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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고전 10: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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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고전 10:14~22)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교적인 조상숭배 사상이 판을 치고 있는 사회입니다.
부모를 생전에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돌아가시고 난 후에 어떤 묏자리에 묻어야 자손들이 복을 받고 어떤 식으로 제사를 지내야 조상의 혼들이 자기네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인지에 신경을 쓰는, 실로 이기적이요 불효막심한 일을 효도입네 하고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한심스러운 행위는 선친의 묘를 무슨 명당이라는 자리에 이장하는 바람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하는 사람까지 나오는 바람에 더욱 부채질이 되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까지도 점쟁이를 찾아가서 물어 보고 이제는 한술 더 떠서 멀쩡한 자기 부모의 무덤까지 파 뒤집고 있으니 그런 나라의 국민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이렇듯이 조상숭배는 우리나라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아직까지 현실적으로 보고 겪게 되는 대표적인 우상숭배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가족 중에 혼자만 기독신자인 경우에 부모의 상을 치르게 된다든지 이제 곧 닥쳐올 추석 때처럼 제사를 지내게 될 경우에는 참으로 낭패스러운 상황에 맞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그런 우상숭배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에는 당시 예닐곱 개의 우상 신전들이 있었으며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 행위가 만연했습니다.
자연히 고린도교회 교인들 역시, 본인은 결코 우상숭배자가 아닐지라도, 어쩌다 보면 직접 간접적으로 우상숭배의 현장과 접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고린도라는 사회에 섞여 사노라면, 마치 우리나라 사회에서 조상숭배가 그렇듯이, 피치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냥 일상적인 식사 초대를 받아 갔는데 우상 제물이 차려져 있을 수도 있었고, 무슨 공공행사에 참석했는데 바로 거기서 우상숭배 예식이 벌어지곤 했던 곳이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살고 있던 사회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들은 그처럼 현실적으로 가깝게 당면해 있는 우상숭배 행위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은 우상숭배 행위에 대한 기독신자의 대응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상숭배는 무조건 절대불가한 것인 줄로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14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부르는 말, “내 사랑하는 자들아”(my beloved)라는 말은 평상시에 어떤 사람을 부를 때에는 잘 쓰이지 않던 드문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이 이런 특별한 말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호칭하고 있는 것은, 그가 이제부터 그들에게 아주 엄한 권면을 내리면서도 또한 그들을 얼마나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의 첫 마디는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는 단도직입적인 명령이었습니다.
  
“피하라”는 말은 간단히 말해서 우상숭배 행위가 일어나는 곳에는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치 더러운 것을 피하듯이 우상숭배는 무조건 피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고 할 때에도 똑같은 어투의 강력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상숭배는 영적 음행이므로 둘 다 반드시 피해야만 할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라는 말은, ‘너희들이 말 좀 알아들을 수 있는 영적 지각이 있는 사람들인 줄 알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니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제발 잘 판단해 보아라.’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9절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꽤 영적 지혜가 있는 자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지혜 있는 신자라면 무엇보다도 우상숭배 같은 기본적인 신앙문제에 대해서는 당연히 정확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숭배 문제에서조차 긴가민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좀 더 복잡한 교리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상숭배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무식하면 아니 됩니다.
  
어떤 것이 우상숭배 행위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아무 어려울 이유가 없는, 가장 기초적 지식에 불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이 들어오면 절대로 건너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저 무조건 지켜야 할 상식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어기면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질 뿐인 것입니다.
빨래할 때 쓰는 세제나 섬유유연제의 통에 보면 ‘절대 먹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저 향기가 좋다고 그것을 먹거나 마신다면 뱃속에서 큰 탈이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 사회에서도 정말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야 하는 일’, 무슨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이 ‘무조건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기독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우상숭배 행위가 바로 그와 같은 ‘절대적 금지 사항’입니다.
학습문답 교재에 보면 ‘신자가 된 후에 특별히 금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미신적 행위”라고 해 놓고, 이어지는 괄호 안에 “제사, 택일, 사주팔자, 작명, 토정비결, 궁합 등”이라고 자세히 설명까지 되어 있습니다.
  
