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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리아의 선택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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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선택 (눅 10:38~42)


제가 이 질문을 하면 아마 여러분의 대답은 뻔 할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와 조조 두 사람 중 여러분들은 누구를 더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이 똑같은 질문을 일본사람들에게 하면 전혀 반대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조조와 유비 두 사람 중에 조조를 훨씬 더 좋아합니다. 아마 거의 모든 일본 사람들이 조조를 좋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조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위한 연구에 대한 책들이 제법 나오고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일본 사람들이 쓴 책들입니다. 일본은 훨씬 전부터 이것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던 마르다가 자기 집에 예수님 일행을 초대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 있었는데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동생은 언니와 달리 예수님 앞에 앉아서 그냥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바빠서 절절 매고 있는 그 때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니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 이 철없는 아이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바쁜데 이 아이에게 말씀하셔서 저를 좀 도와주게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의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생각과는 다른 대답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일에 대해서 이미 오랫동안 말씀을 듣고 배워온 터라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객관적으로 그리고 냉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좀 더 기독교 적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객관적으로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그 곳은 늘 더운 지방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방에서 우리 주님께서 길을 걸으셨으므로 여간 힘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미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이야기하였고, 걸으실 때는 좀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즘은 제자들에게 강의할 때 강의실에 앉아서 가르치지만 그 당시는 함께 길을 가면서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제자들과 묻고 대답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습니다. 이런 길을 걸어오셨기 때문에 쉬는 것, 잡수시는 것이 얼마나 필요했겠습니까? 

언니 마르다는 주님의 그런 상황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빨리 주님을 대접하려고 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음식이 될 때까지 잠시라도 쉬시게 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동생 마르다는 주님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니의 마음도 알지 못했습니다. 손이 열이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서 절절 매고 있었지만 언니를 도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게다가 시장하고 지쳐 피곤하여 좀 쉬어야 하는 주님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을 듣고 또 주님께 말을 시켰습니다. 동생 마르다의 행동을 좀 냉정하게 보면 절대로 잘한 것 같지 않습니다. 

가끔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래도 말씀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공부해야할 때가 있고 말씀 들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쉴 때는 쉬어주어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잘 가르친다고 늦게 들어온 아버지가 자는 아이들을 깨워 예배드리자고 하면 그 아이들은 커서 교회에 나가려고 하지 않고 성경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일하는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이 더 귀하다고 무조건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면 어쩌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일을 기독교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마음이라는 측면 그리고 동기라는 측면에서 봅니다. 이 측면에서 보면 더욱더 언니 마리아가 동생 마르다보다 월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주님의 상황을 이해하고 주님을 배려하기 신경을 썼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정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언인지 나름대로 상당히 신경 썼습니다. 

이에 비해서 동생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만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힘드신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갔는데 둘이 만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주님께서 왜 이 동네에 들르셨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기독교가 이야기하고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리아보다는 마르다가 틀림없이 더 잘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최소한 마리아가 그 언니 마르다보다 더 잘하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마리아가 마르다보다 더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보아야합니다. 그냥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오늘날 교회가 이것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거꾸로 가게 될지 모릅니다. 너무 우리 위주로, 그냥 교회위주로 나가고, 교회주의로 나갈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한 일이 어떻게 좋은 일일 수 있는가? 우리는 아무리 보아도 아닌데 주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여러분, 우리는 어떤 측면, 어떤 방향으로 보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옳다고 말씀하시는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절대로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신정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은 옳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마리아의 판단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조조와 유비의 평가에 대해서도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많이 생각해보아야할 것입니다. 기독교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렇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나의 관점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혀 아닌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 남편, 내 아내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경우가 너무도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저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어짐에도 그 어머니들은 절대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여기면서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을 생각하는 경우, 그러다 나중에 잘못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인간 세상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하나님,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하늘이 땅에서 먼 것같이 너무나 차이나는 인간과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많이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대해서 겸손해야합니다. 

나는 100%옳다고 생각되는 그것이 저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다른 상황일 수 있고,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환경일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가질 생각이고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이것이 배려이고 긍휼입니다. 그 사람 마음속을 생각해야해야 합니다. 적어도 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그 사람 마음으로 그 사람 여건을 한 번 생각하려고 하는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대단히 필요합니다. 

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을,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을, 야당은 여당을, 여당은 야당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한데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좀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늘의 하나님은 다를 수 있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겸손하게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평을 아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마르다에 대해서는 다소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라고 두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읽어보면 우리 주님께서 딱하다는 생각을 하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라도 잘하라는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하나만이라도 잘하라고 다소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철없는 마리아에 대해서는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주님은 기독교인들,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첫 번째는 우리들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잘한 것, 잘못 한 것이 예수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 눈으로 볼 때 전혀 아닌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한 대표적인 이야기로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자주 상고해야합니다. 포도원이 있었는데 사람 손이 필요해서 주인이 인부를 구하기 노동시장에 나갔습니다. 이른 아침에 나갔다고 하니 아침 7시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9시가 되어 혹시라도 사람들이 있나하여 나갔더니 사람들이 있어서 또 데리고 왔습니다. 12시에 또 나갔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주인이 참으로 괜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하루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식속들이 다 굶었습니다. 12시에 나가서 또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6시가 되면 일이 마무리 되는데 5시에 나가서 사람들을 또 데리고 왔습니다. 6시가 되어 일을 끝내고 일품을 계산하게 되는데 5시에 온 사람부터 계산하였습니다. 주인은 그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오만 원을 주었습니다. 아침 일찍 온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는 얼마를 받을 것이라고 계산하였을 터인데 그에게도 역시 한 데나리온 즉 오만 원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온 사람은 불평하였습니다. 

