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새 시대 신앙의 인물을 만드는 가정 (출 2:1~10)

  • 잡초 잡초
  • 248
  • 0

첨부 1


새 시대 인물을 만드는 가정
출2:1-10

마포구 합정동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부부가 쌍둥이 아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아들들이 중학생이 되었는데 공부는 안하고 컴퓨터만 했다고 합니다. 시험을 보았는데 전 과목이 둘 다 “가”가 나왔다고 합니다. 두 아들이 전교생 576명 중 576등과 575등을 한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여기에 계시는 성도님들도 대다수 열을 받을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난 아버지가 “같이 죽자고”'지포' 라이터 기름통에 구멍을 내 휘발유를 거실에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시늉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갑자기 이성을 잃고 불을 지르려고 하는 남편을 힘으로 제압하고 112에 신고했답니다. 그래서 경찰이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한 혐의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아버지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경찰에서 아버지는 `양이 하나만 있더라도 이렇게 화 안났을 것`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데 아들이 시험을 보았는데 모두 “가”가 나오고 하나만 “양”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아버지는 라이터로 불을 지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웃으면서“한 가지에게만 집중하지 말고 골고루 집중하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성적에 어떻게 대처하든 모든 부모의 마음은 내 자녀들이 잘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모두 다 새 시대의 인물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출생을 통하여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새 시대 인물로 만들 것인가를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1. 환경을 극복하고 믿음의 눈으로 자녀를 새 시대 인물을 만드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1-2).
사람의 지능은 유전과 환경에 따라 결정됩니다. 유전이 더 영향을 미치느냐 환경이 더 영향을 미치느냐는 학자들에 따라 논란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타고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경은 부모의 노력에 따라 바꾸어 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맹모삼천지교 [孟母三遷之敎] 라는 말을 잘 알지 않습니까?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어머니 손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공동묘지 근처에 살자 맹자가 장사지내는 놀이를 하여 시장 근처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자 맹자가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들의 흉내만 하고 놀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방 근처로 이사를 하였더니 예법에 관한 놀이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맹자가 유가(儒家)의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 주는 고사입니다. 나쁜 환경에 태언 난 것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운명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나쁜 환경에 태어났다고 자포자기 하거나 포기하고 절망하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모세가 태어난 환경은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나라가 없는 상태입니다.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가정이 부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늘 애굽 사람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할 때 얼마나 꿈에 불풀어 결혼하였겠습니까? 레위 족속입니다.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의 이름의 뜻은 "고상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어머니는 요게벳은 "여호와는 영광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름처럼 고상한 백성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면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고통스러운 환경이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모세의 부모가 맏딸을 낳아 ‘미리암’이라고 이름을 지었겠습니까? ‘쓰라림’이라는 뜻입니다. 맏아들을 낳아 ‘아론’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뜻은 ‘이 임신에 화’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아픈 현실입니까?

둘째 아들을 낳을 때 시대적인 환경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서는 안 될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면 강물에 던져져야 하는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을 둘째이고 생명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노예 민족인 유대인의 수가 증가되는 것을 두려워한 바로가 사내 아이를 낳으면 강물에 던지라고 모든 백성들에게 어명을 내렸습니다(1장 22절) 중노동을 시켜도 인구가 늘어나고 산파를 시켜 남자들을 죽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자 백성들에게 유대인들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절대 군주 치하에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당시 히브리인은 장정만 60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동네에서 매일 매일 자식을 죽이는 절규하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할 시대에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의 생명도 지켜 낼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당시 부모들은 다 아들을 내어 주어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2절에 보십시오. 그 준수함을 보고 세 달을 숨겼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 저항합니다. 들키면 자신들도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자식도 함께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위험부담을 안고 자식을 살리기 위해 숨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들이 잘 생겨서 숨기었겠습니까? 

