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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하는 교회가 되려면 (행 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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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행 2 : 37 - 47
제 목 : 부흥하는 교회가 되려면 

적은 교회나 개척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관심이 그 교회 성도들의  숫자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겉으로는 표를 안 내지요.  
그러나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가면, 자연히 눈동자가 돌아가게 된답니다.  
이쪽에서 저쪽을 쓱 훌터보면서,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의 수를 헤아린다고 합니다.  

저도 개척교회를 섬겨본 경험이 있어, 목사님들의 이런 심리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제가 개척교회를 세운 것은 아니지만, 거의 담임과 같은 역할을 했기에, 숫자에 민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수를 헤아리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평소에 교회에 잘 나오시는 분들이 다 모여 앉아 있으면, 마음이 안심이 되고, 잘 나오시던 분들이 빠져 있고, 평소 주일보다 수가 적으면, 괜히 마음이 무겁고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아마 목회자들이 느끼는 일반적인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이런 마음 가지는 것이, 비단 목회자들만의 마음이겠습니까?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멘!!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그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시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많이 하고, 또 귀한 은사로 교회를 섬겨가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 중에 하나이겠습니다만,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째든 둥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에 보세요.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3천명이나 더 했다고 했습니다.  
또 47절에도 보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날마다 더 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왜 이런 숫자의 표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이런 숫자의 증가에 대해 강조하며,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숫자의 증가가,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어떤 분은 교회의 부흥을 이야기 할 때, 숫자적인 양적 부흥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면서, 질적 부흥을 강조하시는데, 질적 부흥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결국 양적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질 좋은 신앙인들을 제자 훈련을 통해 양산해 나갑니까?   결국 이 분들을 통해, 교회 안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하려는 방편인 것입니다.  

주님이 열 두 제자라고 하는, 신앙의 질이 좋은 사람들을, 제자훈련을 통해 양산해 내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서, 또 자신과 같은 제자를 삼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41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할렐루야!!  그 삼천 명의 사람들, 그들이 누구였다고 했습니까?  
제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무엇을 증명하는 것입니까?  
제자는 전도를 해도, 또 다른 제자들을 전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질이 좋은 성도들은, 전도를 해도, 마찬가지로 자신과 같은 질이 좋은 성도들을 전도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지상 제일의 명령인,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는 이 명령은, 단순히 전도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 이전에, 전도하러 나가기 전에, 너희가 먼저, 제자와 같은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는,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원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결국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입니다.  비실비실하고 힘없는  씨앗을 심었는데, 그 속에서 힘 있는 줄기나 열매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원리도 그러하다는 거지요.  그래서 현재의 내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신앙의 크기만큼, 교회는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신앙의 수준만큼, 교회는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이, 곧 우리 교회의 변화나 성장과, 직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세요.  초대 교회의 부흥의 역사는, 비단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이 전담한 역사가 아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사도들의 역량이 크겠지요.  하지만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의 힘만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사도들과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교회 부흥의 큰 역할을 감당해 나갔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47절의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날마다 더 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의 성도들, 사도 베드로와 같이, 한 번에 삼천 명씩 전도하는 역사는 못 일으켜도,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래서 구원받은 영혼들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데려 오는데, 그 사람들이 모이니까,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는 거지요.   

