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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흔들리지 않음 : 칭찬 비난 위협 속임수에도 (잠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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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음 : 칭찬 비난 위협 속임수에도 (잠 4:23)  


웬만큼 마음 단단히 먹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충분히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마음이 쓰려서, 실망이 돼서, 되는 일이 없어서, 때로는 일이 잘돼서,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 같아서, 천하가 내 손안에 있는 것 같아서 우리 삶은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흔들거리다보니 내 삶을 지지했던 말씀도 사라지고 삶의 원칙도, 기대와 소망도, 흔들리는 상황 속에 다 매몰됩니다. 
어느 날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안타까움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은 성도의 영성회복을 위한 덕목 중 여섯 번째 주일로써 흔들리지 않는 삶에 대해서 묵상해보려고 합니다. 
이미 수용, 회복, 자신감, 이해와 사랑,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위에 더하여 오늘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마음쓰임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갈길 가고-갈 때까지 가는 -결국 주님이 원하셨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지는 성도되기를 소원하며 오늘의 말씀을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립니다. 나뭇잎도 흔들리고 나뭇가지도 흔들릴 것입니다. 더 강하게 바람이 불면 뿌리가 얕고 줄기가 약한 나무는 쓰러지게 되고 뿌리 채 뽑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강한 바람보다 더 강한-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고 둥지가 굵은 나무는 결코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폭풍 이는 밤이 지나고 아침에 해가 솟아오름과 더불어 이 나무는 하늘을 향해 우람히 솟아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수려하게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흔들림이 없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마음도, 생활도, 삶의 자세도, 모습도, 언제보아도 든든하고 아름다운 그 모습을 지니시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를 흔들리게 하는 것들과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대처의 모습을 잠시 생각해 봄으로 흔들림 없는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칭찬을 받음으로 흔들리는 삶과 그 흔들리는 삶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잠언 27장 2절>을 보면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시련하는 것은 칭찬입니다. 
칭찬받게 되고 어떤 일 좀 잘되고 사람들에게 박수 받게 되면 우리 삶의 전열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잘못되고 힘들어서 하나님과 멀어지고 흔들리는 삶도 있지만 오히려 잘되고 은혜와 축복 속에 거하니 더욱더 힘들어지는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노아의 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준비하는 과정 중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방주를 지을 때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무슨 마른하늘에 홍수가 난다고 배를 지을까?'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 조롱도 참고 노아는 묵묵히 그 배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백성으로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홍수가 나고 사람들이 물에 다 쓸려 죽어가는 순간 노아는 방주 안으로 들어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고 믿음의 선한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 나와 노아가 편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노아의 실수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어느 날 술에 취하여서 부끄러운 하체를 자식들에게 보이게 되는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 아들 하나는 그 아비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하여 몰래 가서 그 아비의 하체를 가려줍니다. 그러나 또 한 아들은 그 아비의 부끄러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발설함으로 말미암아 아비를 조롱거리로 만듭니다. 깨어난 노아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를 조롱거리로 만들었던 아들을 저주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 한 아들의 후손은 대대로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아들의 실수로 말미암아 큰 저주가 임하게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노아의 실수였습니다. 

자신의 실수가 기화가 돼서 그 아들이 실수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하는 모든 한 아들의 자손들을 다 저주하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위기는 이렇게 모든 것이 승리한 이후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여리고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에 빠진 것은 전투중이 아니라 전투가 끝나고 전리품을 취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은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개인적인 탐욕을 위하여 훔쳐서 숨겨두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악의 근원이 되어 그다음 작은 아이성의 전투에서 그들은 대패하게 됩니다. 

아간을 찾아내어 그 모든 것을 훼파한 다음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 전투에서 다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떤 일이 잘 안될 때뿐이 아니라 잘 되었을 때 실수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게 되는 이와 같은 경우를 겪게 됩니다. 

다윗의 경우도 피해 다니는 때만이 아니라 왕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됩니다. 
피해 다니는 때에 그는 작은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애절함 속에 살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그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모든 일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마음에 혼돈이 생겼습니다. 그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음에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가는 정직한 마음이 어느 날 흔들리게 되고 그는 뿐만 아니라 마음에 탐욕이 생겨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왕이 될 때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묻고 하나님의 은혜대로 그 모든 것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때 그는 하나님께 묻는 행위를 삭제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을 따라 실행하게 되는 결과 그 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편안해지고 강성하게 되면 영적으로 무디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칭찬받고 잘될 때 흔들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의 백성에게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가나안에 입성하게 되면 너희는 그들과 협약을 맺지 말고 그들과 통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상을 너희도 섬기게 될 것이고, 너희는 결과적으로 나를 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동안에 그렇게 교육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신명기에서 또다시 그들에게 교육을 합니다. 
가나안입성을 앞둔 신명기에서 또다시 교육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와 같은 애처로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범죄한 인간들은 가나안에 입성하여서 그들과 협약을 맺고 통혼함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배교하게 되는 이와 같은 일을 겪으니 사사기에 비극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잘 되었을 때 흔들릴까요? 
잘됨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때를 잊어버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되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게 됩니다.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마치 내 능력과 내 힘과 내 수고와 내 노력과 내 땀만으로 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취하여서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조차 잊어버리게 됩니다. 마치 내수고와 내 능력 때문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이루게 하실 때, 우리 기도의 응답을 주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게 하시고, 노력하게 하시고, 땀 흘리게 하시고 힘써서 그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수고하고, 땀 흘리고, 애쓰고, 노력하고, 쉬지 못하고 일한 우리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착시현상입니다. 

