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빛을 따라 사는 인생 (창 39:20~23)

  • 잡초 잡초
  • 317
  • 0

첨부 1


성 경 : 창 39 : 20 - 23
제 목 : 빛을 따라 사는 인생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환경을 따라 사는 것과, 환경을 지배하고 사는 것,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따라 인생의 성패는, 좌우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경을 지배하는 것을, 신념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삶의 성공에 대한 신념, 이것만 있으면, 세상사는 것이 겁날 것이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신념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더욱 더 강하게 하고, 또 이런 신념으로 가정을 일으키며, 자신의 기업을 일으켜 나갑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 있어서, 신념은 무엇이어야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신뢰, 이것이 우리의 신념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신념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표현을   합니까?  신앙생활이라,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그런데 우리의 실제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무엇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까?  그저 주일날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무엇입니까?  종교생활이라고 심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신앙생활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까지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앙은 맞지만, 생활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이란,   신앙이 생활로 이어지고, 생활이 신앙이 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 성도들을 보면, 거의가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신앙의 문제점 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생활의 이원화.....  

그런데 여러분, 이런 신앙의 문제점이,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삶 속에서 나타난 인생의 무게를, 스스로가 견디지를 못하고, 
그 인생의 무게에 깔려 쓰러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신앙에는, 신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신념이요?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가 삶의 무게를 이길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나를 인도해 주실 때만이, 삶의 무게를 이길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그 분이 내 인생의 빛이시기 때문에.. 아멘!! 우리의 인생의 모든 어두움을 밝혀주는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따라 사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삶의 환경을 따라 살게 되면, 길이 없습니다.  길이 보이질 않아요.  막막합니다.  문제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 되신 하나님을 따라 살게 되면, 인생의 길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이니이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렇게 빛을 따라 사는 것이, 말처럼 참 쉽지가 않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날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인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 붙잡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 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신앙의 굴곡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내려갈 때면, 실망하게 되지요.  
그리고는 힘을 잃은 채, 그냥 쓰러진 자리에서 주저 않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신앙의 슬럼프에 빠져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에 도무지 힘을 내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이 당한 그 상황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이런 슬럼프가 없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삶이라는 것이예요.  

여러분, 성경에 나타난 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보세요.  그들의 삶이 언제나 승리하는 삶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인생에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에는 승리의 인물로, 또 축복의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 실패의 상황을 맞이할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자신의 인생을 향한, 섭리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왜 이런 인생의 실패가,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그 실패와 좌절이, 우리를 강하게 연단시키고, 단련시켜 나가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강철 검을 만들 때, 뜨거운 물에만 집어  넣지를 않습니다.  차가운 물에도 집어넣습니다.  이것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지요.  

성령과 은혜가 충만함으로, 뜨거운 물에 집어넣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인생의 실패를 통한 시련과 고난과 환난이라는, 차가운 물에 집어넣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생이 더 단단해진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몸도 그렇지 않습니까?  목욕할 때, 뜨거운 물에 먼저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차가운 물에도 들어갑니다.  남자들이 이런 짓 잘하는데, 이렇게 하면, 몸이 어떻게 되어집니까?   두 가지 효과가 나타난다고 하지요.  

먼저는, 피부가 좋아진다고 합니다.  피부가 탄력이 있고, 매끄러워진다고 합니다.  또 다른 효과는 무엇입니까?  혈액순환이 좋아진다는 거예요.  
피가 잘 돌게 되고, 또 피부도 탄력이 생기고 매끄러워지고, 그래서 안팎으로  몸이 건강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육 간에 강건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우리 인생을 더 탄력이 있고, 더 축복된 인생으로   만들어 가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이 이런 연단의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기에 우리가 순응하며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벧전 4 : 12절,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지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인생의 실패를 통한 고난의 연단의 결과가 무엇이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인생에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도들은,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질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구조,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은 온탕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냉탕도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예요.  다시 말해, 빛과 어둠이, 냉탕과 온탕이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가게 될 영혼의 세계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이 세상은, 이것이 분명하게 구별되어져 있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완벽한  빛도 없고, 완벽한 어둠도 없습니다.  영적인 혼돈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아무리 세상이 혼돈스럽고, 이해가 되질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혼돈된 세상을 살아간다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데, 그 때 그 인생은 그야말로 즐겁고, 기쁨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이 당한 고난과, 또 그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도 잘 아실 줄로 압니다.  그의 인생 여정을 우리가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 시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나타나 있는데, 첫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생이 아무리 잘 된다고 해도, 그 곳에는 반드시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그가 얼마나 잘 나갔습니까?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제일 잘 나갔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제일이 아니라, 혼자만 잘 나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쭐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이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런 잘 나가는 생활 속에서, 그 마음에 조그만 자만심이 생겨나고, 또 조그만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겸손함이 사라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열한 곡식 단이, 자기를 향해 절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기 열 한 형들이, 동생인 자기를 향해 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형들보다 높아지게 된다는 꿈인 것입니다.  