그가 불평할 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아침부터 일한 사람을 어떻게 같이 대접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 뜻이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까닭을 모릅니다. 지금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저녁에 온 사람은 너무나 감사하여 내용에 있어서는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시지 않은 말씀으로 상상하여 함부로 말을 만들 필요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고 더 열심히 일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그 범위 안에서만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주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또는 경험이 적어서, 덜 배워서가 아니라,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라 본래 인생은 모른다는 말씀을 우리 주님께서 하십니다. 내 뜻이므로 겸손하라고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뜻만 모르겠습니까? 한평생 함께 살고 있는 내 아내의 마음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말씀하십니다. 겸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통상 더 열심히 일하고 더 힘써 일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닌 경우가 너무도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저녁 신문에서 참으로 씁쓸한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인천에 있는 전자 기타 매출에 있어서 세계 1위의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미리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제가 이 말씀을 드린다고 하여 노동자, 근로자를 덜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도 대학 다닐 때 여건만 된다면 독일에 가서 노동법을 공부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환경이 되지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근로자를 상당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세계 1위를 달리던 그 기업이 문을 닫는 까닭이 노조가 너무 장기적으로 파업하여 적자가 누적되어 더 이상 회사를 경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사를 읽어보니 노조가 너무 심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 회사로서는 최대의 바이어가 미국에서 오는데 이날 하루만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 달라고 노조에게 부탁하였는데 노조는 단칼에 묵살하였습니다. 일부 노조원들은 이 부탁을 하려고 온 사장에게 욕을 하고 승용차에 침까지 뱉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 회사는 수출 납기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였고, 주요 바이어들이 거래처를 다른 회사로 바꾸는 바람에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2002년 이후 2007년 지난해까지 조그마한 이 회사의 누적적자는 52억이나 되어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가 그 회사에 다니기 싫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다녀서 단 한 사람이라도 일자리를 줄 수 있도록 했다면 차라리 괜찮습니다. 아예 한국 땅에서 그 일자리를 없애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목사가 제대로 기도하지 못해도 실업자들 특별히 제대로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팠는데 이 모습을 보니 정말로 속상했습니다. 

신문에 회사 사진을 보였는데 마치 전쟁터 같았습니다. 회사 앞이 제대로 성한 구석이 없었습니다. 전부다 갖가지 색깔의 스프레이로 뿌려졌고, 현수막을 붙였는데 아예 도배를 했습니다. 제가 신문 사진을 보고 적어 두었는데 ‘임투 승리, 총단결, 총투쟁, 즉각 이행, 공공 투쟁위원회’등의 문구였습니다. 공장 문을 닫으면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이 회사에 다니는 종업원의 아내가 내 남편, 우리 아빠가 저 회사에 다닌다는 것이 정말로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회사가 아니라 . 전쟁터였습니다. 전부다 구호를 붙여서 한 군데라도 멀쩡한 데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뭡니까? 제가 그것을 보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라는 영화제목이 생각났습니다. 노조원은 나름대로 월급을 더 받고 더 잘 살려고 그렇게 했겠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힘을 쓰고 애를 쓰고 노력을 많이 한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그리고 우리 교회가 특별히 한국 교회가 많이 생각해야합니다. 

우리 주님 보시기에 마리아가 좋은 선택을 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깊은 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열심히 하고 땀을 뻘뻘 흘렸지만 주님 마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아내가 정말로 행복하려면 돈을 많이 벌어주고 좋은 승용차를 사준다고 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아내의 마음을 알아야합니다. 남편이 정말로 행복하려면 금식을 잘하고 무엇을 잘하는 아내이어야 할 것 같습니까? 남편 마음을 조금만이라도 이해해준다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릅니다. 아내는 더 합니다. 여자라는 존재가 그렇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마음에 감동되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릅니다. 

바로 마리아와 마르다는 이런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본인 자신은 어떻게 주님 마음을 알게 되었는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내 마음을 알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가요? 그리스도의 영과 연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 그리고 교회의 최대의 과제가 이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영이, 교회의 영이 예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과 교통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일을 잘 합니까? 선교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구제도 잘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우리는 섭섭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같은 평가를 하실지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님의 영과 교통함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정말로 원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태복음 7장 22절과 23절에서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일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쓰고 죽을 힘을 다 써서 했는데 우리 주님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젊은 아이들의 말대로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야기는 같이 해야 합니다. 나만 이야기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살아갈 때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해야 하고 신앙을 할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하는데 나만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교통이 있어야합니다. 사람과 사람에도 교통이 있어야합니다. 물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교통이 있어야 하고 부모와 자식들 사이에서도 교통이 있어야합니다. 영이 교통해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교통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될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귀한 열매, 값진 열매, 멋진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업을 열심히 하는데도 남는 것이 없는 사람, 열심히 인생 살았고 열심히 자식을 키웠는데 아무것도 아닌 사람, 열심히 건강을 위해 애를 썼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은 많이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제대로 안 된 사람, 내가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곤고한 것들이 있을 때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영이 통해야합니다. 교통이 될 때 우리는 정말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하신 말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절대로 헛된 말씀을 하지 아니하시는 우리 예수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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