사도들과 성도들이 정말 하나가 되어서, 하나의 비전을 놓고, 어떤 비전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비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켜 나가고자 하는 비전, 이런 거룩한 비전을 놓고, 사도들과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복음 전파 사역에 힘쓰면서,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흥하는 교회로 만들어 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롬 8 : 28절에 나와 있는 대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의 뜻으로 합력하는 교회, 또 성도들과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합력하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교회, 이런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요즘 교회 성장을 이야기 할 때, 자주 쓰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건강한 교회” 라는 용어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 라는 용어입니다.   이 두 가지 용어를 합하면 뭐가 됩니까?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건강한 교회” 라는 말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바로 이런,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건강한 교회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건강치 못한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좀처럼 합력하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목회자의 능력이나, 성도들 개개인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능력이, 한데 모아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모래알과 같습니다.   쥐면 주루룩 밑으로 빠져 버립니다.   한데 모아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으로, 무슨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건축을 할 때 모래가 주 재료이지만, 그 모레를 그냥 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모레를 시멘트와 섞어야 하고, 또 그것에 물을 넣어 으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거칠 때, 비로소 모래가 훌륭한 건축 재료로 탄생되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재료로 건축을 할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고,   오랜 세월이 가도 무너지지 않고, 든든하게 세워져 있는 훌륭한 건축물이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장 원리도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그래서 성도들의 합력이 필요하고, 성도들의 동참이 필요한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합력과 동참, 또 성도들과 성도들 간에 서로 합력하여 노력하는 교회가, 바로 건강한 교회이고, 결국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아름다운 교회로 거듭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건강한 교회, 이런 교회로의 회복이, 오늘 우리 성천교회의, 아니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의, 지상 대 과업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교회 안의 성도들도,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의 변화가 없는 한, 교회의 부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서로 간의 마음이 하나 되어진다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줄 압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이나   주장이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어디로 간다고 했습니까?   산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무슨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거기서 무슨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배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강으로, 바다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강이나 바다가 아닌, 산에 올라가 있으면, 어떡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그냥 그대로 방치해 두면, 세상 사람들에게 보기 싫은 흉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세상을 향해 힘을 잃고, 영향력을 잃은 교회가 되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우리 성천 교회가, 더 나아가 이 땅에 세워진 모든 한국 교회들이 해야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산에 올라가 있는 구원의 방주를, 다시금 땅으로 내려놓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를 다시금 강으로 띄어 보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  마땅히 가야할 곳, 강을 넘어 바다를 향해 나아가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역사를 일으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어떡해서든지 교회는, 뜻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이지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반드시 이런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는가?  그들도 오늘 우리와 별단 다를 것이 없는 교회 구성원을 두고 있었지만, 어떻게 이런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건강한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었을까?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을, 세 가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은혜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사도의 가르침을 잘 받는 신앙을 가졌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42절 초반부에 보세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 이것은 교회  부흥의 요소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것이 누구를 통해 나타나겠습니까?   교회 앞에 세워 주신, 목회자들 아니겠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세워 주신 모세를 통해 이끄셨습니다.  그 이후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사사들이나, 제사장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게 했습니다.  또 신약시대에서는, 주님이 친히 세워 주신 제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해, 교회의 성도들을 이끌어 가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과,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의 성도들을 이끄시는 방법이, 오늘날 현대에 있어서는, 과연 누구를 통해 나타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앞에 세워주신,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목회자들 아니겠습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누구를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교회 가운데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 개개인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시겠습니까?   성도들 개개인에게 하나님이 교회를 향한 비전과 방향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가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 친히 말씀하신 내용이 없다는 겁니다.   만인제사장주의를 지향하는 현대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원에 대한 개인 속죄자로서의 의미이지, 천주교와 같이 사제를 통해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는다는 의미이지, 모든 성도들이 다 사도이고, 목회자란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세시대 때에는, 교회의 사제들이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권한까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비성경적이었기에,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만인제사장주의를 주장하며, 이러한 폐단을 깨뜨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교회는 이상하게도,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도이고, 목회자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평신도교회이지요.   윗치만 리나, 위트리스 리와 같은 목사들이 무교회주의를 주장하면서 생겨난 교회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교회가, 강남에 있는 새길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우리나라에도 수백 군데가 넘습니다.  

그 교회에는 담임목사도 없고, 부교역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동등한 평신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도 돌아가면서 합니다.  설교라기보다는 간증이요,   자기가 성경 묵상하면서 깨달은 내용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아주 은혜스러운 교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이나, 그들이 설교하는 내용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정치적인 얘기, 시사적인 얘기, 이라크 파병이 옳으니, 촛불집회가 어쩌니, 이런 세상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한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길 교회 사무국장이란 사람이, 한 신문에 인터뷰 기사를 실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 구원관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것도,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것도 아니고, 초대교회의 열정과 필요에 의해 도입된 교리이므로, 현대 사회에서는 반드시 재해석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계속된 신학강좌를 통해 기독교의 새길을 모색하고, 불교와 이슬람 등의 강좌를 개설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증산도 교수까지 초청해, 주일 예배 설교를 대신해 듣고 있다는 겁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평신도 교회의 실체입니다.  물론 처음에 이들이 이렇게 변질되어갈 것을 목적으로, 이런 교회의 모임을 만들었던 것은 아닌 줄 압니다.   처음에야 목적이 순수했겠지요.  기존 교회의 세속화 되고, 부패된 모습에 염증을 느끼고, 순수복음이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열망이 강했을 줄 압니다.   
그래서 삼삼오오 모여서 교회가 형성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대로, 순수복음이 증거 되고 있습니까?  
