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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완전한데로 나아가라 (히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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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데로 나아가라 (히 6:1~2)


운동경기를 하다보면 놀라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유망주요, 우승후보로 손꼽히던 자가 갑자기 난조를 보이면서 꽁지로 쳐지거나 줄줄이 탈락하는 현상이 그 하나요, 또 다른 하나는 전혀 기대하지도 생각지도 않았던 무명의 선수가 쟁쟁한 선수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우승컵을 거머쥐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프로 야구 선수 가운데 국민 타자로 소문이 난 이승엽 선수가 지난 북경 올림픽에서 한동안의 슬럼프를 딛고 화려하게 재기하는 모습을 전 세계가 목격하였다.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 하더라도 간혹 한 두번의 실수나 어려움으로 슬럼프에 빠져 방황하는 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 위기가 오리혀 기회가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별 볼 일없다고 제쳐놓았던 자가 점점 세월이 지나가면서 유능한 선수로 바뀌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좋은 성적을 내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자가 세월이 가면서 큰 일을 해 내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반면에 남보다 실력도 월등한데다 많은 잠재력까지 지녔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하향곡선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무엇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그 둘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가름할 수가 있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교만해져서 성장을 게을리 한다면 백발백중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비록 가진 것이 부족하고 시원치 않아도 부단히 발버둥치고 피나는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덧 무명의 설움을 벗어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어떤 분은 처음 봤을 때 가진 재주가 너무 많아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크게 실망시키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하고 자책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와는 반대로 ‘영 아닌데’ 라고 제쳐놓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면서 교회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일꾼이 되어 봉사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우리의 신앙생활이 날마다 성장하고 있거나 퇴보하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변화도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신앙은 어느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어느 정도로 성장하고 있는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이라고 한다면 어떤 증거를 내놓을 수 있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잘 믿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앙의 초보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심지어 교회성장의 장애물이 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이다. 왜 우리가 좀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어줍잖은 수준을 맴돌고 있는 것인가? 


주도적이 되라

우리가 초보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의존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이 의존적이라면 그 신앙은 낮은 수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들을 미성숙하다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스스로 자기의 일을 해 나가지 못하고 모든 일을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매사 ‘이거 해 달라’, ‘저거 만들어 달라’, ‘입혀 달라’, 씻겨 달라‘, ‘돈 달라’고 하면서 계속 누군가를 의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사람을 성숙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매사에 무슨 일이든지 주도적으로 해 나가는 사람은 날마다 성장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도적이라는 단어는 ‘스티븐 코비 Steven Covey' 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그는 성공의 첫 번째 원리로 주도적이 되라(Be proactive)는 주문을 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남이 시켜서 하거나 지시해서 하거나 강압에 못 이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을 찾아서 개척해 나가라는 것이다. 남들이 말하고 행동하기 이 전에 스스로 주도권을 쥐고 그 일을 추진해 나갈 때 진정 좋은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도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해 주는 중요한 기준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그의 삶이 의존적이냐 아니면 주도적이냐 하는 것이다. 리더십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남에게 손을 내밀거나 의존하지 않는다. 부득이 남의 도움을 받더라도 자기가 해야 할 일까지 남에게 떠넘기는 졸렬한 짓은 하지 않는다. 우리 신앙인들을 보면 신앙생활을 주도적으로 해나가지를 못하고 늘 남에게 기대려는 사람이 있다. 기도를 하라고 하면 나는 못하니 당신이 대신해 달라고 미뤄놓거나. 자기가 해야 할 일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거나, 자기가 성경을 보고 공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일일이 쫓아다니며 시중을 들어줘야 겨우 따라가는 정도라면 유아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신앙이 성장하려면 주도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시는지 않은가? 의도적으로 매달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일을 찾아서 주도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을 부르시고 사용하신다. 그런 자들에게 지도력을 주셔서 위대한 일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매사 교회일이든, 가정일이든, 회사일이든 내게 맡겨진 임무요 책임이라면 의존적으로가 아니라 주도적으로 감당해 나아가라. 


