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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할 것들 (출 1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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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출 16 : 1 - 12
제 목 : 우리가 싸워서 이겨야 할 것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의 손길로 인해 출애굽하게 되었고, 또 자신들을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서 기이한 방법으로 멸망시킨 일을 눈으로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홍해의 갈라진 마른 땅을 걸어  갔는데, 그들이 다 지나간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자신들을 뒤쫓아 오던 애굽의 군사들은, 이제까지 벽을 이루었던 물이 갑자기 덮치면서, 그들을 다 몰살시켜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이한 일을 경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신 권능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이, 진정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에 따라, 항상 다르게 나오는 고백, 다시 말해, 일시적인 감정에서 나오는 신앙의 고백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의 사건 뒤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한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만나 외에 먹을 것이 없음으로 불평하고, 물이 없음으로 불평하고, 하여튼 문제가 생길 때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불평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백성들이, 신 광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기서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을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굶주림 때문이었습니다.  배고픔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세요.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  쉽게 말하면, 배가 고파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 온 회중으로 주려죽게 하는 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배고픔의 문제는, 너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에 애굽의 종노릇 할 때에라도, 나름대로 배불리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의 배고픈 현실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기 전에, 한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들의 요구는 정당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요구는 인간 모세 앞에서는 정당 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나타낼 수 있는 바른 신앙의 자세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었는가?  

그들은 지금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들 마음에는, 누구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을 인도하여 낸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모세가 그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모세는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의심과 불신 가운데, 모세는 그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았고, 실상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내었느냐?  무슨 목적으로 구원해 내었느냐?  우리는 애굽을 탈출하면, 애굽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줄 알았는데, 도대체 이게 뭐냐?  누가 이런 삶을 살아갈 줄 알았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애굽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입술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혹시 여러분  마음으로는 동조하고 계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맞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 가운데 충분히 이런 마음 가진   분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입니까?  지금 여러분도,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쩌면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분명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 받은 이후의 삶이, 전혀 변한 게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구원 이후의 축복을 말씀하고 계시고, 또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실제적인 현실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게 없고, 옛날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더 못하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한 채로,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가진 채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아니면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해온 체면 때문에,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런 분들의 신앙생활이,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주일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 또 오늘과 같은 수요 예배 시간에 나와  설교를 들을 때, 주의 종들이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전하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혀 무감각한 감정으로 말씀을 받거나, 아니면    그 말씀에 대해, 마음으로 반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불평으로, 또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교역자들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모세를 보세요.  또 모세를 수종 들어 백성들을 다스리는 아론을 보세요.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또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별 다른 변화가 없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축복의 역사가 없이, 매일 매일을 반복하고 있으니, 백성들이 화가 난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필요한 것은, 당장 먹을 떡이요, 고기요, 마실 물인데, 모세와 아론은  자꾸만 손에 잡히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고 있고, 또 아론은 자꾸만 힘에 겨운 제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관심이, 이처럼 달랐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너희가 지금    이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면, 또 이 광야 땅에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제사를 드리면,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해 주실 것이고, 그 땅의 소산을 취하게 하실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떤 역사를 일으켜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관심사는 말씀이나, 제사가 아니다.  그냥 우리로 배고프지 않게 하고, 이 힘든 광야의 생활이 속히 끝나게 해 다오.  모세와 아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우리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기도를 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솔직한 우리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이런  신앙의 상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찌 바로 맺어갈 수 있겠으며, 또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 어찌 내 인생 가운데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 마음이나,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복주시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이런 불평의 마음을 가지고, 원망의 마음을 가진 성도들과 일생을 동행하며,  좋은 관계를 맺어 나가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불평이나 원망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성도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고개를 돌려 버리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불평과 원망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트러블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싸움이 시작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서로가 감정이 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과 성도들이 감정싸움을 하게 되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결국 지게 되고, 손해 보는 것은 우리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감정싸움을 벌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백성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당하게 되었고, 결국 끝까지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할 때에, 그들은 모두가 그 광야에서 고생만 직싸게 하다가, 다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굉장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인생이 어떠합니까?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뭐 다를 것이 있습니까?  인생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인생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살아가는 가운데 원치 않는 고난과 환난을 당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찌해야겠습니까?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해 나가야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알기 이전에도, 우리에게는 배고픔이나, 질병이나 가난의 고통, 죽음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적어도 인생에 이런 문제는 말끔히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후에도 이런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막연하게 자신의 인생에 축복이 임할 것이라는 헛된 기대는 다 던져 버리고, 오히려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닥쳐오는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을, 신앙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갈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그러나 지극히 신앙적인 대처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닥쳐진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 여러분은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대하는 자세가, 분명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믿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되 온전히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아멘!!!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할렐루야!!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찬양의 가사가, 실제 우리의 삶의 신앙고백이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렘 29 : 13절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원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져 있습니다.  누가 분리하라고 강요한 것 아니지요.  성경에는 그러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분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영적인 양식인 말씀도 중요 하지만, 육신의 양식인 떡도 중요하니, 인생 살아가면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다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맞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다 잡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언제든지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놓아야, 다른 하나를 온전히 붙잡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라로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만약에 성도들에게, 이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포기하겠습니까?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포기하고,   육의 양식인 떡을 선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예배하는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영의 양식인 말씀을 포기하고, 육신의 떡을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영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영에 속한 사람이냐?  육에 속한 사람이냐?   이제 이것이 궁금한데, 사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내가 인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말씀을 먼저 붙잡을 것이냐?  아니면, 다른 세상적인 대안을 먼저 붙잡을 것이냐?   이것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평소에 신앙의 열정이 뜨거운  사람들 가운데서도, 인생의 위기가 닥쳐오면, 미련 없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의 방법을 택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완전히 세속적인 부정한 방법들을, 스스럼없이 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코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선택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은 점점 더 내리막길을 달리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망하게 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은,   이런 결과에 대한 책임마저도, 하나님께 미루어버리면서, 원망하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불신앙 가운데 나타난 인생의 잘못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앙에 있어, 진정 싸워 이겨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는데, 첫째는, 내 속에 고개를 드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분명 먹을 양식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것에 매여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인생의 위기의 때에, 더 하나님을 바라보고, 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게 된다면, 그 인생의 위기가, 오히려 축복의 기회가 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신앙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 때에, 특별히 경제적인 위기에 놓여 있을 때에, 오히려 더 말씀 가까이 나아오고, 오히려 더 기도의 깊은 자리로 들어가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그 신앙을 기뻐하시고, 축복의 문을 열어 주시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인생에 전화위복의 큰 은혜를 체험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롬 8 : 17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할렐루야!!  

