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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마 16:24~25, 롬 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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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마 16:24~25, 롬 14:7~9)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우리 교회 함광호 장로님의 맏따님인 함규정 박사가 새로운 책 하나를 번역했습니다. 예일대학 교수들인 데이비드 R. 카루소(David R. Caruso)와 피터 샐러비(Peter Salovey)박사가 지은 “하트 스토밍”(Heart Storming)이라는 책입니다. 

우리는 ‘브레인 스토밍’(Brain Storming)이라는 말을 익히 압니다. 어떤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려고 할 때 여러 사람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모으는 방법을 ‘브레인 스토밍’이라고 합니다. ‘하트 스토밍’이라는 말은 새롭게 등장한 용어인데 ‘효과적인 문제 해결과 목표달성을 위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 내고 활용하도록 하는 전략적 감성 툴, 즉 감성기술’이라고 함규정 박사는 용어풀이를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 이 책을 읽었는데 심리학적 접근이기 때문에 재미도 있으면서 리더십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어서 큰 흥미를 주었습니다. 한번 읽어서는 안 되고 좀 더 공부를 해야 잘 이해될 것 같습니다.

감성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는 4가지 스킬을 말하는데 첫째가 감정인식이요, 둘째가 감성의 활용, 셋째 감정 이해, 그리고 넷째가 감정 관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보다 깊은 심리학적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도 감성스킬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자기 관리와 자기 성장과 발전에 이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앞으로 좋은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신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연구해 왔습니다. 신앙이 너무 감정에 치우쳐도 안 되고, 너무 이성적으로 따지기만 해도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이 감리교 신앙의 네 가지 표준으로 성경, 전통, 체험, 그리고 이성으로 세운 것도 바로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통해서만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체험은 반드시 이성의 뒷받침이 있어야 만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험이 없는 이성은 삭막할 뿐입니다. 

사람은 먼저 감성의 느낌(feeling)이 옵니다. 그 느낌이 깨달음(awakening)을 줍니다. 깨닫게 되면 곧 실행(doing)에 옮겨지는 것이 인간의 결단과 행동과정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좋은 느낌이 다가왔는데도(feeling), 깨닫지 못할 때도 많고(awakening), 깨달았으면서도 용기가 없거나 나태함으로 미루다가 좋은 기회를 놓치곤 합니다. 때문에 ‘감성이 다가올 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발전과 퇴보, 성공과 실패의 분깃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느끼고 깨달았을 때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복된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삶(great life)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감성(feeling)에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감성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셔서 슬픈 일, 기쁜 일, 좋은 일, 나쁜 일을 만날 때 맨 먼저 감성이 작용을 합니다. 슬픈 일을 만나면 눈물이 나오고, 기쁜 일을 만나면 웃음이 나오고, 나쁜 일을 만나면 기분이 나쁘고, 좋은 일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사람은 이런 기분을 갖고 행동을 합니다(Doing it with feeling). 한국인의 감성을 빗대어서 기분이 나쁘면 천국도 안가고, 기분이 좋으면 지옥에도 뛰어든다고 합니다. 감성이 깨달음을 주고, 그 깨달음이 행동을 유발하여 신앙의 성장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감성을 통해서 깨달음이 왔는데도 행동하지 않으면 자칫 용기가 없는 비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poor life)이 되고 맙니다. 신앙도 제자리걸음만 합니다. 큰일을 해내지 못합니다.