훈련에 힘쓰라

우리가 성장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훈련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초보단계를 지나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훈련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훈련의 강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고 재수 삼수를 한다 해도 초보단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칼이라는 것도 날카롭게 연마되어야 유용하고 효율적으로 쓰임을 받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잘 훈련되어야 하나님의 손에 능력 있게 쓰임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잘 준비된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맡겨 수행토록 하신다. 훈련이 어렵고 부담스럽다고 해서 요리저리 피해 다니거나 적당히 시간만 때우려 하다가는 성장은커녕 초보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못나고 어설픈 짓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면서 그 때 그 일을 계속했더라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좀더 인내하면서 훈련을 잘 받았더라면 지금쯤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하며 가슴을 치고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 정진했더라면 지금쯤 뭐가 되더라도 되지 않았을까 하며 못낸 아쉬워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처음 시작했던 운동이나 사업을 중도에 그만두지 말고 지금까지 꾸준히 밀고 나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땅을 치며 통곡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잠시 실패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더라도 낙심하는 대신에 좀 더 높은 목표를 향해 삶을 경주해 나갔더라면 지금쯤 보다 의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피아노 하면 안 좋은 추억이 하나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너희들이 앞으로 크면 악기 하나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면서 피아노 선생님을 모셔다가 배우도록 해 주셨다. 그런데 동생이나 형들은 잘 따라가는데 나는 피아노치기가 왜 그렇게 싫은지 도통 취미를 붙이지를 못하였다. 남자가 피아노에 앉아 딩동거리는 것도 썩 좋아 보이지 않고 해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고 연습도 게을리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늘 바이엘 60번인가 그 수준을 넘어보지를 못했다. 지금도 그 60번만 기억이 날뿐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바이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때 힘들고 어려워도 계속 훈련을 받았더라면 지금쯤 피애니스트 pianist 백건우씨나 강동석씨 정도는 되지 못해도 적어도 피아노에 앉아 작곡도 해 보고 찬양도 멋지게 불러보면서 나름대로 우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뒤늦게 아쉬워 해본다.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훈련이란 더없이 중요하다. 운전도 초보수준을 넘어 보다 능숙한 단계로 나아가려면 끊임없이 실전훈련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신앙의 훈련 또한 마찬가지이다. 세월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험이 수준을 올려주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일만 되풀이 한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장에 따른 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이다. 훈련이 없이는 제 아무리 용을 쓴다 해도 그저 초보수준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신앙의 프로가 되려면 계속적인 훈련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분별력을 높이라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늘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른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보적인 사람은 보는 시야가 한정되어 있어 자신이 보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체를 보지를 못하고 부분에 집착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전체를 놓고 그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문제 하나만 가지고 뭐가 잘됐니, 안됐니 하면서 자기주장만 내세우려고 든다.

교회라는 전체적인 숲을 통해서 나무를 볼 줄 알아야 신앙의 바른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 공동체가 발전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발등에 떨어져 있는 문제만 보고 거기에 매달릴 때 우리의 신앙은 단편적이고 독선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초보운전자들이 운전하는 모습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차를 급조작하다가 자칫 대형사고를 부르기도 한다. 시야를 멀리 두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차를 잘 운전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멀리 내다보면서 저 건너편에서. 반대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대비하면서 운전을 한다. 한 눈에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허둥대지를 않는다. 우리의 신앙이 보다 성숙한 단계에 들어서려면 우리의 시야를 좀 더 멀리 높은데 두어야 한다. 부분이 전부인 줄로 알고 거기에 자기 에너지를 쏟아 붓는 자들은 아무리 해도 성장할 수가 없다. 전체를 보면서 부분을 읽을 줄 알아야 더 큰 성장을 도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앙의 초보자들은 보는 눈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지금이 하나님의 때인지 제대로 분변하지를 못한다. 또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인지 판단하지를 못해 엉뚱한 결정을 내리기가 쉽다. 영적 판단력이 흐리면 쉽게 유혹에 말려들게 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행하게도 된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보다 반듯하게 해 나가려면 무엇보다도 영적 분별력 Spiritual Discernment 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대소변조차 제대로 가리지를 못하고 골치 아픈 문제만 일으켜 놓는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있는 대로 퍼질러놓은 다음 혼자 잘하는 것처럼 떠들어 대곤 한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려면 우선 옳고 그름을, 선과 악을,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바른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는 일인가를 잘 깨달아 그 뜻을 이루어 갈 때 신앙은 저절로 성장하는 것이다. 좋은 분별력을 갖추어야 초보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로 단숨에 뛰어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초보의 일을 버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초보단계를 넘어서서 우리가 원하는 성숙한 단계에 올라갈 수 있는가? 1절 말씀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leave the elementary teachings”