여러분 후사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언제 받을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유산으로 받을 수 있고, 또 생전이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특별히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싶을 때에, 이런 상속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조급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주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가 왜 자식의 어려움을 모르시겠습니까?  
왜 자식의 힘든 삶을 모른 채 외면하시겠습니까?  자식을 도울 만한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또 천하만국을 소유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고 했습니다.   
이런 능력의 하나님이 자식의 괴로움을 바라보면서도, 즉시로 도우시질 아니하고,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인생을 연단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의 고난 가운데, 때로는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단의 시기를 잘 견디고, 끝이 나게 되면, 어떤 역사가 인생에 일어납니까?  따라 합시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제까지 당했던 고생, 남들에게 받았던 수치, 모든 괴로움, 다 만회하고 남을 수 있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 가운데 더욱 높아져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존귀한 인생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시켰는데, 그들을 바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가시질 아니하고, 굳이 광야에 일정기간 머무르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훈련을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훈련을 시키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깨닫게 하시고, 또 축복의 땅 가나안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그 땅에서도 변함없이   당신께 예배하고, 경배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 그 힘든 광야에서, 일정기간 동안 이런 훈련을 받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훈련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앞으로 닥칠 인생의 위기 시에도, 앞으로 여러 가지 인생의 실패를 경험할 때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기 위한 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시험에 대해, 성적이 빵점이었다는 겁니다.  전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그저 자기 기분에 따라, 자기감정에 따라 하나님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던 그들의 신앙적 자세가, 결국 그들의 삶을 더욱 더 피폐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실패자의 인생, 망하는 인생 살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이런 원망과 불평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항상 원망하라. 쉬지 말고 불평하라. 범사에 짜증내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아멘!! 
모든 환경에 대한 기쁨과 감사, 그리고 이를 향한 기도가, 결국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렘 33 : 3절에 말씀하지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할렐루야!! 
또 빌 4 : 6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약속의 말씀을, 여러분 모두가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하심을 인정하고, 응답에 대한 조급함과, 또 세상 축복에 대한 욕심을 벗어버리고, 오히려 감사와 찬송과 기도로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신실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장래의 놀라운 축복,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싸움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인 것입니다.

출 17 : 8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전쟁기록이 나타나 있지요?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아말렉이 공격한 사건입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군대  장관이 되어서 전장에 나가있었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대동해서 산꼭대기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내용은 무엇입니까?
  
