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고전 13:5)

  • 잡초 잡초
  • 544
  • 0

첨부 1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고전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 : 5) 


Ⅰ. 문맥 안에서의 ‘무례함’ 

오늘 본문 말씀의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는 “교만하지 아니하며”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교만함은 사랑이 없는 증거이고 무례함은 교만함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Ⅱ. ‘무례히’의 어의(語意): 아스케모네이 

흔히들 성경이 사랑에 대하여 기록하다가 왜 갑자기 예절에 대해 말하는지 의아해 합니다. 하지만 무례히 행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한두 가지의 예의범절을 지키는 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무례히 행함은 희랍어로 ‘아스케모네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희랍어 스케마에서 온 것이고 이 스케마는 영어 scheme의 어원으로서 형식, 틀, 예법, 방식 등을 뜻합니다. 거기에 아 라는 부정접두어가 붙어서 스케마가 없이 행동한다는 뜻이 아스케모네이의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뜻은 사랑은 규모, 예법, 도리, 규범, 이런 것들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 안에서 끓어오르는 비이성적인 정염이 아니라 놀라운 질서를 지향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질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Ⅲ. 사랑과 질서 

사랑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이기도합니다. 

A. 아름다움의 본질 : 복수의 어울림 

아름다운 것들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 다른 것들과 함께 어울림으로써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자연을 보십시오. 평범한 풀잎 하나도 그 안에 수많은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사물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의 서로 다른 밝기와 거리, 빛깔들은 어두움과 어우러져서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적인 사물들은 이렇게 복수로 어울리면서 아름다움을 연출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세상을 이토록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B.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질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서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성부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함으로써 삼위로 존재하십니다. 한 하나님이시지만 세 인격을 가지시고 성부, 성자, 성령의 각각의 탁월한 아름다움이 서로를 사랑하게 하심으로 세 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실 수 있고 사랑이 아니실 수 있는 그런 선택적, 우연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도 필연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세계를 향해 삼위 안에 있는 사랑을 흘려보내시는데 이것이 삼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경륜의 아름다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셨을 때 그 아름다움은 두 가지로 집약시키셨습니다. 

첫 번째는 자연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하나의 사물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땅에 기는 육축은 육축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각기 종류대로 완전한 구성요소를 어울려 만들어 내셨습니다. 또한 그것들이 있어야할 자리도 지정하셨습니다. 공중에는 새, 땅위에는 짐승, 물속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모든 세계 속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보이셨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알며 질서 속에서 어울려 아름답기를 원하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창조 시에 이 세상 사물을 모두 한 번에 창조하십니다. 새도, 수많은 짐승들도, 물고기도 한 번에 종류대로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에 있어서는 어린 아이, 젊은이, 노인들을 세계 각처에 흩어 놓으실 수 있었는데도 둘 도 아닌 한 인간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아담이었고 여자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가 부부가 되기 전에 이미 한 몸인 가족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지루할 정도로 긴 세월이 걸리는 생육의 방법을 택하셨지만 피부 색깔이나 사는 곳의 차이와 관계없이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하나의 가족으로 살게 하고 싶으셨던 뜻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는 순식간에 인간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항한 사랑을 앗아가 버렸고 인간을 자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자 인간에게 가족관계로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로 인간들은 인류가 함께 어울려 질서를 이루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도전했습니다. 게다가 이 도전은 점차 개인, 고향, 나라, 민족 등 여러 덩어리로 묶여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체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은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계획으로부터 멀리멀리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것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한 가족이 되기를 싫어하고, 될 수도 없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원래 창조의 계획대로 하나의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이르러서는 끝까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부한 다수의 사람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더 아상 더럽히지 못하도록 보존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 아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으로 변화시켜 주셔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라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 얻은 즉시 사람은 이 전에 개별자로 살던 자리에서 돌이켜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지체됨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의 지체됨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성향을 주심이고, 우리를 접붙여 교회의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구원받을 인류들을 하나로 엮어서 완전한 한 가족으로 만드실 모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성하시기 전까지는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구원받은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과 자기 안에 잔존하는 부패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가족으로 사는 것도 싫어 공동체를 뛰쳐나가 제 멋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유혹인 하나님처럼 되고 행동하고자 하는 교만의 소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의 감화를 통해 사랑이 솟아나게 하셔서 한 가족으로 살기 싫은 마음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입증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만약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질서, 하나님이 주신 세계의 자연적인 질서를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명백히 싫어하는 것입니다. 