여기서 버리라는 말은 폐지시켜라, 무시해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이 동사의 헬라어의 원뜻은 그 버리는 것을 토대로 해서 새로운 성장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어떤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할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버리더라도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쌓아올려야 하는 것이 있다. 신앙도, 학문도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처음 학문의 길에 들어설 때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말의 기본이 되는 철자를 익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소화시킨 다음에는 그것을 과감히 버려야지 버리는 것이 아깝다고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냥 그것이 중요하다고 그것만 붙들고 있어서야 무슨 성장이 있겠는가? 학년이 올라갔는데도 불구하고 내내 철자만 배우고 있으면 실력이 늘래야 늘 수가 없을 것이다. 고도의 학문을 닦기 위해서도 무엇보다도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모든 것이 기초를 토대로 해서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기본이란 잘 익힌 후에는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바둑의 격언 가운데 ‘정석을 안 다음에는 정석을 버려라’ 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바둑의 고수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정석을 잘 알아야 한다. 바둑에도 두는 법이 있고 가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석을 무시하면 실력이 늘지를 않게 된다. 그러나 정석을 다 터득했다고 해서 그 정석만을 고집하다가는 바둑의 대가가 될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정석대로만 하려다가는 변화무쌍하게 벌어지는 반상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에는 정석을 무시하고 임기웅변식으로 대처해야 할 때가 있다.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정석에도 없는 수를 두기도 해야 하고 정석에 반하는 수를 둘 수도 있어야 한다. 고지식한 사람들은 변화가 와도 그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을 못하고 정석대로 배운대로 한다고 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중요한 변화에 한두 번 뒤처지다 보면 나중에는 인생의 낙오자로 전략하는 것이다.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최고라고 해도 시대가 바뀌면 최고가 아닌 것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늘 상황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나가야 한다. 그 당시에는 그 방법이 통했는지 모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는 일들이 허다한 것이다. 왜 기업들이 잘 나가다가 문을 닫고, 한 때 이름을 날렸다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는지 아는가? 변화에 잘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석은 잘 알았을지 모르나 변화에 따라 정석을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신앙생활도 그렇다. 우선 기초를 철저히 닦아놓아야 한다. 신앙에도 정석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때로는 정석을 넘어서 차원이 높은 단계로 뻗어나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크게 성장하려면 세상의 변화에 잘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신앙은 계속해서 버릴 것을 버려야 새로 채워지는 것이지 버리지 않고 계속 쌓아놓기만 하면 나중에는 그것이 짐이 되고 장애물이 되어 새로운 것을 받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성장하려면 열심히 버릴 것 버리고, 비울 것 비워내야 한다. 비워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비워냄으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능력과 은혜로 가득 채움 받아 살아갈 때 신앙의 영웅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회개하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 1절 말씀을 다시 보라.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repentance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여기서 ‘죽은 행실’이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실을 뜻하는 말이다. 세상에는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행실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의 마음에 독을 품게 만들어 죽여 버리는 행실이 있다. 우리 안에 독초를 심어 신앙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신앙의 대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가? 위대한 신앙의 업적을 남기고 남이 흉내 내기 어려운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대가란 무엇보다도 잘 회개하는 자라고 할 수가 있다. 자신의 진면목을 깨닫고 늘 자신의 부족을 알아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바로 그런 사람이 신앙의 대가요,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기도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예배생활 철저히 지킨다하더라도 회개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신앙이란 성장할 수 없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위일 뿐이지 진정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인정받을 만한 삶은 정녕 아닌 것이다. 