스데반의 입술을 통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행 7:20)” 준수하다는 말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모세가 준수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선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존재, 자신들에게 갈등과 번민을 주고 불이익을 주는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신 생명의 존엄성과 인권을 지금처럼 귀중하게 생각한 때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물건처럼 취급한 때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모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이들을 낙태시켜 죽이고 있습니까? 낙태 공화국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에 1000명 이상, 1년 36만명 이상이 태아가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질을 위해 생명을 마음대로 죽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자신들이 비록 죽는다하여도 모세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였겠습니까?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 11:23)”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가 믿음의 눈으로 모세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겨준 귀중한 선물인 것을 알고 바로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모세의 생명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어 이 땅에 보낸 아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우연히 이 땅에 보낸 아이가 아닙니다. 사명자로 태어났습니다. 바로의 눈에는 죽을 자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로 태어났습니다. 출애굽기 4장 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출 4:11)"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부르기 위해 지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창15:13-14절에서 400년이 지난 후 해방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 사명을 성취하는데 모세와 그 가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민족을 해방하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아무리 나쁜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초라한 목동으로 태어난 다윗을 보십시오. "

시편 22:9-10절에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母胎)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는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母胎)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예언한 이사야를 보십시오. 

이사야 49:1-3절에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胎)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腹)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예레미야 1:4-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腹)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胎)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합니다. 

세례요한(눅1:13-16)도 바울도(갈1:14-16)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신묘막측함으로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살려고 태어난 사람이고 백성을 살릴려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민족을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이미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만약 부모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결코 모세는 새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를 때 나쁜 환경이라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환경의 제물로 아이들을 바쳐서는 안됩니다. 도저히 기를 수 없는 환경이라고 자식을 미리부터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내 가정 환경이 나쁘다고 아이들까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노예의 아들이지만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노예를 해방시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시련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 오경을 기록하였습니다. 루터 아버지 광산 노동자였습니다. 김활란 박사의 어머니는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양잿물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링컨은 너무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꼭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야만 시대의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네바의 피에르 렌취니크 박사는「의학과 위생학」지에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역사를 움직인 300여명의 지도자가 고아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 황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왕,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조지 워싱턴, 세계 정복을 꿈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해상을 장악함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 기초를 놓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던 골다 메이어,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가 비스마르크 수상과 드골 장군 등, 300여 명의 인물들이 고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공자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루소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데카르트는 한 살 때, 파스칼은 세 살 때 각기 어머니를 잃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생아였고 바흐는 고아였습니다. 루소, 스탕달, 보들레르, 포우, 단테, 톨스토이, 바이런,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등도 모두 고아였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역시 가장 가혹한 정권기에 태어났습니다. 헤롯이 유아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호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의 길을 걸음으로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창조물, 구원을 선물하였습니다. 한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전략이었습니다. 씨를 말림으로 메시야의 언약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이 태어날 때 한 방법과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새생명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낳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새 시대의 주역으로 쓰시고자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2. 절망적 상황에서도 새 시대의 인물을 만드는 최선을 다하는 지혜있는 믿음의 행위를 하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3-4).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는 아이들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본다고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저절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이 다가오면 쉽게 포기하거나 도피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의 생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믿음의 행동을 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어떻게 했습니까? 믿음의 행동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3절에 보십시오. 남아와 여아의 울음소리를 구별하기 힘든 세달까지는 어떻게든 집안에서 모세의 생명을 보호했습니다. 매일 매일 초조와 긴장, 두려움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집 안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거룩한 은익에 한계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나일강에 아이를 띄울 것을 결심합니다. 

