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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대의를 위한 행동 (요 1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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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대의를 위한 행동 (요 13:36~38)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이라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지난 주간 어느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평가되는 분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진작 예수를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내 삶은 이기적이고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아온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예수님 말씀에 비추어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소아적 삶을 살아온 것이 후회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늘 후회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후회할 줄 안다는 것도 훌륭한 신앙이고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삶의 근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야하는 줄도 모르고 덤벙대는 모습이 나옵니다. 지금 예수님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곧 십자가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호언장담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이라도 버리겠나이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이라고 버리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골고다를 올라가는 데는 아무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길을 홀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큰 리더였고 큰 지도자였고 대의를 위하여 행동하셨습니다. 


사랑 추구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기도의 제목도 삶의 목적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인물이 많이 나오지만 그들도 모두 추구점이 각각 다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 마다 제단을 쌓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자신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며 순종하였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을 구하려고 애를 썼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무서운 결단을 감행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1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지혜를 부여받았습니다. 이사야는 성결하려고 힘쓰며 정결한 입술을 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랑이 목표였습니다. 산상수훈의 내용 전체가 이 사랑의 노래였고 교훈이었습니다. 3년 동안 돌아다니며 그 사랑을 가르치고 고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실천하셨습니다. 

 세상의 큰 인물들을 보아도 모두 대의를 위해서 인생을 펼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대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링컨은 남북 전쟁 시에 부하가 “우리가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할 때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했다는 말은 그의 대의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재산 싸움을 할 때 “네가 먼저 택하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결단합니다. 그 말은 네가 먼저 좋은 것을 다 가지고 나를 떠나라는 말입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선이 굵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패한 이 백성을 다 진멸하고 네 자손만으로 다시 시작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이 백성을 용서하소서,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면 나도 이 백성과 함께 죽겠습니다” 하고 의지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서 그 백성을 구원해 냈습니다. 모두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버린 모습들입니다. 그 대의는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큰 열매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대의를 저버린 결과도 있습니다. 

사울은 부하 다윗이 백성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에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그를 죽이려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 시에 군인을 빼내 그의 뒤를 쫒는 우를 범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시는 지경에 이릅니다. 대의를 버리고 자기 안에 갇히면 자기 밖에 모르는 작은 사람이 되어 마침내는 버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추구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큰 뜻을 구하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뜻은 사랑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대의의 뜻을 가진 사람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한창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그때 갑자기 한 신자의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그런데 그 전화의 컬러링이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음이었습니다. 순간 교회 안이 조용해졌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의를 가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어진 사역에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작은 것의 배려 

성공한 사람들은 작은 지출에도 신경을 씁니다. 성공한 기업인 들을 보면 비용 절감방법에 연구를 집중합니다. 종이 한 장도 아끼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그러니까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까짓 쩨쩨하게 그러느냐고 한다면 그 정신이 바로 자신을 망하게 만드는 오염된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5병 2어의 기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고 주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하찮은 것이지만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앓아 누워있는 소녀의 소식을 들으시고 만사를 제쳐두고 그 소녀를 찾아가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작은 것에 둔감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무시합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일어나는 큰 사건들을 보면 모두 사소한 원인에 기인함을 보게 됩니다. 작은 기본을 무시해서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에, 들의 꽃 한 송이에, 겨자씨를 비유로 말씀하셨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끝까지 찾아 헤매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작은 관심들이 마침내는 인류구원의 거대한 꿈을 실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작은 것들도 무시하거나 경하게 여기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행동하심 

성경에서 가르침의 중심은 산상수훈의 교훈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이론이 아니고 머리로 알고 있음이 아닌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주리거든 먹이고, 이 뺨을 때리면 저 뺨도 돌려대고, 겉옷을 구하는 사람에게 속옷도 거절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애통하는 자가, 온유한 자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화평하게 하는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두 행동을 주문하신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동하는 삶”입니다. 10계명이 모두 “행동을 요구”하는 계명입니다. 복음서에서 요구하는 삶이 모두 “행동을 요구”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방법도 이론이 아닌 발을 씻기시는 행동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승 중의 스승이고 지도자 중의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행동이 기초이고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수도했습니다. 앉아서 생각으로 마음으로 수도사의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이것이 기독교가 아니지 않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 제자의 삶은 산속에 앉아서 도를 닦고 수도나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진정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세상에 나아가 행동하고 함께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수도원을 뛰쳐나왔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와서 가르침 받은 그대로 행동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앉아서 가르치기만 하신 것이 아니고 스스로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에 성공하신 것은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동도 자신을 위한 행동이 아니고 대의를 위한 행동의 삶을 사셨고 보여주셨고 강조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심 

