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심령이 가난하면 행복합니다 (마 5:1~3)

  • 잡초 잡초
  • 262
  • 0

첨부 1


심령이 가난하면 행복합니다 (마 5:1~3)


무엇보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행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6:24~26“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참 행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해 지려고 해도 재대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행복은 어떤 것일까? 

어린 시절 가끔 오시는 손님 가운데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오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분이었습니다. 잠간 쓰다가 버릴 장난감이나 먹을 과자를 선물 받았을 때 참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만 이런 것들은 한시적인 것들 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처음 오시면서 행복의 선물 보따리를 풀어 주셨는데 그 말씀이 팔복이라는 보따리입니다. 예수님께는 첫 번째 설교부터 행복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행복은 보통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외적인 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대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기루와 같은 행복을 따라다니다가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갑니다. 행복을 어떤 외적인 조건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허송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행복할 것이고 인기가 있고 유명한 사람은 행복할 것이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것은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재산의 격감, 건강 악화, 계획의 실패, 등등 변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행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과 기쁨과 행복은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적인 평안, 기쁨 내적인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그의 행복이 내면에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행복을 잃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나 바울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고, 말씀처럼 제아무리 핍박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그 기쁨 그 행복은 빼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행복은 외적인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면이 행복하면 외적인 것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어떤 영향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참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잠깐 가난하다고 하니깐 어떤 빈털터리 신세를 연상하게 되는데 그래서 무조건 집 없고 헐벗은 가난한자들을 염두에 두어 두게 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가난의 복 앞에 심령이라고 하는 주어격 형용사가 있기 때문에 어떤 외적인 상태를 말씀하심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마음이란 겸손한 마음입니다. 
높은 곳을 올라가려는 의지는 있으나 자신은 그렇게 할 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고 무릎을 꿇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며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곤고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시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정으로 행복지려면 먼저 자신의 부족을 알아야 합니다. 파스칼이 남긴 말이 생각납니다. 『너 자신을 알라.』 우리 자신을 알면 하나님 앞에서 함부러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불의한 모습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전능하시지만 자신은 무능하고 온전치 못해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을 갖지를 못하였습니다. 죽음이 임하며 모든 것을 두고 가야하는 물질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지식이 아무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조금 안다는 것 가지고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조그만 힘을 가져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가지고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마음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좀 많이 배우지 않았습니까? 좋은 가문, 좋은 신분, 세상 적으로 잘 나갔던 그였지만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내어 버리고 참으로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압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자를 들어 쓰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마지막까지 자신의 부족을 고백합니다. 

출 4:10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가 처음 하나님이 불러 사용하실 때 뭐라고 고백합니까? 

렘1:6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에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 

베드로로 역시 예수님이 그를 부르실 때 어떠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대단한 자라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둘째로,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잠시 여기서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선뜻 예수님을 따랐을까? 베드로는 고기 잡는 뱃사람인데 성격도 다혈질이고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 말 한마디에 배와 그물을 벼려두고 예수를 따를 수 있었을까? 

문제는 예수님께서 부르시던 날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기위해 애를 써 보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깊은 데 그물을 내리우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고 말씀에 순종의 결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고기를 낚을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만선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상태가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 경험과 지식을 갖는 신앙이 아닙니다. 삶으로 변화되는 신앙입니다. 삶 속에서 적용되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신앙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기독교가 지식의 종교라고 하면 신학교 교수가 가장 믿음이 좋을 것입니다.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축복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길거리 약장사가 그 축복을 차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말씀을 알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마음입니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슴으로 느끼고 간직하며 살아 갈 때 축복이 임하는 겁니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 때 축복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자신 위주로 살았지만 예수 믿고 변화되면 먼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음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멸시받는 것도 상관치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기쁘게 여깁니다. 


* 가난하면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는 거지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항상 보면 무엇을 얻기 위해 구걸하며 삽니다. 그래서 가난한자는 은혜를 사모하게 되어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허전함과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영적인 갈급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먹고 또 먹어도 부족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사람은 먹고 먹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시간도 늘어납니다. 심령에 필요한 것을 간절히 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삶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 자체가 행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삶은 심령이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에 주린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며 은혜를 사모하며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엡4:21-24 “ 진리가 너희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해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세 사람을 입으라.”


셋째로, 마음이 가난하면 행복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어린 아이에게서 찾습니다. 젖을 사모하는 아이에게는 항상 어미의 젖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배고픈 기색이 보이면 애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앉고 젖을 물리죠. 그렇게 배고파 울던 아이도 금세 울음을 그치고 젖을 빨면서 어느새 쌔근쌔근 잠이 듭니다. 우리가 잠이든 아이를 보면서 아이의 가장 행복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인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팔복 중에서 첫째가 되는 복, 이것이 다름 아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천국은 소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거지 나사로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는 천국을 차지하는 복을 얻었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단순한 고난의 길을 걷는 고난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삶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천국의 삶을 살게 됩니다.

천국이란 무엇일까요?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을 말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만이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믿은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가장 귀한 곳입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곳이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범사에 나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그 것이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면 그 자체가 행복한 천국의 삶이 됩니다. 

세상 적으로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살더라도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큰 집을 가지고 있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영적인 행복을 갖지 못하면 불행하게 살게 됩니다. 사울을 보면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왕으로 살았지만 말년에 불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그는 마음에 항상 번뇌가 있었으며 평안하지 못하였습니다. 항상 경쟁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았고 미움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삼상 16: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신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오늘 날 한국 사람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울증으로 고생을 한다고 합니다. 가장 큰 마음의 병 중 하나입니다. 우울한 마음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마음은 악한 영이 지배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지배하며 성령이 통치하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하려면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천국은 누가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까? 천국은 부자가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를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 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육적인 세상이 아닌 영적인 세상입니다. 천국에 가면 육적인 것으로는 만족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면 넓은 집에서 풍성한 먹을 것을 주신다고 하는 데 천국은 집을 소유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육적인 욕심을 채우려면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인 곳이기에 안 먹어도 행복한 곳입니다. 천국은 좋은 분이 함께 계심으로 행복한 곳입니다. 성경은 천국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루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천국은 풍성한 곳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게신 곳이기에 모든 것이 다 있는 곳입니다. 사람의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좋은 것으로 충만한 곳이 천국입니다. 만국의 영광과 존귀가 다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계 22:26) 속되고 가증된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계 22:27) 예수님께서 먼저 가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곳이며 믿음의 선배들이 먼저 들어간 곳입니다. 우리도 반드시 가야 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어떠한 희생을 하더라도 갈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마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제 우리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원래 가난한 자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죄인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무지한 자가 나는 무식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신을 바로 알면 가난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으니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을 바로 알고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의 선물을 받고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바로 알고 살면 행복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을 소유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