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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린 문 (고전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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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문 (고전 16:5~9)

    
흔히 사람들이 살다가 보면 좋은 일을 경험하고 또 좋지 않은 일도 경험합니다. 평생 살면서 좋은 일만 경험하는 사람도 없고 또 나쁜 일만 경험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전도서 저자는 그래서 사람들이 살다가 좋은 일이 기쁜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오면 생각하라. 즉,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것을 주셨는가, 또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난 다음에 결론은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셨다. 고 했습니다. 

살면서 힘든 일도 좋은 일도 병행이 되는 것이지요. 시험 칠 때마다 다 합격하는 사람이 있나요? 어떤 때는 합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낙방하기도 합니다. 진급하다가도 진급에서 누락되기도 하고 사업도 잘 되다가도 또 안 되기도 합니다. 건강하기도 하다가 아프기도 합니다. 교회가 성장이 잘 되다가도 성장이 멈추기도 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렇게 명암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간에 그 처한 현실에 문을 열어놓고 계십니다.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행복과 기쁨과 감격과 성공의 문을 열어놓으시고 힘들고 어려운 때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을 통해 뭔가를 깨달으라고 하는 문을 또 다시 열어 놓기도 하십니다. 문을 꽉꽉 걸어 잠그고 행복도 들어오지 못하게 또 고난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로봇처럼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여러분의 삶에도 늘 이런 명암이 있지만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관계없이 우리에게 그 상황을 통해서 뭔가를 깨닫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쓰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터키와 그리스를 지나 이렇게 그 때 당시에는 소아시아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지중해 연안 나라들입니다. 그 나라들을 전도하는데, 세 번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왔다 갔다 하는데 25년이 걸렸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지막 여행은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다가 참수형 당해 죽는 것, 로마로의 여행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대충생각하기에 사도바울이 60세 내외 정도 되었을 때 즉,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30년 정도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는 이때는 사도바울이 세 번째 전도 여행을 하던 중에 에베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바울은 두 번째 전도여행 때도 에베소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하면, 그 기록이 사도행전 19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나와 있는 사도바울의 에베소 전도여행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어느 때에 에베소에 내려갔더니 기독교인 몇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을 만났습니다. 너희들이 성령을 받았느냐? 이렇게 물으니까 그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성령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가 요한의 세례도 알고 예수님의 세례도 아는데 성령 세례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을 데려다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데 아주 강력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3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 동안 회당에서 복음을 증언하는데 반대파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유대인이었던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유대인이었다가 예수를 믿는 것을 못마땅해 해서 사도바울이 회당에서 복음 증언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언 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믿고 돌아오고 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바울이 들고 있는 손수건 사도바울이 입고 있던 옷을 병자 위에 오려놓기만 하면 병자가 낳고 귀신이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일 때문에 유대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옷을 던지고 수건을 던지면 병이 낫는 가 실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유대인 제사장 아들들이 그런 일을 했는데 귀신이 그런 모습을 보고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알고 바울이 누구인지도 아는데 도대체 너희는 누구야? 이런 이야기가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에게 어려움을 당했지만 사도바울이 거기에서 복음을 증언하는데 사도바울이 그곳에서 쫓겨나 두란노라고 하는 서원에서 그가 2년 가까이 복음을 또다시 증언합니다. 이 에베소라고 하는 지역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던 식민지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지금의 터키의 중부에 있는 해안 도시였습니다. 그 옛날 이 에베소는 인구가 20만이 넘는 아주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상업과 문화와 금융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이 에베소에 가면 그 때 당시 에베소라고 하는 도성이 얼마나 화려했는가를 볼 수 있는 유적지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유적지는 에베소 극장입니다. 원형 극장인데요, 지금도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도 여름만 되면 그곳에서 5천~만명이 들어가 콘서트를 연다고 합니다. 전에는 해안가 도시였는데 지금은 해안가가 9km 바깥으로 멀어져서 바다가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도시 바로 앞에까지 배가 들어왔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사람들이 믿고 있는 여신이 있었습니다. 다이아나라고하는 풍요의 여신이었습니다. 이 다이아나를 모신 신전이 아테미라고 하는 신전인데 이 신전은 둘레가 3m정도 되는 돌로 기둥을 수 십 개 만들었는데 이 기둥의 높이가 수 십 미터입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아테미신전인데 지금 가보면 잔해만 남아있습니다. 그 신전에 이 다이아나 신을 모시는 제단이 있었고 여기에는 성창이 있었습니다. 성창은 여자 창녀들인데 제사장과 공식적으로 인정된 섹스를 이 제단에서 했습니다. 이런 행위가 이 제단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다이아나 여신의 우상을 들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곳에서 복음을 증언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고 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믿고 있는 그 여신은 사람이 만든 우상일 뿐이고 이 신전에서 아무리 제사를 드려봤자 너희들에게 행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그곳에 데메트리우스라는 이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 어느날 바울의 그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가게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직업을 갖고 우상을 만들어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나타나 우상은 다 허망하다고 이야기 하니까 사업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사람들을 모아 선동합니다. 급기야는 에베소 극장에 수천 명이 모여 사도바울을 재판하려고 합니다. 그 때 사도바울을 사랑했던 몇 몇 사람이 거기 가면 돌에 맞아 죽으니까 도망하라고 알려주어 그곳을 빠져 나온 이야기가 사도행전 19장에 있습니다.