즉 그런 것들이 해서는 안 될 우상숭배 행위라는 것쯤은 학습신자 수준에서 완전히 떼어야 하는 기초 상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문답에 가면 “조상제사는 기독신자들에게 가능합니까?”라는 질문이 있고 그 대답은 간단한 두 글자 “불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겠습니까?
‘불가(不可)’, 즉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우상 숭배 행위는 하나님께서 엄금하신 일이다.’ - 이렇게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괜히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라는 조건, ‘어쩔 수 없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니까 쓸데없이 더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제사나 조상숭배 따위의 우상숭배 행위에 참예하면서 기독신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실로 아무 어려울 것도, 곤란할 것도, 애매모호할 것도 없는 문제로서 그 대답은 간단한 한 마디, ‘절대불가’인 줄로만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상숭배는 실상 마귀를 섬기는 행위인 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16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18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축복의 잔”(the cup of blessing)이란 ‘사례(감사)의 잔’(the cup of thanksgiving)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그 이유는, 이 ‘축복’이란 단어가 여기서는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 돌림'의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식사가 끝날 무렵에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손에 들었던 잔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유월절 잔치에서는 보통 세 번째 잔을 그런 ‘축복의 잔’으로 지정했었고, 그 순서가 되면 가장이 일어나서 여러 가지 감사 제목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시며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던 밤에도 바로 그 ‘축복의 잔’을 성찬식의 포도주 잔으로 제정하셨을 가망성이 큽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성찬식을 언급하고 있는 목적은 그 성찬식을 통하여 성도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함’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이 “참예”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로서 ‘교제, 함께 나눔’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독신자들은 성찬식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며 또한 성도들과 진정으로 교제하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찬식은 기독신자들만의 최고 특별교제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예배에서는 주로 찬양, 성경봉독, 기도 등으로 구성된 1부 순서에는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도 아무나 참석할 수 있었지만, 2부 순서인 성찬식에 가서는 오직 세례 받은 교인들만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제물을 함께 먹음으로써 그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과 연합 및 교제하게 된다는 사상은 신약시대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이란 ‘영적 이스라엘’ 즉 교회와 대조해서 쓴 말입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된 자들 역시 제물을 통하여 어떤 ‘참예’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란 말은 신명기 12장 17절과 18절 등에 있듯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자가 그 제물의 일부를 같이 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던 그가 다시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를 회복하게 됨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비교를 통하여 성찬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베풀어 주는 잔치이며 신자가 그 주님과 즐겁게 교제하며 연합하는 자리가 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참예” 즉 ‘연합’ 또는 ‘교제’라는 개념을 바로 다음 절과 연결시켜서, 우상숭배야말로 귀신과 ‘교제’하는 자리임을 일깨워 주려 했습니다. 