지난 2006년 10월 2일, 우유배달을 하던 32세의 젊은 남자가 총을 들고 학교 교실로 난입했습니다. 자신의 인생과 사회에 불만을 품은 로버트(Charles Carl Roberts)라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이려고 학교 교실로 난입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교실 안에는 7-13세 연령에 속한 10명의 여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열세 살 먹은 학생 하나가 살인마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를 먼저 쏘라!”(Shoot me first)고 소리쳤습니다. 마리안 휘셔(Marian Fisher)라는 아이입니다. 그 반에서는 제일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살인마는 그녀를 쏘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명의 학생들을 쏜 다음 스스로 자기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습니다. 급히 도망하여 목숨을 구한 다섯 명의 학생 중 하나가 마리안의 관 앞에서 증언했습니다. 살인마가 총을 들고 교실에 뛰어들자 마리안은 순간적으로 “내가 앞을 막을 테니 너희들은 빨리 뒷문으로 도망쳐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학생들은 앞뒤 생각 없이 뛰어나갔다는 것입니다. 마리안이란 소녀가 살인마의 앞을 가로 막으며 시간을 벌어주었기에 다섯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마리안 휘셔가 총에 맞아 쓰러지자 그의 동생 바비(Barbie)가 “다음에는 나를 쏘라!”(Shoot me second!)며 그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 바람에 무사히 교실을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며 학생들은 울었습니다. 다행히 동생에게 쏜 총탄이 빗나가서 생명은 구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언론들과 온 세계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온 인류는 마리안 휘셔에게 생명의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마리안은 위대한 인생(great life)을 살았습니다. 메소나이트교회에서 자란 그 아이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갔습니다. 이때쯤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가는 곳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나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은 매우 흡족해 하시며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셨습니다. 머지않아 저 많은 군중들이 나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결국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합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베드로의 이 간언은 결코 나쁜 말이 아니었는데도 예수님은 벌컥 화를 내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심각한 유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 노스케롤라이나의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노스케롤라이나 덜험(Durham)에는 명문 듀크대학교(Duke University)가 있습니다. 감리교대학인 이 학교는 대학농구팀으로 유명합니다. 여러 번 우승을 한 명문대학입니다. 그 대학의 응원 심볼이 “푸른 악마”(Blue Devils)입니다. 

어느 날 농구시합장에서 응원을 했던 듀크대학생이 ‘푸른 악마 옷’을 입은 채로 저녁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흉측하고 무섭게 디자인된 응원복을 입었다는 것을 모른 채 이 학생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교인들은 너무 놀랬습니다. 악마가 사람을 납치하러 들어온 줄 알았습니다. 예배를 보던 교인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중의 한 부인이 손을 들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다가 쓰러졌습니다. 이 대학생은 그 부인을 도와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부들부들 떨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다가오지 마라! 악마야! 더 이상 내게 가까이 오지 마라. 나는 25년 동안 이 교회에 다녔지만 나는 언제나 네 편에 서있었다는 것을 너는 알지 않느냐?”(Stop! Devil. Don't you come any farther. I want you to know that I 
have been a member of this church for 25 years… but I've been on your side all the time).