오히려 더 변질된 복음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 참여했던 멤버들 가운데, 이런 잘못되어진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며 제동을 걸고, 제재를 했지만 어떻습니까?  받아드려지질 않고, 오히려 기존 교회의 모습을 답습한 이단아로 인식되어 떠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평신도교회의 모습은, 거의가 이단에 가깝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제가 평신도교회의 폐단에 대해 이처럼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운 영적지도자가 없는 교회의 결국이,   목회자가 없는 교회의 결국이 이러하다는 겁니다.  
물론 거의 모든 교회는 정통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 교회 안에 세워진 영적 지도자들, 목회자들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교회라고 한다면, 겉으로 이런 이단성이 들어나지는 않을지라도, 성도들 개개인 신앙에, 이런 이상한 신학사상들이 침투해 들어갈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목회자의 비전과, 성도들의 생각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엇박자로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협화음이 생기고, 불화한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 때문에, 늘 정체되고, 발전이 없는   교회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부흥과는 거리가 먼 교회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성경공부를 배웠다는 의미이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단순히 성경적인 지식을 전수받기 위해 사도들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는, 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성경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생활 전반을, 사도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42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이 말씀의 구성을 잘 보세요. 여러 가지 상황이 죽 연속적으로 열거되어져 있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전제가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 분명한 전제가 무엇입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전제되어진 가운데,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다시 말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들을, 사도들의 지도하에 이루어나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존재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43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초대교회 안에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병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또 가난한 자들이 부요하게  되어지고, 또 성도들의 간절한 소망들이 지체 없이 이루어지는, 축복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보세요.  이런 놀라운 역사들이, 누구로 인하여 나타났다는 것입니까?  따라 합시다.  “사도들로 인하여”  “사도들로 인하여”   믿습니까?   
여러분, 성도들이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이냐?   교회 앞에 세워 주신 담임목사님의 말에 순종하고, 또 교회 앞에 세워진 주의 종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니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런 고리타분하고, 권위적인 것을 가르치나?”   이렇게 따지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원리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주의 종의 말에 순종해서 복을 받은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사르밧 과부를 보세요.  그 당시 세워진 주의 종이 누구입니까?   엘리야 아닙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지요.  

그런데 그가 사르밧 과부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마지막 남은 떡을 내게 달라.” 사실 이 말이 무슨 영적인 가르침의 말입니까?  그가 설교하면서,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요청한 내용도 아닙니다.  영적인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석에서 나온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사르밧 과부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엘리야의 말 그대로 순종했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정서상으로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순종한 그 사르밧 과부를 축복해 주셨다는 겁니다.  
가뭄이 끝나도록 기름병에 기름이 다하지 아니하고,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축복해 주셨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하물며, 오늘날 주의 종들이 공식적인 강단에서 비전을 선포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때, 그것을 순종하고 따르는 성도들을, 하나님이 어찌  축복해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주의 종들의 신앙적 권면에 따르며, 자기주장과 고집을 꺾고, 돌이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성도들을 어찌 축복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하늘 문을 열고서라도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기어코 라도 축복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보세요.  목회자 중심으로, 온 성도들이 하나로 모여드는 교회치고 부흥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대형교회를 이룰 수 있을 만큼의 큰 부흥은 아니더라도, 다른 교회들이 부러워할 만큼 아름답게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성천교회도, 지금보다 더 이런 귀한 신앙 나타냄으로 다른 교회의 부러움을 사며, 초대교회와 같이 날마다 부흥하며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부흥하는 교회를 이루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특징이 무엇이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교회에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6절 초반 절에 보세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이들이 이처럼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였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하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날마다 모여 예배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생명과 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제가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아닙니다.  
실제가 그러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예배하는 일이 쉬웠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카타콤의 동굴이 왜 생기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로마 황제의 핍박을 피해, 그리스도인들이 지하로 숨어 들어가면서   생기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그 당시에 공개적으로 예배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그들의 예배는 목숨을 건 예배였다는 겁니다.    잡혀 죽을지언정, 예배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사각오의 순교 정신을 가지고 드렸던 예배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목숨을 건 예배를 드렸던  초대교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교회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속에, 날마다 부흥하며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지키시면, 로마 황제가 아니라, 그 보다 센 권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그 존재가 사단이라 할지라도, 결코 해할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기사와 표적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교회가 보존되어지는 가운데,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는 것, 이것이 가장 큰 표적이요, 기사인 줄 믿습니다.   이것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46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런 지키심과 보호하심의 은혜는, 교회 안에서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들의 가정에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들은 가정에서도, 평안한 가운데 기쁨으로   생활할 수 있었고, 또 순전한 마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떡을 떼며 가족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부흥은 곧 가정과 사업장의 부흥이며, 교회의  안정과 평안은, 곧 가정의 안정과 평안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교회와 가정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인 것입니다.  은혜롭게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들을 보세요.  하나같이 그 교회 성도들도 복을 받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체험을 통해 깨닫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가정보다는, 오히려 교회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더 더욱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우선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그들이 가장 먼저 신경을 쓰는   부분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곧 그들에게 있어 은혜의 통로이요, 축복의 통로인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깨닫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자연히 예배가 활성화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일예배 때마다 자리가 차고 넘칩니다.   예배 중에 메인이 무엇입니까?   주일예배 아닙니까?   그러니 주일예배를 가장 귀하게 여기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일예배만큼은 안 빠지지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은혜와 축복을 경험한 사람들이, 또 다른 예배인들 빠지겠습니까?  그래서 수요예배도 차고 넘치게 되고......   아멘 안 하지요?   