C. 회심 : 신적 질서로 돌아감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인 회심도 사랑의 질서와 관련시켜 말하자면 신적인 질서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즉 예전에는 질서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내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질서의 판단자인 것처럼 살았는데 그 끝은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악일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의 마지막이 쓰라린 고통이며 커다란 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고통 가운데서 자기가 고통의 주범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이탈 한 것을 깊이 후회하는 것이 회개이고, 지금은 손해를 받고 괴로움을 겪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의 질서대로 살면 내가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믿고 그 질서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믿음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질서가 자기 자신, 이웃, 그리고 온 세계 안에서 아름답게 펼쳐져서 질서 안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자신을 바치는 헌신이 바로 순종입니다. 

그래서 질서의 이탈은 환경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받고 나서 하나님 앞에 제일 죄송한 것은 내가 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명백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아닌 곳으로 가는 내 마음을 고쳐보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크신 희생과 사랑을 기억해 자기를 꺾는 그 모든 자기 쇄신과 깨뜨려짐은 바로 깊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신적인 질서로 돌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 안에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고 하는 것이 입증됩니다. 

반성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의 삶 가운데 그릇된 마음이나 행동들을 하나님의 질서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나 행동은 우리를 하나의 가족으로 묶으시려고 한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이탈이자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행동 때문에 스스로 너무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이것이 회개이고 자기반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질서를 이탈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자기사랑과 아름다운 질서로 돌아가려는 은혜와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한 번 진지하게 반성해보십시오. 이전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질서를 몰라서 마음대로 살았지만 그것을 알고 난 후에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자신의 고통과 수많은 악이 그 질서의 이탈 때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누구의 강요도 없이 뉘우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은혜는 식고 육욕이 솟구치게 되자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 그 질서의 아름다움을 다 팽개쳐버리고 양순하게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자기의 밥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 행동에 대한 고통은 온 교회가 한 몸에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이탈하여 제 멋대로 행동하는 삶을 사는 동안에 그의 영혼은 견딜 수 없이 곤고해지고 이미 하나님의 벌은 그의 마음과 영혼 안에 내려집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규모와 법도 예법 없이 함부로 ‘무례히 행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는 순간 스스로 성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막돼먹음으로 일관된 삶을 통해 교회에 준 수많은 흔적과 고통의 상처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은 큰 사랑으로 그들을 붙드시지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빌미로 자기의 육욕을 따라 무례히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심으로 자기가 떠난 하나님의 질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각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Ⅳ. 사랑 : 그 질서를 즐거워함 

사랑과 겸손은 다른 이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어울려 아름다움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교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파괴하여 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잘난 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사람의 판단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 하나님의 질서보다 자기의 질서를 옳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 자기는 자유롭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모든 것은 사랑과 한 인격 안에서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끊임없이 그 질서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나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누군가를 향하여 가진 태도는 그에게 속한 생각이나 혹 그에게 속한 물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그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함께 좋아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 가정, 교회 그리고 세계 안에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를 함께 사랑하게 됩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그 질서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는데 그것은 사악함에 위선을 보탠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 자연스레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기 무아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나면 자기가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가능성 있는 존재인지를 보게 된다는데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자기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떠한 식으로든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자기 육체까지도 사랑하지 말도록 경고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한1서 2: 15). 

그러므로 한 사람이 회개하고 그분의 질서로 돌아왔을 때 그의 마음을 가득 메우는 찬란한 아름다움은 이 세계 전체를 품으며 휘돌고 있는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지 내가 회개하고 나니까 나도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일 뿐입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성경은 부분적이거나 조건적으로라도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랑은 자기 무아의 사랑이고 자기 잊음의 사랑입니다. 


Ⅴ. 결론 

그러므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은혜를 경험한 후, 모든 좋은 것들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결코 사랑의 질서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이유는 물질이나 육욕 등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이 우리 사랑의 최종적인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그대로 고통이 되어 예수님께 대한 핍박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질서관념이 없이 내키는 대로 교회 생활을 했던 많은 사람은 후일에 자신의 수십 년간의 종교적인 인생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살아온 모든 나날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무참히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살아온 악의 삶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세상의 명예나 물질의 유익, 사람들에게 받는 좋은 평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새롭게 다가오는 십자가 사랑 때문에 자기의 교만을 접고, 순간의 이탈을 회개하고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그 쓸데없어 보이던 시간들이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날들로 주님의 마음에 기억된 다는 것을 보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의 규칙과 생활의 교훈을 따르고,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십자가에 대한 묵상으로 견디며 주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이유입니다. 사랑은 아무렇게나 행하지 아니합니다. 그 질서를 사랑하고 질서 안에서 나 때문에 타인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자신도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행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것들입니까?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