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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른 신앙의 자세 (마 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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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마 17 : 14 - 20
제 목 : 바른 신앙의 자세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공통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평화와, 또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나가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화나, 행복한 가정생활, 우리가 소망하는 이런 것들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두가 우리의 마음가짐에서 온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이라고 하니까,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마인드 컨트롤을 말하는 줄 아는데, 그런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가지는 마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소망 가운데 가지는,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돈이 없어도, 권력이 없어도, 또 명예가 없어도, 남들과 비교해 보아, 뭐 하나 우월감을 가질 수 없는, 변변치 못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가 가지는 신앙적인 마음의 자세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의 인생에 참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의 모습들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그들 가운데, 인생을 실패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왜 그들이 한결같이 실패하는 인생을 살아갑니까?  그들의 가진 삶의 조건이나, 여러 가지 환경들이 남들보다 좋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실패한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 벌써 잘못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매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맨 날 죽겠다고 소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삶이 맨 날 죽어나는 거지요.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볼 때도,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모든 가족들의 얼굴이 너무나도 밝습니다.  서로가 사랑하는 가운데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힘든 가정을 상황을 이해하고 돕는,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삶을 나중에라도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결코 계속적인 가난에 허덕이질 않습니다.  부모 때에는 어쩔 수 없어도, 그 자녀들이 결국에는 그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남들이 볼 때는 별로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데, 맨 날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래서 가족들 가운데 서로가 책임을 떠넘기고, 불화합니다.  그래서 그 가정은 지옥과 같고, 결국에는 모래알처럼 깨어지고 흩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두고 흔히 뭐라고 부릅니까?  베지밀 하우스, 우리말로는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지요.   이런 가정은, 백날가도 못 일어나는 겁니다.  

옛날 IMF가 터질 때, 벌써 10년이 넘었지요?  그 때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월급 600만원 받던 사람이, 기업이 어려워져서, 350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가정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일어나 불화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그 가장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 당시 제 사례가 65만원이었습니다.  교육전도사로 있을 때였으니까,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례로 생활하면서도, 한번도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 누구 하나, 날 보고 죽으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만족과 행복이, 무엇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세상적으로 드러난, 이런 외형적인 조건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언제나 많이 가진 사람들이, 늘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남들보다 못 가진 사람들이, 많이 가진 사람들보다, 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질 않습니까?   

결국 인생의 만족이나 행복이, 자신이 가진 소유의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행복을 소유의 많음에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런 세속적이고, 인본주의 적인 생각들을, 속히 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여러분을 하나님이 기뻐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생각 가진 성도들은, 축복해 주시지를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이 가진 생각 자체가, 벌써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신앙이 아직까지도,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있질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겁니다.   기뻐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민혜경이란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불렀지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어요.”  기억나십니까?  그래서 그 당시 청소년들이, 참 이 노래를 많이 따라 불렀습니다.  저도 많이 불렀습니다.  요는 뭡니까?   “지 인생, 지꺼라는 거지요.”  
부모님의 간섭은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노래 부르던 그 당시 청소년들이, 대체로 어떤 인생 살아갔습니까?   문제아로 살아가더라는 겁니다.  

“나는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어요.”  개뿔!!!  뭘 책임져요?  하나도 책임지지 못하고, 궁색하고 초라한 인생 살아가는데...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향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 없어도, 자신의 인생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능력이 바닥이 나고, 한계에 달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그 때서라도, 자신의 생각이 잘 못되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을 다시금 소망하는 가운데 일어서면 되는데,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인생을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가운데, 어디서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런 생각 가운데 어디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   자기 경험, 자기 생각, 자기 능력, 그래서 자기가 망하면, 인생 전체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앙인 것이지요.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시고, 우리 신앙의 주체가 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잠 16 : 9절에 말씀하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아멘!!