당시 제 18왕조 투트무스 1세의 딸이 나일강 어느 지점에서 목욕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당시 애굽인들은 나일강을 신성시하고 종교적 정결 예식으로 강에 나와 목욕을 했습니다. 장수와 다산의 축복을 받는다고 믿은 것입니다.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6690km 나 된 강으로 서울 부산 10배 넘습니다. 그 중 바로 공주가 목욕하는 곳을 알아 놓은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강대국으로 다른 나라의 왕자를 정치적 외교적 목적으로 볼모로 잡기 위해 양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는 모험을 시도한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는 곳을 알아내고 아들을 그곳에 있게 하여 모세를 양자로 삼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갈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했습니다. 애틋한 모성애의 반영이며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를 기대하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수에 떠내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에 구출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미리암으로 하여금 멀리 지켜 보게했습니다(4). 자식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혜로운 믿음의 행위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자녀를 보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며 따라야 할 것이 믿음의 행위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에는 지혜가 따라야 합니다. 지혜 없는 믿음은 맹신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지혜입니까? 최선을 다하는 지혜입니다. 구체적으로 자식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이 딸을 났게 해 주실 것으로 믿었다면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극복하는 것입니다. 개 취급당해도 부스러기라도 간구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예수님께 가면 치료될 것이라고 믿었으면 사람이 많으면 지붕이라도 뚫고 친구를 내리는 것입니다. 혈루증 앓은 여인처럼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으면 뒤에라고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사는 것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모세 어머니의 이런 지혜로운 믿음의 행위가 없었다면 모세는 이 땅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새 시대를 이끈 위대한 믿음의 인물 뒤에는 최선을 다하여 자녀를 양육하는 지혜로운 믿음의 행위를 한 부모가 있는 것입니다. 

감리교위 창시자 요한 웨슬리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자녀를 출산하였습니다. 수산나는 매일 밤 그 많은 자녀들의 머리 맏에 앉아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으며 경건의 연습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 엄격한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5세가 되면 주기도문을 암송케 하고, 성경을 통독하게 하고, 알파벳을 가르치고, 집안 일을 거들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침과 저녁 한 시간씩은 가족 기도회를 열었고,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자녀를 위한 정기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수산나는 딸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 책을 읽을 수 있기까지는 바느질이나 다른 집안일을 일체 가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근에 [칼 비테 영재 교육법] [칼 비테의 공부의 즐거움]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영재교육의 효시가 된 칼 비테의 아버지의 교육법을 소개한 책입니다. 그는 시골 작은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처음 비테가 태어났을 때는 아내조차도 "이 아이는 교육을 시켜 봤자 소용없어요. 헛수고예요"라고 할 정도로 우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비테를 조기 영재 교육을 시켰습니다. 비테는 여덟 살 때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영어 및 그리스어 등 6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14살에는 수학 관련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16살에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아 베를린 대학교 법학 교수로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영재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국에 가는 83세까지 할레 대학교에서 강의 하면 세상에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가능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주 이상적으로 성장해서 100이라는 수치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이 아이는 100의 가능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100의 가능 능력을 갖고 태어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방치해 두면 20이나 30정도의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밖에 자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교육을 잘 시키면 60이나 70%, 때로는 80내지 90%의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도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가능 능력에는 '체감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00 정도의 가능 능력을 갖고 태어난 아이를 태어났을 때부터 이상적으로 교육시키면 아이는 100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다섯 살 때부터 교육을 시키면 이상적으로 잘 교육시켜도 80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열 살 때부터 교육을 하면 아무리 이상적으로 교육을 시킨다 해도 60 정도의 능력밖에는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교육을 시작하는 시기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어린아이가 갖고 태어난 가능 능력의 실현 비율은 낮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피아노는 다섯 살, 바이올린은 세 살 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심오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능력은 그 발달 시기에 발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씩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새 시대의 신앙의 인물로 만들려면 어떤 환경에서도 자녀를 최선을 다해 교육시키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유학도 보내어야 합니다. 넓은 세계에서 공부하게 하여 새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옆으로는 사람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아이들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녀를 새 시대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모가 편안함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픔을 감내하고 아픔 앞에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아픔의 상자를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아픔은 인생의 길이보다 길지 않습니다. 세속의 물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억척을 부려야 합니다. 모험심이 있어야 합니다.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험심도 용기가 생깁니다. 최선을 다하는 지혜를 동반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전략이 없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면 안됩니다. 신앙과 지혜는 충돌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의 틀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자녀에게 지식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지식의 도구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숫자로 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주인공이 되게 하여야하겠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시각을 넓혀 내 아이만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교회 공동체의 아이들을 모세처럼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 세속적인 물로에 빠져 죽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민족을 구원시키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도록 열정을 가지고 보호하고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3. 우리는 자녀들을 새 시대의 신앙의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5-10).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능력의 한계 인식의 한계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자녀교육입니다. 이제 모세의 어머니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나왔습니다. 바로의 무남독녀 외딸입니다. 법적으로 왕위 계승자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공주가 그곳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입니다. 새 시대의 지도자 모세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애굽 왕실의 화려한 왕실의 목욕탕을 놓아 두고 그 시간에 처녀인 공주가 모세가 있는 나일강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시녀들은 감시하기 위해 나일강 가를 거닐 고 있는데 바로의 딸이 목욕도 하기 전에 모세를 발견합니다. 목적이 지금 모욕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를 발견한 것입니다. 열어 보니 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히브리인의 아이는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 아이인 줄 알면서도 죽일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살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때 미리암이 뛰어 갔습니다.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공주는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미리암은 자기 어머니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삯을 받고 아이에게 젓을 먹였습니다. 아이가 자라기까지 어머니는 모세를 길렀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머니가 믿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어머니 품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프뢰벨은 “아이는 다섯 살까지 일생동안 배우는 전부를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과장되기는 하였지만 그만큼 어릴 때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때 모세가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지 않고 애굽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민족의식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아들은 생후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낯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낯선 사람들을 보았을 때 느끼는 불안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유아들은 믿을 만한 친숙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안정이 됩니다. 

