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갈 3:23~29) - 율법

  • 잡초 잡초
  • 375
  • 0

첨부 1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갈 3:23~29) 


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짙은 어두움입니다. 불을 켜기 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늘 지내던 곳은 어림짐작으로 움직일 수 있지만 처음 간 낯선 곳에 머물고 있다면 정말 한발작도 움직이기 힘듭니다. 그건 글을 배우기 전의 우리의 상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도 한글이라든가 영어라고 하면은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뜻을 알기는 어렵다고는 해도 읽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동남아 여행을 처음 갔을 때 느꼈던 당황감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도로 표지판에는 영어가 같이 표시되어 있어서 다행이지만 도시의 간판은 도무지 알아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 당황스러운 마음은 아랍권에 갔을 때 거의 대부분 아랍어로만 쓰여 있는데 알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집트는 차량 번호판조차도 자기네 숫자로 기록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외국인들이 알아볼 수 있을지 관광대국이라고 하면서도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건 우리 한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합니다. 거의 모든 간판이 한글로만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오게 되면 많이 당황한다고 합니다. 그나마 길을 물으려 하면 허둥지둥 도망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죠. 그래도 나라마다 공통적인 것도 있습니다. 흔히 도로에 번호를 붙입니다. 그 도로 번호를 붙일 때 홀수로 끝나는 번호는 남북으로 통하는 도로입니다. 동서로 통하는 도로는 짝수로 끝나는 번호를 붙입니다. 

영어로 시내의 도로 이름을 부를 때 우리 식으로 종로 1가 2가 할 때 보통 street나 avenu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street는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에 사용하는 것이고 avenue는 남북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사용합니다. 그러기에 street나 avenue만 보아도 이 도로가 남북으로 난 도로인지 동서로 난 도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상식만 알면 목적지를 찾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하지만 이런 상식을 모를 때는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죠.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어릴 때부터 믿음의 사정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그래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뒤늦게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들로서는 교회 안에서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들조차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알 듯 알 듯 하면서도 잘 모르겠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단어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외국말처럼 들려집니다. 하물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그냥 쉽게 몸에 배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에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규정입니다. 크게 보면 이건 해라 이건 하지 말라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 금지 규정과 하라고 하는 장려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성격이 아니라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규정에 대해서 들을 때 반드시 우리 마음에 왜라고 하는 단어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할 때 그럼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지 때로는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일한 금지 규정입니다. 너희들 하고 싶을 대로 다 해라 하지만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는 그때는 죽음이 뭔지도 몰랐잖아요. 먹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먹지 마. 그런데 왜 먹지 말라는 거냐. 먹으면 죽기 때문에. 그럼 왜 다른 건 먹어도 되는데 그건 먹으면 안 되냐? 그게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이니까. 그리고 안 지키면 죽는단 말야. 그럼 죽는 게 뭔데? 처음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최초의 사람입니다. 누구도 죽은 적이 없어요. 그럼 죽음이 뭔데 죽는다고 하는 건가?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각해 보면 너무 일방적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할 때 거기에 대해서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내가 당한 것만큼 갚아야 된다. 그건 누구라도 다 공감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옆에 또 무슨 말이 있느냐 하면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어떤 말씀을 따라야 된다는 건 참 혼란스럽습니다. 더군다나 똑같은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래 맞아 그렇게 해야 돼 하고 고개를 끄떡거리지만 어떤 사람은 왜 꼭 그래야 돼 하고 고개를 내젖습니다. 

물론 왜 그래야만 하느냐 하면 그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거라고 말하지만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또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방적인 모습들이 우리들의 삶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기를 적에 보면 어린아이들이 뭘 하려고 하면 엄마는 기겁을 하면서 안 돼 그럽니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에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서 안 되는 거야 하고 설명을 하면 알아들을까요? 아니 알아듣는 나이가 됐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나이가 차면 학교에 갑니다. 싫다고 울고불고 하는 아이들을 억지로 학교에 데려다 놓습니다. 그리고는 하기 싫다는 공부하라고 다그칩니다. 재미있는 컴퓨터 게임은 그만 하라는 겁니다. 그 지겨운 공부만 하라고 합니다. 정말 공부는 컴퓨터 게임처럼 재미있게는 못 가르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공부보다는 게임이 백번 더 재미있거든요. 그런데 부모들은 공부하라고만 다그칩니다. 그러면서 꼭 한 마디 합니다. 다 너를 위해서야. 

그런데 아이들이 생각할 때는 아닌 것 같아요. 정말 나를 위해서라면 나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근데 왜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고 재미도 없고 하기도 싫은 공부만 하라고 하는 건데. 그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나중에야 그 뜻을 알게 되지만 그걸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고 재능이 있는 쪽으로 이끌어주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우리네 자녀 교육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남들도 하니까 해야 되는 그런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뒤늦게 부모들이 후회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때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게 해야 되는 거였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까 잘못했다고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과는 다르죠. 하나님이 하라고 할 때는 거기에 따른 보장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대로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죠.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도 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지금 당장 보면 아닌 것만 같아요. 그게 하와가 겪었던 혼란입니다. 사탄이 와서 먹어도 안 죽는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니까 오히려 그 말이 왜 그렇게 그럴듯하게만 생각되는지 참 모르겠어요. 아마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굉장히 맛있었을 것 같아요. 한 입 막 깨물었는데 도무지 써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면 그거 집어 삼켰을까요? 아니 그럼 아주 써서 입도 대지 못할 정도로 만들지 그랬냐고 하겠습니까?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런 생활 규범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하는 훈련 과정입니다.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끔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 처음에는 힘들게만 느껴지던 것이 어느 단계에 가면 아주 자연스러워집니다. 오히려 그렇게 안 하면 이상해요.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모든 것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또 깨닫죠. 아하, 그랬구나.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율법에 갇혀 있었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장차 올 믿음의 길을 보여 주실 때까지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믿음의 길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하,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구나.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로구나. 그리고 그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처럼 살아보니까 또 깨닫게 됩니다. 아하, 지금까지 이렇게 해라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이것 때문이로구나. 결국 예수님 안에 참된 행복이 있고 예수님 안에서 진짜 평안을 누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하라는 것을 하게 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죠. 결국 영어를 아무리 배워도 힘들기만 하고 이걸 왜 하라는지 모르겠네 했는데 외국 나가 보니까 알게 되는 겁니다. 아하,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리고 나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되는 거죠. 