우리의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어도, 우리 힘으로는 인생을 성공할 수 없어도, 우리 인생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소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이런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의 삶도 변화될 수 있고, 또 인생에 참된 만족과 행복을, 반드시 누리며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신앙의 도전을 주기를 원하시고, 이런 신앙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2008년도를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떤 신앙적 자세로 인생을 도전해 나가야 되겠는가?  첫째는, 현실의 모습에 두려워하지 말고, 신앙으로 무장해 도전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일 가운데,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질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경험해 보셔서 잘 아실 줄로 압니다.  인생이 자기가 계획한 대로 다 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성공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부자 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대로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는, 더 실패하게 되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어찌 두려워하지 않고, 미래를 도전해 나갈 수 있겠는가?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이런 나약한 생각이, 결국 그 사람을 현실에 주저앉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겐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아멘!!!  누구를 믿으라는 것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주인 되시고, 우리 신앙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분을 믿음으로, 인생을 도전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역사를 보세요.  아니 인류의 역사를 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성공하고, 능력 있고, 부요한 인생 살아갑니까?  결국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사람들이, 이런 복된 인생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이 순탄했습니까?  결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그들이 출발하자마자 위기에 봉착하지 않았습니까?   애굽의 군사들은 쫓아  오는데, 그들 앞에는 커다란 홍해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 모세는 두려워 떨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백성들 가운데 외쳤습니다.  여러분, 출 14 : 13절 이하에 보세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런 담대한 외침을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세가 원래부터, 이런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소심이 아니라, 극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배짱이라고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겁쟁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극 소심했던 그가, 이렇게 담대한 믿음의 대장부로 변할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후원자가 되어주시고, 인도자가 되어 주심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애굽의 바로에게까지 나아가게 된 것 아닙니까?  
이는 목숨을 건 행동인 것입니다.  일찍이 애굽을 대적하고 도망을 갔던 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80이 넘은 노인의 모습입니다.  
무엇으로 바로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앞은 고사하고, 애굽으로 들어가자 마저 죽게 될 판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어질 것이라는 것을, 모세가 왜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믿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또 하나님의 지금도 자신과 함께 하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요, 임마누엘의 신앙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예비하셨다.  모세가 베풀 능력을 예비해 두셨다는 겁니다.  그가 믿음으로 선포하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재앙이 닥치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습니다.  

이런 재앙 속에 바로가 그를 대적하며, 위협을 했지만, 그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지금도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그를 누가 대적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의 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런 믿음으로, 애굽의 바로를 이길 수 있었고, 거대한 홍해가   그의 앞을 가로막을 지라도, 믿음으로 도전해서 그것을 갈라지게 만들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축복의 땅 가나안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와 같은 이런 담대한 믿음을, 이런 담대한 신앙을, 오늘 우리도 나타낼 수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할렐루야!!  
이런 믿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 가지기가, 말처럼 참 쉽지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이런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참 보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에게는 이런 담대한 믿음이 생기지를 않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현실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저 당장에 당한 문제만 바라보고, 그 문제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정신을 차리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달리, 똑같은 위기의 상황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죽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아우성을 쳤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를 향해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지지리 궁상을 떨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질 못하고, 그 목적에서 다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들어가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이 결국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멘!!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단이 지배하는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종노릇하는 가운데 고통 받으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축복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 나아가는 길에, 역경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홍해와 같은 문제가 닥칠 수 있고, 광야에서의 목마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전혀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앞길을 가로막는 홍해야, 갈라질 지어다.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올 지어다.  갈증도 물러갈 지어다.  
이런 믿음의 담대한 신앙으로 현실을 부딪힌다면, 모든 인생의 고난과 환난이 떠나가게 되고, 축복으로 변화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담대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적인 자질이 변화되질 않으면, 이런 담대한 믿음도,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믿음이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을 삶 속에서 능력으로, 축복으로 이룰 수 있는 방편이 있는데, 그 방편을 가지지 않고서는, 우리의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우리는 어떤 신앙적 자세로 인생을 도전해 나가야겠는가?
기도하는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도전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편인 줄로 믿습니다.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되고, 그 능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믿습니까?   기도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간질병에 걸린 한 아이를,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쳤습니까?  
전혀 고치지를 못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약간의 효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왜 안 낫지?  우리도 똑같이 주님과 같이 했는데..”  다시 한번 기도합니다.  “주여!  믿습니다.  주여!  이 아이를 고쳐 주실 줄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들에게 믿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분명 믿음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 제자들은, 이 아이를 고치는 역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입니까? 