이렇듯 에베소는 많은 사람들이 우상에 빠져있고 절망과 좌절에 살고 있었던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부자이기는 하지만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완전히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도시에 2년 넘게 머물고 있으면서 고린도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마지막 부분에는 “내가 이제 마케도니아를 지나 너희들에게 내려가겠다.” 그 때 가려면 이 에베소에서 육로를 따라 지금의 이스탐불을 지나 그리스 북부지방으로 가면 마케도니아를 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마케도니아를 지나 (고린도는 마케도니아에서 남쪽으로 한 300km 떨어진 항구도시입니다.) 가겠다는 것입니다. 거기 가서 너희들과 함께 겨울을 지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들에게 가기 전에 이곳 에베소에 오순절이 될 때까지는 더 머물러 있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왜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더 머물러 있겠다고 했냐하면, 

9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몇 개월 더 머물려 함은 하나님께서 문을 여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효하고 광대한 문이 내게 열려있으니 내가 이곳에 오순절까지 더 머물러 있다가 내가 너희들에게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문! 유효하고 광대한 문! 대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 문은 기회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2년 반 정도 머물면서 그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에베소를 바라볼 때 사도바울은 무엇을 느꼈냐하면 이 백성들 20만명이라고 하는 이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몰라 방황하고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 이들이 구원받아 천국백성이 되는 것을 사도바울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내게 열려 있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전도할 수 있는 문이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내 앞에 열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십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나 아니면 상사나 부하직원이나 가게에 사업 처에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붙여주신 태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전도하라고 사업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음을 증언하라고 주신 전도대상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살고 있는 에베소에 있는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볼 때, 그저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라는 말은 전도의 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아파트에 새로 이사하셨습니다. 라인에 있는 많은 사람들, 그저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낸 것이 아니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언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전도의 대상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기회의 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이발소에 가면 이발소 사람을 꼭 전도를 합니다. 교회 앞에 있는 이발소에 지금은 다른 분이 오셨지만, 전에 계셨던 분도 제가 이발소에 갈 때마다 전도를 해서 우리교회 나와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다가 지금은 탄현으로 이사 가셔습니다.  그 분이 가시고 난 다음에 지금 다른 분이 두 내외분이 이발소를 맡아 하시는데 그곳에서도 전도를 해서 돌아오는 9월 28일에 우리교회에 나오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이곳에 살지 않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음식점이나 어딜 가든지 사람들에게 교회를 소개하고 전도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교회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고 교회 오는 것 안 오는 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던지는 것 뿌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 다이아나 여신에게, 아테미 신전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죽어져가는 20만명을 바라볼 때마다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기회가 내게 열려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올해 2008년도 9월 28일 총동원전도주일, 새 생명 축제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전도의 기회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신 전도의 문이 지금 열려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유효하고 광대한 문이 나에게 열려있다고 이야기 했는데 여러분에게 있어서 이 새 생명 축제는 전도의 기회가 아닙니까? 매일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정해진 기간 동안 태신자를 정하고 한 번 전도하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은 자기 앞에 책임의 문이 열려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9절에 보면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열린 것이 아니고 바나바에 열린 것이 아니고 나에게 열려져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책임의 문을 의미합니다. 내가 맡아야 할 책임의 문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저는 나이도 많고 우리교회에 온지도 얼마 안 되고요 저는 훈련도 많이 받지 않았는데 제가 무슨 일을 합니까? 저보다 젊고 시간 있고 훈련 받으신 분들이 하셔야지요! 그리고 자기자신을 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몇몇 사람에게만 훈련 받은 분에게만 허락하셨을까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에게 문이 열려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뭔가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스스로가 나는 부족하니까 빠진다고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분이 몇 명이나 될까요? 