율법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요 이제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로서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때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이미 훈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훈련해 온 이유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제 몸에 밴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게 반대일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배웁니다. 왜 이래야 되느냐?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그 율법을 통해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의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바로 알고 깨달아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을 삼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의 문제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로 옷을 삼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초청받은 사람들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 임금님이 다시 명령을 내립니다. 길거리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보는 대로 다 초청하도록 하라. 그래 신하들이 나가서 사람들을 데려왔는데 거기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들이 왕궁 잔치자리를 꽉 채웠는데 그 자리가 가득 찬 것을 보고 임금님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임금님의 낯빛이 변합니다. 보니까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 저놈을 당장 내 쫓아라 그랬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복이라고 하는 것은 왕궁 입구에 다 준비해 놓은 것이랍니다. 그러니까 들어올 때 입으면 되는 겁니다. 그건 임금님을 만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런데 그걸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을 무시한 것이죠. 그러니까 예복은 임금님을 임금님으로 대하는 예절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삼아 입는다고 하는 것도 그런 뜻입니다. 내 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내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예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심으로 내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어 죄도 범하고 허물도 많지만 그런 나를 여전히 자녀 삼아 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조금도 교만할 것이 내게는 없습니다. 항상 겸손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함께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제가 아들을 부릅니다. 아들아 이것 좀 옆집에 갖다 주어라. 그래 아들이 그걸 가지고 옆집에 갑니다. 아버지께서 이걸 갖다 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아버지께도 고맙다고 전해드려라. 그리고 수고했는데 이거 받아라 하고 용돈을 줄 수도 있겠죠. 물론 가져다주는 수고는 내가 했는지 몰라도 그렇게 하도록 누가 만들어주었습니까? 그건 아버지 아닙니까? 들고 간 것은 나지만 그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주신 것입니다. 그걸 나는 단지 들고 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로 옷을 삼아 입는다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능력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된 것이요 이제 내가 살아가는 이유도 살아가는 모든 능력도 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리스도로 옷을 삼아 입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저앉을 이유도 없습니다. 단지 나는 주님만 의지하고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어떤 나타난 결과만 가지고 기뻐하거나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그건 지금 당장의 결과일 뿐이지 모든 것의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 낙심하지 않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삼아 입고 사는 사람 다시 말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살다보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툴툴 털고 일어나면 되는 겁니다. 주님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그게 그리스도로 옷을 삼아 입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처럼 받아들여주면 됩니다. 끌어안아주면 됩니다. 왜 그랬어가 아니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가 아니라 그냥 조용히 손을 잡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안아주면 되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꼭 한 마디 해야겠다면 힘내 아니면 우리 다시 해보자 아니면 내가 도와줄게 그러면 되는 겁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 예수님으로 옷을 삼아 입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우리 모두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그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 뭐 잘났고 못났고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입양이 됐다는 것은 원래 자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 잘났고 나 못났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주님이 그렇게 원하신 것입니다. 나는 단지 믿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나를 자녀 삼아 주신 아버지께 잘 보이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서로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똑같이 입양된 입장에서 너 잘났네 너 못났네 하고 싸우고 갈라져서 다투고 있다면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또 서로 편가름을 해가지고 으르렁대고 있다면 아버지의 입장은 또 뭐가 되는 것입니까? 사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들도 가만히 보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성격도 다르고요 생김새도 가만히 보면 서로 다릅니다. 그러다보니 형제끼리도 서로 싸울 때보면 어쩜 저렇게 심하게 싸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싸울 때도 있어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렇게 만났다 하면 싸우는 형제들도요 이웃집 아이가 내 형제를 건드렸다 하면 전부 하나가 돼서 덤벼들지 않습니까? 왜 그래요?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형제끼리 서로 화목하면 더 바랄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지나치다 싶어도 품어주어야 하고요 좀 부족하다 싶어도 내가 채워주면 됩니다. 세상에 백 퍼센트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실수가 없는 사람 또 누가 있습니까? 누구나 다 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너그럽게 넘겨주면 되고 그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려워요. 왜 어려울까요? 나도 모르게 나를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려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을 먼저 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을 배려해주는 모습 그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배려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또한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받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너와 내 모든 후손이 다 함께 복을 받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 약속에 함께 포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복을 그것도 모든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자격을 우리가 얻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내가 복을 받고 나로 말미암아 주위 사람들이 복을 누리도록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자녀가 복되고 잘되며 나의 산업이 잘되어 물질로도 풍성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누리며 또 주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내 주위로 모여드는 중심적인 인물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건강과 장수도 누려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복이 예수님 안에서 내 것이다 내가 이런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고백하시고 감사하십시오. 부족할 때 오히려 풍족하게 주심을 감사하십시오. 아플 때 오히려 건강주심을 감사하십시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으로 보는 땅을 다 네게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종과 횡으로 두루 다닌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되었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던 모든 복을 우리 모두가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