믿음은 있었지만, 그 아이를 붙잡고, 그 부모 앞에서 담대하게 기도하는 신앙은 있었지만, 주님과 같은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기도의 준비가 없었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세요.  그 간질병 걸린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을 향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의 가진 그 담대한 믿음이, 전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면 펄쩍 뛰실 겁니다.  믿음이 왜 없습니까?  누구보다도 크고 강한 믿음이 있습니다.   저도 믿음이 있고, 여러분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에는,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20절에 보세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거짓이란 말입니까?  믿음이 한 겨자씨만 있어도, 이런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데, 어찌 믿음이 크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의 생각뿐인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적인 믿음, 곧 기도하는 신앙의 믿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하는 신앙을 소유하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들이 그 아이를 붙들고 기도했지 않습니까?”  그런 당장에 나타내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기도는, 평소의 삶 속에서 저장되어진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밧데리와 같은 것입니다.  
밧데리가 충전되어 있지 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소에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문제 만날 때마다 즉흥적으로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백날 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남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까?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인 것입니다.   중보기도가 너무나도 귀한 것이지만, 나를 위한 중보의 기도도,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 10 : 13절에 보세요.  중보기도의 효력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어떤 말씀입니까?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스스로 기도하면, 너희의 중보기도가 그 집에 응답으로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스스로 기도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 응답의 축복이 중보 기도하는 너희에게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  

그래서 중보 기도하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무조건 복이 되지만, 그 기도의 대상자들은, 무조건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 2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것만이, 살 길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도할 때, 먼저 내가 살게 됩니다.  아멘!!  또 내가 기도할 때, 남도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믿음을 실제적인 능력으로 나타내게 하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보내시면서, 얼마나 이 기도에 대해   강조하시고, 가르치셨습니까?   또 몸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새벽 미명에도 기도하시고, 밤에도 철야하시며 기도하시고, 심지어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몸부림치는 기도까지 보여 주시면서, 이 땅에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제자들이 기도생활에 전혀 힘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전혀 안 한 것은 아닙니다.  좀 기도하다가 힘이 들면 중단했습니다.  중단했다가도, 다시 또 힘을 내서 기도해야 하는데, 그냥 그 길로 아예 쉬어  버립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슨 능력의 동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간질 병 걸린 아이를 놓고, 믿음으로 덤벼들었다가, 쩔쩔매게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으셨지만, 마침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이 말씀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분노인 것입니다.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극심한 분노인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탄식인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제자들을 면박을 주었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만큼 너희에게 정성을 쏟아 부었으면,   그만큼 너희에게 가르쳤으면, 이제는 좀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화되지 못할 수가 있느냐는, 주님의 탄식이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제자들이, 책망의 탄식을 들어야 했는가?  그들이 평소에 기도에 대한 주님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능력은, 오직 기도의 능력으로서만 가능한 일인데, 기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 행하는 능력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에, 그들은 사역의 현장에서 실패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책망, 주님의 탄식, 오늘 우리 성도들을 향한 책망과 탄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 찔림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가책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기도가 거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송합니다만,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닌 줄로 압니다.  여러분, 기도는 나이  들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 기도는 나이 들어서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히려 젊을 때 힘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서점에 가니까, “하나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라는 책이 있습디다.  
저는 그 책 제목에서 벌써 은혜가 됩디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너무 바쁘다 보면,   내가 내 삶을 콘트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바르게 이끌어 가시도록 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내게 주신 직분과, 사명 때문이라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맡은 직분, 하나님이 주신 직분 아닙니까?   여러분이 맡은 사명,  하나님이 주신 사명 아닙니까?   그 일을 무슨 힘으로 감당해 나가시렵니까?  내 힘으로 감당합니까?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감당하는 척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에 대한 열매는, 맺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왜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왜 능력이 없습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올 2008년도 한 해는, 기도가 살아나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적으로도, 기도의 부흥이 일어나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도꼭지를 틀지도 않고, 물을 얻기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수도꼭지를 틀 때, 비로소 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와   여러분이 기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의 물줄기가,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가, 하나님의 축복의 물줄기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쏟아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절망적인 현실에 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름답게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현실에 부딪혀 담대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신앙의 자세에서 탈피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도전해 나가고, 어려운 환경에 부딪힐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담대히 맞서 싸우면서, 더 큰 승리를 쟁취해 나가는 신앙의 삶,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이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동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가 생명인 줄로 믿습니다.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신앙의 모습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 가운데 장착 되어져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주의 이름으로 승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귀한 신앙으로, 여러분의 심령도 살아나고, 여러분의 가정도 살아나고,  나로 인하여 우리의 이웃들과 친척들도 살아나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도 살아나서 부흥케 되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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