계속해서 19절과 20절에 “19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20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 말 번역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라고 약간 애매하게 번역되어 있는 말은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이 정말 뭔가 효력이 있고, 우상이란 것이 그런 제물을 받으면 뭔가 해 줄 수 있는 진짜 힘 있는 존재인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설의법으로서 그 대답이 너무나도 뻔한 질문인 까닭에 대답 자체는 아예 생략되어 있습니다.
즉 ‘물론 우상 제물은 아무 효력 없고 우상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당연한 대답이 19절과 20절 행간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 앞에 절하고 실제로 아무 효과 없는 제사 행위를 한 것이라면, 물론 바보짓은 되겠지만, 적어도 죄는 아니지 않느냐는 논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곧 이어지는 20절 문장 첫 단어가 헬라어 원어에서 'alla'(알라)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 말 성경에 “대저”라고 좀 약한 뉘앙스로 번역된 이 말은, 원래는 ‘그러나’라는 의미를 아주 강력하게 강조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바꾸어서 다시 번역해 보면 “그러나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가 됩니다.
즉 ‘이방인들이 우상 앞에 제사 지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게 하는 제사이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일 아닌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아주 심각한 일이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귀신”은 곧 ‘악신’(evil spirits), 즉 사단이 부리는 마귀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상은 본질적으로는 ‘없는 것’에 불과하지만 마귀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로 마귀가 하는 주된 일 중에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처럼 우상숭배하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처럼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곧 ‘귀신과 교제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어떤 상대방과 음식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곧 그 상대방과 ‘교제’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했듯이, 기독신자가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구약의 유대인들이 화목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했듯이, 우상숭배자들은 그 우상제사를 통하여 바로 귀신과 교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상숭배는 곧 귀신놀음이요 마귀놀음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재차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사람이 생일파티를 할 때에는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 잔치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은 바로 그 식탁을 통하여 각별한 정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조상 앞에 제사상을 차려 놓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자기 부모나 조상과 교제하는 자리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귀신과 교제하는 잔칫상’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미신이나 조상제사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소위 ‘추도예배’라는 것도 결코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 그저 예배의 형식을 빌어서 귀신을 숭배하는 행위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는 이 말도 안 될 말을, 되는 말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천주교가 그러합니다.
천주교는 어디 원주민들을 전도하게 될 때 그들의 소위 토속종교를 인정해 주고 시작합니다.
즉 ‘너희들의 미신 행위를 버리고 참된 신을 찾아야 한다.’라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주민들이 그때까지 섬겨 오던 고유의 신에게 예배하는 것이 곧 궁극적으로는 똑같은 천주를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주교는 사실 전도하기가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또 그런 전도를 못 받을 원주민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위 선교 때문에 지금 라틴 아메리카 같은 곳의 천주교는 완전히 귀신놀음이 된 것입니다.
온 몸에 지폐가 꽂혀 있는 성모 마리아 상이 음란하고 광란스러운 축제에 주역으로 등장하곤 하는 것을 우리가 영화나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행위는 어디까지나 ‘귀신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 앞에 예배하고 제사하는 것은 오직 ‘마귀를 섬기는 행위’일 뿐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깨닫고 기억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가장 노엽게 만드는 악한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끝으로 21절과 22절에 “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22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본문의 결론에 들어가면서 ‘너희가 우상 숭배와 하나님 숭배를 동시에 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합니다.
그 대답은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입니다.
즉 'no compromise', ‘그 어떤 타협이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주의 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잔치의 초대주인(host)이 되셔서 당신의 잔을 돌리시는 자리입니다.
그 주님께서 돌리시는 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도록 이끄는 복스러운 잔입니다.
  
반면에 “귀신의 상”은 귀신이 초대주인이 되어 귀신의 잔을 돌리는 자리입니다.
그 마귀가 돌리는 잔은 불신앙과 죄악을 마시게 하는 잔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참된 신자라면, 절대로 그 두 잔을 동시에 마실 수는 없습니다.
즉 ‘귀신숭배도 필요하다 싶을 때에는 적당히 하고 동시에 하나님도 열심히 믿고’라는 ‘신앙생활의 절충안’이란 결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자식의 대학입학 때문에 급할 때에는 시험장 입구에 떡이나 엿도 좀 붙여 놓고서 또 교회에 가서 기도도 합니다.
무슨 사업을 시작할 때면 점쟁이한테 가서 부적도 좀 얻어 놓은 후에 또 목사도 불러서 개업예배도 드립니다.
‘둘 다 해 보면 둘 중에 하나는 맞겠지.’라고 귀신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면서 제 딴에는 머리를 굴리고 잔꾀를 부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오산도 보통 큰 오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양다리 걸치기’하는 행위야말로 바로 진짜 신이신 하나님을 가장 노엽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장 21과 22절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붙게 하는도다”라고 하나님께서는 실로 무섭게 저주하고 계십니다.
계속되는 구절들에서는 그런 우상숭배자들이 당할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끝없이 열거됩니다.