출 17 : 11절에 있는 말씀이지요.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결국, 그 전쟁에서 이기고 짐은, 여호수아가 지닌 힘과 능력이 아닌, 모세의   기도하는 손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든 그 기도의 손이, 바로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이기게 한, “영적인 힘과 능력”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먼저 소유하고 개발해야 될 능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력” 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요삼 1 : 2절에도 말씀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의 영혼이 잘 되면, 우리의 육신의 범사는, 저절로 잘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그래서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되실 줄로 압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들은, 그저 눈앞의 수를 따라 돌을 놓지 않습니다.  
바둑판 전체를 바라보면서, 판세를 미리 내다보면서, 한 수 한 수, 수순을 따라 두게 되는데, 이것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기력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기력, 바둑인의 실력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에 있어, 당장의 이익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인생 전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영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력이 있어야, 우리의 삶이 결국에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실패가 오고, 망함이 있어도, 결코 쓰러지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용기를 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능히 이기며 일어설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바로 모세의 기도가,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만 아니지요.  믿음의 선진들이 했던 모든 기도에는, 이런 영력이 담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간절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 속에는, 감히 사단이 대적하지 못하는 강력한 힘이 베여져 있고,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고서는 안 될 정도의 권세가 담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하늘에서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권세를 뚫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까지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선진들과 같은 강력한 영적인 힘,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훼방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기도의 힘을, 우리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의 성도들을 보세요.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이런 영적인 능력이 더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힘을 갖추기 위한 신앙적 노력은 등한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력에 대한 개발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자기 가정의 안녕을  추구하는 일에만 몰두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은, 실력은 있는데, 영력이 없습니다. 
마치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의 건강평가와 같습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에, 덩치는 전에 보다 훨씬 더 커졌는데, 그 속에 근력은 전에 아이들만 못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체력이 훨씬 더 약해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아이들에게 생기는 병이 무엇입니까?  소아 당뇨, 소아 고지혈증, 소아 부정맥증, 이런 병들이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어울릴만한 병입니까?  이런 병들은 원래 성인병이라고 해서, 어른들이 주로 겪는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도 어린 학생들이 잘 걸리니까, 성인병이란 말 대신, 뭐라고 바뀌었습니까?  현대병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상태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꼭 이와 같지 않습니까?  신앙적인 지식, 신학적인 지식은 전에 보다 훨씬 더 많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성도들은, 예전의 성도들보다 훨씬 더 지적이고, 신앙 수준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높은 신앙 지성과, 그 높은 신앙 수준으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전의 무식한 성도들보다, 영적으로는 더 나약해져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채 걸음도 띠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고, 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전도하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단순합니다.  어려운 것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잔머리 굴리니까 복잡하게  느껴질 뿐인 것입니다.   그냥 단순무식하게 예배하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전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핑계가 있을 수 있고, 무슨 조건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다면, 다 내가 이 명령을 피해가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딤전 4 : 7절, 8절 말씀을 보세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런데 이어지는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누가 받을 만하다?    모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경건의 연습, 곧 말씀과 기도의 훈련이란, 앞장 서 수고하는 사역자들이나, 목회자들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라면, 내가 영적인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누구라도 이런 경건의 연습, 신앙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이 든다고 피해가거나, 훈련을 받아도 적당히 요령껏 해서는, 결코  영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곧 성령의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의 사람이란, 곧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군인으로 치면 해병대지요.  뭐 잡은 해병대?   
귀신 잡는 해병대...   뭐 잡는 성도?   귀신 잡는 성도...  

우리나라 해병대가 얼마나 담대합니까?  얼마나 용감합니까?  얼마나 강인합니까?  옛날 월남 전쟁 때, 미국의 해병대는 베트콩들이 우습게 알아도, 우리나라 해병대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더 담대해야 하고, 더 강인해야 할 우리 성도들이, 세상의 불신자들이 걸리는 영적인 병에 걸려 비실비실 대고 있다면, 이 땅에 과연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런 신앙상태로 어찌 사단의 세력들을 물리쳐 이기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신앙은 구호가 아닙니다.  실천인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성령은 지식이 아닙니다.  훈련인 것입니다.  

고전 4 : 20절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영력은 우리의 입술에서 나타나질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가운데, 말씀을 붙잡는 훈련 가운데서 나타나고, 성령의 능력을 날마다 간구하는 기도의 무릎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듯이, 영력에도 왕도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가리켜, 영력을 상실해 가는 시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더욱 더 악해지고, 사단의 세력은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사단이 득세 하는 말세지말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이런 때일수록 영적으로 더욱 더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 전쟁은 결코 무승부가 없습니다.   이기지 않으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이기려면, 결코 감정을 따라 살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신앙을 따라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변수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영원불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듯이, 또 그 분의 말씀도 영원토록 변함이 없듯이,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신앙도, 변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오직 신앙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 또한 급변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내 감정을 제어하고,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평소의 삶 속에서, 우리도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질 때에, 이것이 우리에게도 강력한 영력이 되어서, 세상을 이길 뿐만  아니라, 사단의 권세도 능히 이기게 되는, 성령이 사람이 되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성천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특별히 오늘 수요 예배를 드리며  이 설교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은, 다 하나님께 붙들린바 된 영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남은 생애 가운데 마음껏 누리며,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더욱 크게 펼쳐나가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더 크게  세워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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