예수님에게 있은 감성 중 가장 큰 감성은 긍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불쌍하게 바라 보셨습니다. 병자들을 바라보실 때도, 죄인들을 바라보실 때도, 산에서 성을 내려다보실 때도,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바라보실 때도, 십자가상에서 옆에 있는 강도를 바라보실 때도 모두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고 눈물 흘리신 눈물의 의미는 가장 극에 달하는 긍휼의 모습이었습니다. 얼마 있으면 망할 도성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부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생각 없이 살아가는 당시 우매한 민중들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그 마음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역사를 꿰뚫어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지도자에게는 그런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안목은 자신의 차원을 넘어야 그 안목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모두 포로로 잡혀가기 직전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때에 4촌 하나멜이 찾아와 “내 밭을 사라”고 할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땅을 사 들였습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고 상황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희망을 잃고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백성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주려고 사 들인 것입니다. 오늘 이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도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사 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대의의 뜻을 지닌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지도자는 그 시대를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에게는 그런 사명감과 생각과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지도자들은 그런 생각이 부족합니다. 정보를 미리 알아내서 값싼 땅을 사 들여서 값이 오른 후에 비싼 값에 팔아먹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익은 주어질지 모르지만 지도자는 못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긍휼히 보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밤새워 눈물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지도자입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이 긍휼의 뜻이 있습니다. 모두를 생각하고 모두를 염려하고 모두의 안녕을 생각하고 자기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성공하신 것은 이 대목이 가장 강렬한 내용일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큰 뜻, 대의, 세상을 사랑하는 큰 목적을 위해서 공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성공한 것입니다. 

 버트란트 러셀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에게는 인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술회했습니다. 나는 저런 비인격적인 모습을 가진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열매가 없다면 나무 책임이 아니고 주인의 책임이 아닌가, 더구나 그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을 철이 아님에도 열매가 없다고 저주해서 말라 죽게 한 것은 예수에게 인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너무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 사건의 이미는 그런 상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그 시대의 지도자들에게 보이신 심판의 메시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가 말라가는 그 모습을 보며 그 시대의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분노를 쏟음이 아닌 그 시대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움으로 내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고 불이 내려옴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의 역사에 우상숭배의 전통에서 벗어나고 우매한 백성들이 무지에서 깨닫고 눈이 열리고 신앙이 바로 잡히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궤도를 이탈한 백성들의 영적 수준이 다시 바로잡히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한 것은 당장 배고픈데 열매가 없다고 화가 나서, 신경질이 나서 저주하는 그런 의미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는 향유 병을 깨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행동은 단지 열심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순간입니다. 지금은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길을 가고 무엇인가 행동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향유 병을 깨서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해서 고이 간직한 마음을 드리기 위한 그 차원이 아닙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고 죽는 문제 차원을 훨씬 넘는 큰 결단을 내려야할 시점입니다. 내가 살고 죽음의 차원이 아닌 내 민족이 살고 죽는 문제에 나를 던진 것입니다. 그 마음이 대의를 이루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 이전에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행동이고 몸부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으로 제자들을 훈련하고 사역을 감당하고 병자들을 고치셨고 전도하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도 내 재산을 돌보고 내 재산인 양들을 사육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당부는 적어도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이 세상을 고치고 싸매고 하나님을 뜻을 이루라는 큰 뜻을 위임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큰 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틀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큰 발자국입니다. 

 예수님이 때가 된 줄 아시고 마지막 날 밤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함을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이제는 나를 볼 수 있으나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갈수 없으리라”(33)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는 왜 못 갑니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이라도 버리겠나이다.”(37)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38) 이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베드로처럼 장담도 약속도 서원도 잘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약속은 대부분 허물어져버리기 일쑤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우리는 이 대의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는 일이 너무 서툽니다. 우리에게는 대의라는 큰 뜻을 이룰 만한 의지가 약합니다. 왜냐하면 대의 보다는 내 뜻, 내 차원, 내 이익에 더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때로 큰 뜻을 품었다가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큰 뜻을 품고 행하고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리셨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도 이같이 하라”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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