또 어떤 꿈을 꾸었습니까?  해와 달과 열 한 별들이, 자기를 향해 절을 합니다.  처음보다 더 확대된 꿈이지요.  이제는 형들뿐만 아니라, 부모님까지도 자기에게 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꿈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보다 더 높은 자리가 무엇인가?   왕의 자리인 것입니다.  왕의 자리에 있을 때만, 부모로부터 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꿈이 자기의 생각을 꾼 꿈이었습니까?  아니지요.  그가 형들을 업신여기고, 부모를 하대하는 교만하고 거만한 생각을 가졌기에, 이런 허황된 꿈을 꾸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거룩한 비전의 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꿈은 요셉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비전을 품은 요셉이, 왜 그 꿈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게   되었는가?   그의 교만함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요.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혼자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어 불만이었는데, 자기보다 높아진다는 꿈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도 자기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니까, 시기심에서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애굽의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좀 철이 있었고, 좀 더 지혜로웠다면, 아직은 어린 그 때부터 이런 고난을 당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비전속에서 연단은 필요했기에, 어차피 고난을 겪는 삶을 경험해야  겠지만, 이렇게 일찍부터 당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가 한참 잘 나갈 그 때에, 이런 어둠의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인생의 실패의 이유는, 바로 이 교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의 유혹이 넘어갔던 이유도, 교만 때문이었고, 삼손이 들릴라의 유혹에 빠졌던 것도, 자신의 속에 있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곧 잘 자신의 장점 때문에 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남들보다 잘 나간다고, 우쭐해 하지 마십시오.  남들과 비교해 지금 생활 여건이 조금 낫다고 해서, 교만하지 마십시오.  남들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더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지도 마십시오.  그 교만함이 나에게 닥칠 고난을, 일찍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일찍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은, 더 많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연단하실 기간이, 그만큼 길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잘 나가는 환경이,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고 내 인생이 실패하고 좌절할 때가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잘 나갈 때, 오히려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고, 장래를 겸손함 가운데 대비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 여정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두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인생이 고난과 환난으로 인해, 어둠이 깔려 있다 할지라도, 그 곳에는 반드시 빛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실패를 경험했을 때에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실패할 그 때에,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무조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저 실패에 절망하며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절망하지 말아야 하는가?  
여러분, 절망과 교만은, 옷을 달리 입은 사단의 성품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절망과 교만은, 똑같은 사단의 술책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절망하는 모습을 통해, 기뻐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 때문에 절망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실패를, 다시금 하나님을 찾는 기회로 삼고, 그 실패를 인생의 성공을 향한 디딤돌로 삼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절망이 사단의 또 다른 성품인가?  여러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절망하는 사람이 성공하면, 교만한 삶을 살아가고, 교만한 사람이 실패하면 쉽게 절망하게 됩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기도하질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 7 : 14절을 보세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형통할 때는, 인생이 잘 나갈 때는 교만하지 말고,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곤고한 날에는, 인생이 실패하고 좌절할 때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래도 저래도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우리 성도들이 항상 기도해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도움을 입을 수가 없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성도라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인생에 빛을 발견할 수 없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절망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을 보세요.  그는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이는 그에게 닥친 어둠의 환경인 것입니다.  나중에는 보디발의 가정에서 가정 총무로 일하게 되는데, 그 곳에서 그런대로 좀 살만하니까, 또 어떤 일을 당하게 됩니까?   보디발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요.  이제는 정말 더 내려 갈 곳이 없는, 내려 갈 대로 다 내려간, 극심한 어둠의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요셉의 환경은,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가 이런 절망스러운 어둠의 환경 속에서, 무엇을 붙잡았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셉은, 그런 극한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도, 절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이 변치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고통스럽습니까?  내 인생에 이런 고난의 때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극심한 고난의 때를 보내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른 것 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 붙잡아 봐야, 더 절망   가운데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왕의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을 만나, 꿈을 해석하는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의 꿈 해석대로 복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직을 하게 된 술 맡은 관원에게  요셉이 무슨 청을 했습니까?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술 관원이 요셉을 돌아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사실 요셉이 얼마나 기대했겠습니까?  자신을 돌아보겠다는 약속을 철떡같이 믿고 기다렸을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믿었던 사람이, 자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에 요셉은 더욱 절망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는 사단이 요셉을, 더욱 더 절망 가운데 빠트리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떠했습니까?  더욱 더 자신의 인생에 어둠의 그림자가 강하게 닥쳐오자, 그는 사람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고, 다시금 유일한 믿음의 대상자인 하나님을 향해 그의 머리를 들며, 손을 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가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예요.  잠시나마 사람을 의지하는 가운데, 기도의   시간을 멈추었던 것을 후회하며, 다시금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빛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의 빛을 비춰 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분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기도가 여러분의 인생의 어둠을 밝히는 빛인 것입니다.  요셉은 어둠에서 절망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빛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에 어둠의 그늘이 사라지지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희망이 되어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갇힌 감옥은, 분명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둠의 감옥에서 비로소 빛을 발견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빛이 무엇입니까?   그가 갇힌 감옥을 지키는 전옥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21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누가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했습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어둠이 물러가고, 광명의 빛이 비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옥에게 은혜를 입게 되고, 감옥의 제반업무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감옥이란 환경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옥을 다스리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보세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어떻게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아닌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희한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애굽의 종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노예는 곧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끌려간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에 어떻게 들어갔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또, 어떻게 고관대작의 부인을 범한 노예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즉결심판감입니다.  
사형이라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왜요?  그는 노예 신분이기 때문에...  

