도 저렇게 감사하는데 자신의 신앙이 부끄러워졌답니다. 순간 피를 토할 것 같은 통곡이 솟아나서 이 분도 울부짖으며 기도했답니다. 이렇게 기도하다 눈을 뜨니 그 문둥병 노인이 걱정스럽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앉은뱅이 걸음으로 교회를 빠져나가려는 그 노인을 붙잡고 정 목사님은 물었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신가요? 무슨 은혜를 그리 많이 받으셨는가요?” 

그러자 그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피붙이도, 세상도, 다 나를 버렸지. 친구들도 떠나고 말이야 그런데 이런 나를 버리지 않고 이 소록도까지 따라와 준 분이 계셔. 그 분이 내게 기쁨과 소망을 주셨지.” 

“할머니가 오셨군요?” 하고 정 목사님이 말을 받았습니다.
“아니야, 예수님이 따라오셨지.” 

이 순간 정 목사님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답니다. 문둥병에 걸려 엉망이 된 이 분은 예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쁨과 소망을 주신 분으로 고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몇 배나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평이 가득한 우리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여러분 소록도 옆에 ‘찌라도’ 라는 섬이 있는데 혹시 가보셨습니까? 소록도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모두 그곳에서 ‘찌라도’ 라는 섬에 대한 안내를 듣게 됩니다. “이곳은 천국과 같은 곳인데 이곳에 가보고 싶습니까?” 하면 방문한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 하며 “예”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인도자가 그곳을 가려면 성경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며 하박국 3장 17절을 펴서 읽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여기가 바로 “찌라도” 입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돈이 없을찌라도, 건강이 없을찌라도, 늙었을찌라도, 못 생겼을찌라도, 형편없을찌라도 감사하는 것 이것이 소록도의 또 다른 이름 ‘찌라도’이고 이것이 곧 ‘찌라도 신앙’입니다. 이들은 육신의 문둥병을 앓으며 영혼이 깨끗해진 사람들이고, 우리는 비록 몸은 건강할지 모르지만 불평과 불만, 욕심과 질투에 우리 정신이 어떻게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영혼의 문둥병자들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나를 고쳐주소서” 하지 않고 “나를 깨끗하게 해주소서”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물론 문둥병은 피부병이기에 온갖 더러운 진물들이 흐르며 피부가 엉망입니다. 그러니 깨끗함을 입게 해달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깨끗함을 입게 해달라는 간구에는 죄의 더러움을 씻어 달라는 간구가 더 강하다 할 것입니다. 문둥병 자체가 죄를 뒤집고 사는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내서 그런지 유대인들은 이것을 심각한 영적인 질병으로 보았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깨끗케 해달라는 간구를 통해 육신의 질병을 치유함으로써 죄악에서 깨끗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라는 간구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지금 우리 영혼이 얼마나 더럽고 부패해 있습니까? 악한 생각과 살인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과 분노와 질투와 욕심으로 얼마나 더러워져 있습니까? 우리야말로 “주님 우리가 깨끗케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간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주님은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호소하는 문둥병자를 사랑으로 치유하십니다.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능히 고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이방 백부장은 8장 8절에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직접 손으로 고름이 흐르고 다 문드러진 피부를 만지셨습니다. 주님은 아마도 “그 동안 힘들었지” 하면서 그 마음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손길이라면 육신의 질병이 치유되기 전에 먼저 마음의 질병들이 씻겨 내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문둥병과 같은 질병이 주는 영혼의 질병은 자신은 아무 쓸모없고 자신은 누구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절망감입니다. 주님께서 그 사랑의 손으로 만지는 순간 이 문둥병자는 그 마음속에 있던 모든 미움과 분노, 절망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의 손길입니다. 교회사에서도 예수님의 이 모범을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성 프란치스꼬입니다. 『성 프란치스꼬의 잔 꽃송이들』이라는 책을 보면 성 프란치스꼬와 그의 수도단들은 문둥병자를 자주 돌보았습니다. 그때 어느 성미 고약한 문둥병자가 잘 간호를 하지 못한다고 불평을 터뜨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프란치스꼬는 그를 향하여 “형제여 참으시오. 육체의 병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내려주시는 것이니 착히 참아 받으면 큰 공로가 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육신의 문둥병보다 영혼의 문둥병을 더 크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프란치스꼬를 비웃듯이 “그러면 한 번 내 몸 좀 씻겨봐.” 하고 빈정댑니다. 이에 성 프란치스꼬는 마다하지 않고 따뜻한 물을 받아서 두 손으로 정성껏 그 더럽고 냄새나는 몸을 씻기 시작합니다. 그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프란치스꼬의 손이 닿는 곳마다 상처가 낫고 피부가 깨끗해집니다. 

성 프란치스꼬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인도의 성녀 마더 테레사도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의 상처를 씻는데 앞장섰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세웠던 샨티 나가르 나환자 구제 센터를 통하여 수만 명의 나환자들이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테레사와 그의 수녀들은 그들의 몸을 씻기며 봉사하였다. 이런 수녀들의 모습을 보고 한 부유한 사업가는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나환자는 못 만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더 테레사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 문둥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위대한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이며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하시길 원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주님처럼 능력 있게 나병과 같은 불치병을 치료하는 능력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는 못할지라도 주님의 길을 좇아 스스로의 영혼의 문둥병을 치료하며, 성결과 사랑으로 문둥병과 같은 절망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돕는 공동체가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은 문둥병이 나은 그 사람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주님은 구지 사람의 입을 통하여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주님임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인기가 아니라 다만 그를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주었을 뿐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꾸 사람들이 몰려들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기가 높아지면 사람을 살리는 본질을 잊고 인기에 취하기 쉽습니다. 주님은 이를 철저히 경계하셨습니다. 능력 받은 사람들이 타락의 길을 걷는 이유는 사람의 인기와 물질의 욕심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에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조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문둥병이 나은 사람에게 제사장에게서 가서 다 나은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주님은 자신이 속해 있는 제도나 질서가 아무리 불완전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산상수훈이라는 새율법을 만드신 자로서 기존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겸손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높은 자리에 오르고 조금만 힘이 있거나 자기 생각에 어긋난다 싶으면 기존의 것이나 질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분열을 낳고 조직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순종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은 이 문둥병자가 다시 정상적인 가족 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사장의 인정이 필수적입니다. 제사장이 다 치료되었다는 확인을 해주어야 사람들이 그를 정상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심한 보살핌이요 사랑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혼의 문둥병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렇게 간구할 때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며 친히 손을 내밀어 우리 육신과 영혼을 만지실 것입니다. 그 분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더러운 죄악과 욕심이 씻기고, 절망과 분노가 씻기고, 그 위에 은혜의 새 살이 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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