양궁선수가 활 하나를 과녁에 쏘고 나서 몇 점 맞았는가만 신경쓰는지 아는가? 화살 하나하나를 쏘아 날릴 때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자세로, 어떤 법칙을 따라 경기에 임했는지를 철저히 분석하고 점검하고 반영을 해서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다. 양궁선수가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 일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잘 살펴서 회개할 것 회개하고, 용서받을 것 용서받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신앙이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날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높은 경지에 올라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려야 할 것이다. 


교훈의 터를 견고히 하라

오늘의 본문 2절을 읽어보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의 터 여섯 가지를 말하면서 이 터 위에 다른 것을 닦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 터야말로 우리 신앙을 바로 세우는 뼈대라고 할 수 있다. 정해주신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장할 경우, 그 신앙은 변질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성장하려면 교훈한 대로 지켜나가야 한다. 원리들을 무시하면 아무리 잘해도 어느 수준을 넘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기초가 흔들리면 그 위에 쌓아놓은 것은 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 교훈의 터가 견고해야 한다. 그 터가 튼튼해야 그 위에 신앙의 건물을 높이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초보자들을 보면 늘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있다. 가르쳐 주는데로 하지를 않는 것이다. 암만 가르쳐주어도 자기 식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어떤 면에서는 혼자 하는 것이 더 속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혼자 배운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에 갈수록 복잡해지는 문제들을 감당하지를 못해 쩔쩔매는 것이다. 나중에는 왜 이렇게 실력이 늘지 않는가 하고 탄식만 늘어놓게 된다. 초보 때는 가르쳐 주는 대로 준종하고 잘 따라해야 한다. 초보를 넘어서려면 초보가 익혀야 할 신앙의 원리들을 잘 이해하고 그 터를 기초로 해서 우리의 신앙을 크게 키워나가야 한다. 


완전한데로 나아가라

본문에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우리 신앙의 성장의 목표가 무엇인가? 완전한 데 나가는 것이다. 방향 없는 전진이란 있을 수가 없다. 어쨌거나 목표와 방향이 분명해야 한다. 완전한 데 나가는 것이 성장의 목표라면 어떻게 해야 그 수준에 도달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완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나가더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결코 완전한데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나간다는 말은 경우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독특한 동사에 속하는 단어이다. 

인간 편에서 볼 때는 능동으로 해석이 되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수동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어를 가리켜 신적인 수동태 divine passive라고 말한다. 행동은 인간이 하지만 그 행동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그 행동이 바로 되도록 해 주는 누군가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완전한 데 나가려면 우리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완전한 데 나가라 하는 말은 수동태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나가라는 것이고 능동태로 번역하면 우리 자신이 나아가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성장은 내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 노력만으로도 불가능하다. 내 수행만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주님께서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아직 성장이 늦는다고 잘 되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분은 없는가? 이 시간 내 힘으로 하기 이전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힘입으라. 

우리 모두 신앙의 초보단계를 뛰어넘어 보다 성숙한 단계로 나가야 할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보다 더 높은 단계를 향해 발돋음하기를 원하신다. 더 나아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를 기대하신다. 신앙의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지 말고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리고, 회개해야할 것은 철저히 회개하면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날마다 전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 기도 >

거룩하신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이루려고 하지만 
때때로 성장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신앙이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나이다. 
신앙의 연륜이 10년이 되고 2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 있나이다. 날마다 
은혜로 도우시고 능력으로 채워주셔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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