오늘 여러분께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오래 이 교회에 다닌 분들께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있었습니까? 예수님 편에 있었습니까? 악마 편에 서있었습니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만류하는 간언을 들은 예수님을 베드로가 악마 편에 서있다고 꾸짖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여기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사탄은 언제나 나쁜 사람들을 이용해서 나쁜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만을 이용해서 하나님과 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을 이용하여 사탄은 나쁜 일을 하는 것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사탄은 나쁜 사람만 붙잡고 일하니 나와는 관계없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 3:15-16에서도 주님의 단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신앙이 너무 이지적으로 가면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로 머물러 있게 마련입니다. 너무 이성적으로 따지다보면 기회를 놓치거나, 이기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감성이 열릴 때 결단하면 더 큰 믿음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친구의 아내가 갑자기 사고로 죽었습니다. 비탄에 젖어 아내의 시신을 붙들고 울부짖는 친구를 바라보니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감성은 그때 함께 울도록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만일 그때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며 눈물은 몇 리터를 흘려야 되며, 몇 분간 울어야 친구가 위로를 받을까 따져본다면 그는 차가운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감성을 먼저 작용하도록 창조하신 이유는 감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감성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때 즉시 깨닫고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결단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감성의 결단이 동반되어져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은 희생하라는 말입니다. 남을 위해 ‘나의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말은 내 것을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희생한다 해서 영원히 손해 보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희생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단계를 높여야만 믿을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단계까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희생은 희생으로 끝나는 것으로만 믿기 때문에 더 큰일을 못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2차 대전 때 히틀러의 나치 군대는 미사일을 만들어 런던하늘을 불과 폭음으로 뒤덮었습니다. 온 시내가 나치의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때 처칠 수상은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나치를 이기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피와 땀과 눈물을 주어야 합니다”(to give blood, sweat and tears). 백성들에게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호소한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피가 마침내 영국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희생할 때 성장합니다. 나를 바칠 때 신비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내놓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면 죽음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흘 뒤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감성적으로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욱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용기를 갖고 예수님을 위하여 나의 십자가를 지는 희생에 다가가야 합니다.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라는 영화중에서 눈물을 머금으며 감동받은 장면을 늘 기억합니다. 오스카 쉰들러는 체코의 사업가였습니다.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 땅에 공장을 세워 군납용 식기 등 식당재료를 납품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그가 폴란드에 공장을 세운 이유는 수용된 유대인들을 싼값에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쉰들러는 독일 나치당이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에게 동정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공장을 나치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피난처로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가스탱크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을 독일 병사들에게 밑돈을 주고 공장 인부로 데려와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합니다. 무려 1100명의 유대인들을 가스탱크의 죽음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목숨을 구한 유대인들이 그를 찾아가서 감사를 표합니다. 그때 쉰들러는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하거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 손가락에 끼어있는 금가락지를 빼들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이 금가락지로 두 사람의 생명을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구두요?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 나의 코트요? 두 사람은 더 살릴 수 있 었습니다. 이 소매 단추요? 세 명은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My God, I could give bought back two more people with this ring. These shoes? 
One more person. My coat? Two more people. These cufflinks? Three more people.)

그는 거기서서 더 살리지 못한 안타까움에 후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좀 더 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후회의 장면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좀 더 할 수 있었잖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너 있는 곳에서 좀 더 할 수 있었지 않았느냐?”

어느 기독도가 후회합니다. 용기 있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산도 오르고 들도 지나고 강도 건넙니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다. 그는 조금만 잘라도 십자가의 모양에는 별 흠이 없을 듯 했습니다. 목공소를 지날 때 조금만 잘라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가벼웠습니다.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가는데 너무 지쳐 십자가를 지고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무를 자르는 나무꾼에게 부탁하여 조금만 더 잘랐습니다. 이렇게 몇 번 자르고 나니 지고 가기가 쉬웠습니다. 드디어 천국 문 앞에 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천국에 들어가려면 큰 낭떠러지를 건너야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내려서 거기에 걸치고 그것을 다리로 삼아 건너오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이 기독도는 얼른 십자가를 내려 낭떠러지 위에 대니 길이가 짧았습니다. 후회하고 슬피 울며 통곡해도 소용이 없었답니다. 핑계가 있을 때마다 잘라낸 십자가가 끝내는 구원의 도구가 되지 못했다는 비유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위해 희생의 길을 걸으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목숨까지 내놓는 희생을 합니까? 이웃이 굶주릴 때, 병들어 신음할 때, 실패하여 낙담할 때 조금만 여러분이 그를 위해 희생한다면? 조금만 돕는다면 예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조금만 더하면 하나님은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남편을 사랑하는 것,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 부모님을 섬기는 일, 형제자매를 돌보는 일,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일, 그것들이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것들이 목숨을 내놓는 상징입니다. 작은 선한 일에 인색한 사람이 어찌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좀 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며 섬기는 일을 위해서라면 조금 더 희생이 되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반드시 상급으로 보상하십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잃으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려주신다는 약속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손해를 계산하고 우리의 손을 오므리거나 뻗었던 사랑의 팔을 거두어 드렸다가 주님께서 오셔서 “좀 더 할 수 있잖았느냐?”는 아쉬운 핀잔을 듣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할 수 있지 않느냐?”(Can you do for me?) 지금 당신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세미한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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