그런데 어떻게 그가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냥 살아난 것이 아니라,     또 어떻게 왕의 측근이나, 귀족들이 들어가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겠습니까?  일개 노예출신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전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요셉의 생애 가운데 벌어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인생이 그렇게 꼬이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일이 희한하게 잘 풀려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인간의 운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사랑하셔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권적인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요셉의 강한 의지로서, 자신의 인생에 닥쳐진   어둠의 환경을 몰아내기 위한, 처절한 기도의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희한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어둠을 한방에 물리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붙잡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당한 현실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당면한 문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안 되면, 저 방법 동원하고, 저 방법이 안 되면, 요 방법을 동원하고, 요 방법이 안 되면, 조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됩니까?  오히려 사방이 꽉 막힌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절망의 끝에서,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성도들의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아니 하나님을 찾지 않는,   모든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방이 막혀있어도, 우리는 인생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사방은 막혀도, 언제나 하늘은 뚫려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사단은 절대 하늘은 막지를 못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할 뿐인 것입니다.   어둠에 짓눌리게 만들어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아무리 강한 어둠이 몰려와도, 내가 찾은 이 빛으로 얼마든지, 밝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기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도는, 보물찾기다.” 아멘!!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것이다.  단단한 바위를 깨뜨리고, 그 속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두 번째 내용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꿈은 누구나가 꿀 수 있습니다.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비전은 누구라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꿈과 비전, 그것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일 수가 있습니다.  
왜입니까?  우리 모두도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요셉과 같이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그 꿈을, 비전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꿈과 비전은, 인생의 연단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연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기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악이 선으로 바뀝니다.  기도하면 화가 복으로 바뀝니다.  
인생의 어둠이 변해, 빛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인생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연단의 시기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더 단련하시고, 연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요, 섭리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신앙생활에 더욱 더 힘쓰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신앙 안에서의 신념을 가지시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겸손하면서, 또 늘 기도하면서, 요셉의 인생에 받은 놀라운 축복을, 저와 여러분의 머지않은   장래에 반드시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