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오늘부터 영원까지 (막 1:21~39)

  • 잡초 잡초
  • 210
  • 0

첨부 1


오늘부터 영원까지 (막 1:21~39)


낙엽은 나에게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나의 시간들을 좀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여러분, 이 시를 들으시는 기분이 어떠십니까? 이 시는 이해인 수녀께서 쓰신 <낙엽>이란 시입니다. 그 분은 요즘 들어 날마다 이 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분은 암으로 투병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남아 있는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낙엽을 이야기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이 시를 읽어드리는 이유는 오늘이 8월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이면 가을을 알리는 9월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소중한 것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담는 그릇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간이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인지, 우리가 시간 속을 걸어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오늘 2008년도 삼분의 이가 지났습니다.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생명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가 살았던 시간의 길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객관적 시간 개념으로부터 주관적 시간 개념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50년, 70년, 이런 것은 객관적 시간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별 의미가 없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짧게 살았어도, 그 시간이 아름다운 의미로 가득하게 채워진 사람이 있습니다.그래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제 주관적 시간 개념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루소는 시계를 던져버리고 <드디어 내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이 몇 시인지, 얼마나 지났는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매 순간 순간 속에서 아름답게 살려고 힘썼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시간 그 해답을 모든 것의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불과 33년을 사셨습니다. 그것도 공적 활동을 하신 것은 겨우 3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을 사셨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열심히 사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마을에서 보내신 어느 하루의 일과를 보여줍니다. 21절부터 살펴 보십시오. 어느 안식일 낮,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침이 끝난 후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귀신들린 사람을 보시고,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23절부터 읽어 보실까요?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그 후에 예수님은 시몬, 즉 베드로의 집에 가셨습니다. 마침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그녀를 치유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기쁨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에게 수종을 들었습니다. 아마 정성어린 저녁 식사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이 상상이 됩니다. 장모가 건강해지니, 베드로의 아내도 기뻐하고, 거기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저녁 식탁이 차려집니다. 하루 종일 피곤했고 시장했는데 이제 모처럼 허리띠를 풀러 놓고 쉴 때가 온 것입니다. 긴장도 풀리고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예수님의 휴식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온 것입니다. 32절 이하를 보십시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보통 사람 같으면 어땠을까요? 하루 종일 수고하고, 모처럼 쉬려고 하는데, 그 시간마저 빼앗으려 하는 사람들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34절을 보면 <예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료 시간을 정해놓고 진료하는 의사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24시간 대기 중에 있는 응급실 의사와도 같은 분입니다. 그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부를 때마다 들으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언제든지, 낮이나 밤이나 응답하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예수님은 그 어떤 시간에도, 그 어떤 사람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어느 안식일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이라고 쉬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더 부지런히 사셨습니다.

여러분, 근면과 열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미국인들이 링컨과 함께 가장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때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라고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겠습니까? 저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늘 새벽 네 시 이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세 시간 정도 더 많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근면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잠언은 개미에게서 근면을 배우라고 말씀합니다.<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여러분, 열심히 사십시오. 주어진 기회를 잃지 마시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게으르면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열심히 사셨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을 다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병자를 다 고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배고픈 사람을 다 먹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 정도만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것도 팔레스틴 이라는 작은 지역 안에서만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고, 죄인을 구원하시던 그 때, 다른 나라, 지구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병들고, 배고픈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다 돌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일을 다 할 것처럼 달려들지 마십시오. 다하려 해도 다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어진 24시간 안에 모든 일을 자신이 다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다 떠맡습니다. 거절을 못합니다. 아니 거절을 하지 않습니다. 일견 좋은 욕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일에 눌려 죽을 지경이 됩니다. 

선거에 나서는 분들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선거 공약을 보면 세상의 모든 걱정거리를 자신이 다 해결하겠다는 식으로 약속합니다. 불과 몇 년 동안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감당하겠습니까? 자신의 한계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 자체가 교만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도 읽어드린 것처럼 <마더 테레사 수녀>도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사랑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한 번에 한 사람씩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24시간을 불가능한 과제들로 채워나가지 않길 원합니다. 그래서 그 일들로 인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세 번째 이야기가 저절로 나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하시지 않으셨다고 할 때,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 하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7장 4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닥치는 대로 다 하신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하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먹이고, 치료하는 것은 일시적 구원이었습니다. 먹어도 곧 다시 배고플 것입니다. 병이 나아도 언젠가는 다시 아플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궁극적 구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궁극적 구원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두 가지를 하셨습니다. 첫째는 천국의 복음을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영생의 나라이다. 그러니 그 나라를 기다려라. 그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나 예수를 믿어야 한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36절 이하를 보십시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무슨 말씀일까요? 그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많이 왔습니다. 아마 전날 저녁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과 소문을 듣도 찾아온 다른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시면 인기가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전도하기 위해 왔다>고 하시면서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시적 치료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위해 하신 일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것은 몰라도 십자가를 반드시 지셔야 함을 아셨습니다. 그 누가 고통의 십자가를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기에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늘 예수님은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살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람의 근본 목적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을 보세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시간에 여러 가지 일이 중복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그러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일을 위해 주일예배를 빼먹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주어진 짧은 인생에서 어차피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새벽을 통해 하루를 세우셨습니다.  

본문 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아멘! 바로 이것입니다. 하루 종일 피곤하셨던 주님, 그 주님께서는 다음 날 늦잠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새벽, 아직 밝기 전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 계셨다면, 새벽에는 하나님 앞에 계셨습니다. 하루 종일 일에 몰두하셨다면, 새벽에는 기도에 몰두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에너지를 쏟아내는 일을 하셨다면, 새벽에는 거룩한 하늘의 에너지를 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날의 바쁜 일정을 핑계삼지 않으셨습니다. 피곤함을 핑계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새벽은 낮을 세우는 기둥이었습니다. 새벽의 기도가 있기에 낮과 저녁의 사역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셨습니다. 그 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묵상하셨습니다. 그랬기에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당신이 온 목적은 사람들의 가려운 데나 긁어주고,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전도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아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새벽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벽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낮과 저녁을 건강하게 살 수 없습니다.새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새기지 않기 때문에 낮과 저녁에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위해 살게 됩니다. 새벽에 능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살다가 쓰러집니다. 

성도 여러분, 새벽의 사람이 되십시오. 새벽기도회를 꼭 지키십시오. 축복의 새벽을 맞으면 기쁨의 낮과 열매 가득한 저녁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새벽 제단이 부흥되길 원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제게 말씀했습니다. <새벽을 주일 낮 예배 시간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면 교회가 부흥됩니다> 그 말씀은 정말 꼭 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새벽을 제일 중요하게 여긴다면 어찌 주일 예배를 소홀히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새벽이 지난 후 다시 낮이 왔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8절 이하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실까요?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이게 예수님의 그 다음 낮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안식일 낮, 그리고 저녁, 그 다음 새벽, 그리고 또 낮,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낮과 저녁과 새벽이 언제나 아름답게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이 세상의 시간이 끝나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모두 참 잘 산 사람으로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되길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