금요기도회도 차고 넘치게 되고...  아멘!!  어쨌든 교회가 공적으로 정해놓은 예배 시간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예배 때마다 성도들이 차고 넘치는 교회를 바라보실 때,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시겠습니까?   기뻐하며 흐뭇해하지 않겠습니까?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고 했는데, 기존의 성도들도  다 자신의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또 전도의 열심을 내어 강권하여 데려다가 성전의 자리를 또 채우고 있으니, 어찌 그 교회를 기뻐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같이, 그런 교회를 향해 사람들을 몰아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누가 더해 주셨다?  
주께서, 하나님께서 초대교회를 부흥케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초대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이냐?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예배의 사모함과, 열정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늘 우리 성천교회도, 모든 성도들이 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예배를 사모하고, 또 우리 주변에  놀랍게 부흥하며 복을 받는 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예배를 향한 열정이 넘쳐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같이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속에서, 교회도 날마다 부흥하게 되어지고, 또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의 가정도 평안의 복을 누리고, 근심 없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부흥하는 교회를 이루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특징이 무엇이냐?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2절 말미에 보세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어떠했습니까?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전혀 라는 말은,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기우렸다는 말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도를 해도,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내일 일을 염려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자신의 삶을 염려하며 기도했겠습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기도한 줄로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언제나 영적 긴장감을 잃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는데, 사단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그들은 더욱 더 영적으로 무장해 있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시로 기도하게 되었고,  또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전혀 기도에 힘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기도로 무장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신앙생활 하는 교회, 어찌 부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령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두루 운행하시면서, 거하실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떤 교회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성령을 초청하는 교회, 다시 말해, 뜨겁게 주의 이름 부르며,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를, 우선으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 성령이 권능을 행하시고, 그 교회 성도들의 영성을 더욱 더 뜨겁게 일으켜 세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그런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뜨거운 교회에는, 이처럼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냉랭한 교회는 어떻습니까?  있던 사람도 떠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심 있는 성도들, 축복 받은 성도들, 이런 성도들을 냉랭한 교회에서 하나님이 빼내 가십니다.  그 분들을 어디로 옮기십니까?   뜨거운 교회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전혀 기도에 힘쓰며, 무시로 기도하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그들을 옮기신다는 겁니다.   무엇입니까?  촛대를 옮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참으로 두려운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시는 것은, 그 동안 교회 안에 베풀었던 모든 은혜,    모든 축복, 모든 능력, 다 옮기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말라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생이 곤고하고 피곤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주 다 거둬 가버리시는 것은 아니지요. 
언제나 그루터기는 남겨 두십니다.   새롭게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가 회복되기까지 얼마의 세월이 흐르겠습니까?  그 세월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그런 메마른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징계를 거두시고, 다시금 은혜의 손길을 펼치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이도 사후약방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기도하면서,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인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떠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의 삶에 언제나 기쁨이 넘쳤습니다.   또 그들이 섬기는 교회는 날마다 부흥하며 성장했습니다.   또 주변에 아름다운 소문이 나 칭찬 듣는 교회가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며, 영광 받으시는 교회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교회, 어떤 교회가 되어져야겠습니까?   이웃에 있는 성광교회입니까?   아니면 저 위에 있는 남문교회입니까?   물론 이들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어느 교회보다도, 우리 성천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입니까?   여러분은 성천교회의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교회가, 성천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교회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교회를 위해, 기를 쓰고라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마음을 합하여 힘써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고,   또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마음을 합하여 힘써 예배하는 성도들 되시고,  무엇보다도 교회 앞에 세워 주신 주의 종들의 말에, 힘써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 주셔서, 초대교회와 같이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놀랍게 부홍하며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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