인간 사회에서도 배우자나 연인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거나 관계를 맺기까지 하면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원래가 이 ‘사랑’이라는 관계는 철저하게 ‘배타적인’ 관계, 즉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그 어떤 제3자도 결코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관계이며, 그런 까닭에 그런 관계에 대한 신의를 깨뜨리는 일이 일어나면 그 어느 누구라도 질투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기독신자와 하나님의 관계도 바로 그처럼 ‘철저하게 배타적이고 상호독점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그런데도 우리가 우상 숭배를 해서 감히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하나님의 심기를 건드리면 아니 될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실족하고 좀 불충해도 그저 한량없는 자비와 인애로써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당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과 당신을 나란히 두는 신성모독의 죄악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추호의 여지도 없는 분이 바로 ‘질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화나시게 하면 누가 손해겠습니까?
잠자는 사자를 깨우면 어느 쪽이 손해입니까?
사자의 신경을 건드린 약한 짐승 쪽이 죽음을 당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화나시게 하면 그처럼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된 사람 쪽에 당연히 치명적인 손해가 돌아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고 반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상숭배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중하게 벌주고야 마시는, 당신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노여워하시는 행위인 줄을 한시도 잊지 아니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조상 제사는 기독신자들에게 가능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가’라는 간단한 두 글자이지만, 바로 이 두 글자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문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 일단 이 우상숭배 문제가 당장 그들에게 제일착으로 다가온 고비요 넘어야 할 고개요 아니 태산준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그 신앙의 선조들은 ‘불가’라는 이 짧은 명령 하나를 제대로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서 집안의 제삿날이 오면 하루 종일 밥을 굶었습니다.
 
 ‘부모도 모르는 천하의 불효자식’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었습니다.
민족의 정기가 담긴 미풍양속을 해치는 ‘양놈 종교’라는 비난을 뒤집어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 섬기는 것’과 ‘귀신 섬기는 것’을 ‘겸하여’ 행하지는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예수 믿기 시작할 때부터 조상숭배라는 난관을 이겨내면서 단련된 신앙이었으니까, 결국 일제의 신사참배도 이겨낸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인가 우상숭배인가?’ - 많은 목사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지혜 있는 목사와 성도’에게는 아무 복잡할 것도, 무어 구차하게 변명할 필요도 전혀 없는, 지극히 쉽고 간단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사참배란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무조건 ‘절대불가’한 우상숭배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제를 이겼으니까 그 탄탄히 단련된 신앙으로 공산주의라는 사상 최악의 무신론의 연이은 침략 앞에서도 또 한 번 대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신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총에 맞아 죽을 것인가?’ - 많은 교인들이 이런 두려운 양자택일을 실제로 맞이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판단할 줄 아는’ 참된 성도들은 그 선택에 있어서 아무 망설일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김일성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그들은 진짜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엄명, 십계명 제1, 2계명을 순교의 자리에 갈 때까지 지켰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조상들을 바로 아버지, 할아버지 대에 모시고 산다는 오늘의 우리들이 무슨 부모의 장례식 문제 따위에서 걸려 넘어지고 추석 때 제사 문제가 갈등이 된다면,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소리이겠습니까?

원로목사님께서 당회장으로 계시던 때에, 우리교회 교인이었던 어느 할머니께서 소천하셔서 장례식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고인의 불신 자녀들이 자기 어머니 장례식을 목사 없이 자기네들 식으로 하겠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고인이 신자였으니 우리 부목사님들은 당연히 교회가 주관해서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했었는데, 그 때문에 유족들과 실랑이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 소식을 들은 원로목사님께서는 “장례식이야 어떻게 치르든지 간에 예수 믿고 죽은 사람이 천당 가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고 예수님께서도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으니 시신 가지고 시비할 것 없이 그냥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하게 나둬라.”고 하셨습니다.

생전에 한 가지라도 더 부모를 봉양하지 아니하고, 돌아가신 후에 그 부모가 밥 한 술 입에 댈 수 없는 제사상을 차려놓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효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섬기는’ 사망의 잔치일 뿐입니다.
생전에 한 번이라도 더 부모를 찾아뵙지 않고, 돌아가신 후에 무슨 명절이니 기일이니 하면서 그 무덤 앞에 꼬박꼬박 찾아가서 절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미풍양속이라는 소리입니까?
그런 것들은 다 ‘이 시체는 내 것이다.’라고 ‘죽은 송장에 대한 권리’를 자랑하는, ‘살았으니 이미 죽은 자’들의 마귀놀음일 뿐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나 무슨 형태로든지 간에 ‘우상숭배 행위는 절대불가’합니다.
그것은 사단이 부리는 ‘마귀를 섬기는 행위’요, ‘하나님을 가장 노엽게 만드는 극악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 불신사회 풍조와 자주 맞부딪히게 되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섬기는 일에 우상숭배의 불순물을 조금이라도 섞어 넣지 않는, 개혁주의 신앙의 깨끗한 색깔을 보존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의 순수한 정절을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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