일반 직장에서도 상사직원이 제일 싫어하는 부하가 누구냐 하면, 그거 제가 해야 하는 일 인 줄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책임이라는 것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 목사에게만 하나님의 일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가 교회 안에서 직장에서 할 수 있는 책임을 주었습니다. 남이 아니고 바로 여러분입니다. 선택이 아니고 의무사항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교회가 아니라 우리교회보고 선교하고 우리교회보고 구제하라고 이 지역사회를 봉사하라고 맡겨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맡겨주신 일을 열심히 감당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여러분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신 여러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여러분 개개인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아름답게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구역이나 다락방 소그룹에 가서 열심히 참석해 기도로 후원할 수 있습니다. 구제하고 선교하고 봉사하자고 했을 때 헌금하실 수 있고 시간이 있으시면 시간을 내실 수 있고 여러분이 뭔가 특기가 있으시면 그 특기로 재능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분은 안계십니다.


세 번째 사도바울은 반대의 문이 열려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9절 하반절에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대적의 문, 반대의 문도 항상 열려 있습니다. 광대한 문만 우리에게 열려있지 않습니다. 살다가 보면 우리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몸 아프고 떨어지고 괴롭고 망하고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일어나게 됩니까? 이런 위기가 우리의 삶에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성공의 문만 열려있지 않고 실패와 좌절의 문이 우리 앞에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 할까요! 

사람들은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실패를 통해서 뭔가를 배웁니다. 소를 잃고라도 외양간을 고쳐야 합니다.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실패했는가? 내가 왜 비난을 받는가? 내 삶의 문제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들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고 실패를 주고 위기를 주고 좌절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내가 더 엎드려 겸손해 져야 함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실패를 주기도 하시고 좌절을 주기도 하십니다. 시험을 보는데 자꾸만 떨어져요. 그 전에는 자기 자신이 능력 있고 자기 자신이 노력하면 뭔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을 끝까지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내 능력, 내 경험 다 내려놓고 하나님, 하나님에 나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난 살 수 없습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높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의 능력으로 사업을 하거나 여러분의 능력으로 건강해 지거나 가정이 건강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교만한 자에게 때때로 넘어지게 하십니다. 실패와 좌절을 주십니다. 위기의 문이 열려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에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엎드려 기도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데메트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대적해 오는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모든 어려움들을 다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이야기 합니다. 그런 어려움이 있지만 내가 여기 더 남아서 전도하리라. 이런 것들보다 더 커다란 대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믿음, 이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귀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입술이 아닙니다. 주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손과 발이 움직이는 행동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믿음,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을 하나 안하나 팔짱 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들 자신을 대적하는 것들입니다. 기적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않는 것들, 다 믿음의 대적자들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속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를 대적하는 존재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위기가 찾아오지요?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어떻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괜히 우리의 삶에 위기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기를 통해 우리가 뭔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뜻을 깨닫게 되면 그 위기가 기회가 되고 또 우리는 더 많은 유효하고 광대한 문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도바울에게 열린 문을 허락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열린 문을 허락하셨습니다. 전도의 문이라는 기회의 문을 주셨고, 여러분에게 책임의 문이라고 하는 기회의 문을 열어주셨고 책임의 문이라고 하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문을 열어주셨고 때때로 위기와 고난과 아픔의 문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이런 것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더 엎드려 기도하고 겸손해 지라고 좌절과 실패와 낙방의 문을 열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말씀을 전달하시면서 허락한 이 문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묻고 계셨습니다. 기회의 문을 주셨는데 그 문을 닫으면, 책임의 문도 주셨는데 여러분 스스로가 그 문을 닫아버리면, 실패와 좌절과 절망의 문을 주셨는데 그것까지도 닫아버리고 만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문을 통해 여러분을 찾아오시고 그 문을 통해 여러분을 축복하십니다.

맡겨주신 기회의 문, 맡겨주신 책임의, 맡겨주신 이 대적의 문을 감당하셔서 사도바울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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