매카담스(D. P. McAdams)는 유아들이 애착되는 이 시기에 애착이 안정적으로 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서 삶의 기본적인 이야기 음조(narrative tone)가 달라진다고 주장합니다. ‘이야기 음조’생후 2년까지의 아동의 삶 속에 만들어진 인생관이 성인기의 삶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그 때 한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인생의 이야기로 써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이야기를 그려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때 자기(self), 타자(other),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신뢰 대(對) 불신, 전진 대(對) 철회 가운데 하나의 기본적 입장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릭슨(E. H. Erikson)은 ‘기본적 신뢰 대(對) 기본적 불신’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모세의 어머니의 영향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기르기 위한,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를 당시 최고의 교육인 애굽의 궁중 교육, 세속 교육을 시키기 전에 어머니 밑에서 신앙 교육을 받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모세가 민족의식을 갖고 일생을 좌우할 신앙 교육을 받은 때는 바로 이 때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요셉을 새 시대의 인물로 만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시요. 형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도와줍니다.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그를 죽여야 할 그의 남편 보디발이 그를 도와줍니다. 얼울하게 감옥에 가서 죽지 않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를 도와줍니다. 결국 사명을 이루어 냅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은 라합이라는 여인을 가나안 땅에 세워 두셨습니다. 바울과 276명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보블리오를 세워 놓았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들과 이방 임금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도들이 그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바나바를 통해 그를 세워줍니다. 가는 곳곳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와 사명을 이루도록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은 생명까지라도 바쳐 그를 도우려고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성장하는 데는 여러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전 재산 13만 5천 달러의 돈을 모두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불쌍한 고아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사명에 붙들렸습니다. 그의 가정이 고아를 위한 삶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그는 한평생을 고아를 위해서 헌신하였고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갈대 상자는 아픔의 상자인과 동시에 믿음의 상자이고 구원의 상자입니다. 우리 가정에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아프겠습니까? 아픔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행동을 최선을 다하여 지혜롭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 자녀들의 앞길에 펼쳐 줄 줄 믿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사회 비평가 존 러스킨은 [인류역사는 세계의 역사가 아니라 가정의 역사]라고 갈파한 후 "한 나라의 수준은 그 나라의 가정수준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고 한 나라의 생존은 가정의 생존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한 것처럼 가정은 참으로 중요한 기관입니다. 우리 열린교회 식구들의 가정들이 새 시대를 준비하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만들어 내는데 쓰임 받아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