그러나 누가 수고할 마음 주셨으며, 누가 수고할 건강 주셨으며, 누가 수고할 능력 주셨으며, 누가 지혜를 주셨으며, 누가 그 모든 여건과 형편을 주셨는가 생각하면 우리가 가졌던 모든 생각이 너무나 허무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근본을 이루면 우리는 모든 수고가 나로 말미암아 이뤄지고 모든 결과가 나로 말미암아 내 수고, 내 땀, 내 노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더욱이 반복되는 승리와 편안함속에 우리가 영적으로 무디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적 갈급함이 없어집니다. 어려움이 있어야 우리는 영적으로 갈급해집니다. 기도거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도에게 어려움이 있다면 하나님의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의 영성을 깨우치고 유지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교만의 지경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을 내 힘과 내 노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누가 내 힘과 내 노력을 이루게 했겠습니까? 수영장에서 헤엄치며 마치 온 세상 바다 전부를 헤엄쳐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 있습니다. 수영장에는 파도도 없고 상어도 없고 그리고 망망대해 고독함도 없습니다. 

위기가 없다고 생각되는 때가 가장 큰 위기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강할 때는 어려움이 있고 위기가 있으나 그 어려움과 위기를 헤쳐 나갈 때 우리는 영적으로 강한 것입니다. 위기가 없으면 우리는 무기력해지고 위기를 헤쳐 나갈 마음에 강인한 동력도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가 전혀 없는 평온한 때가 가장 위기임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칭찬으로 인해 흔들리는 길에서 승리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나의 근본출발을 항상 잊지 않고 스스로 주지시켜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백성이 온 세계만방에 펼쳐져 살면서도 그들은 유월달이 되면 발효되지 않은 굳은 빵과 쓴 나물을 먹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애굽에 430년이나 종살이하던 그 아픈 세월들을 생각하며 다시는 나라를 잃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으니 그 하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여야 되겠다는 마음을 다시 다지는 겁니다. 

광야에서 그 어려움을 겪었고 광야를 건너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초막절이 되면 밖에 나가 초막을 치고 그들은 광야의 생활을 재연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광야의 어려운 생활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주셨던 은혜와 능력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어려운 시기를 잊지 않고, 근본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잊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절기의 근본정신입니다. 지금의 상태가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상태가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는 더 최고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선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최고 최선의 가장 큰 적이 뭐죠? 차선이라고 말씀드렸죠. 
더 잘할 수 있는데 이만하면 됐다라고 머무르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어려움이란 말이죠. 우리는 더 잘할 수 있고, 우리는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갈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더 이루어드려야 하는데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하고 우리자신이 거기서 주저앉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은 이루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전 생애 동안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지경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더 높은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우리를 인도해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꿈을 이루려는 간절한 소망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나쁜 것이 뭐냐면 권태입니다. 좋은 일도 계속하다보면 권태롭게 되죠. 
그 좋은 일이 그 수준을 높여서 더 좋은 지경으로 나가지 않으면 단순, 반복, 재생산은 우리에게 권태를 주는 것입니다. 현재 상태에서 새로운 목표가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마음에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선한 꿈을 주시고 날마다 새로운 은혜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숨 가쁘게 달려가는 그와 같은 마음의 열정을 더하여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만하면 됐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경주해야 합니다. 

두 번째 비난과 위협과 속임수에 흔들리는 삶의 모습을 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이해 수 있을까요? 느헤미야서를 보면 느헤미야에게 수없는 어려움과 고통과 속임수와 위협과 비난과 조롱이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할 때 이미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은 느헤미야에게 좋지 않은 풍문을 퍼뜨리려고 노력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러저러한 뜻이 있어서 너에게 와서 이런 말하나 그것은 다 거짓말이라고 풍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의 마음을 결속하고 그들의 힘을 합하여 예루살렘 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곽이 한층 한층 쌓아져 올라가는 것을 볼 때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은 오히려 조롱합니다. 

너희가 쌓아가는 성곽은 여우 한 마리만 올라가도 무너지겠다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사람들의 힘을 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그 일을 지속합니다. 이제는 협박을 시작합니다. 내가 군사를 이끌고 와 너희를 일거에 다 전멸시켜 버리려고 하나 느헤미야는 거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손에는 병기를 들어 방어하게 하며 한 손에는 건축기계를 붙잡고 그 일을 진행합니다. 한 손으로는 방어하며 한 손으로는 끊임없는 진행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또 다른 풍문을 퍼뜨립니다. 

느헤미야가 이와 같이 성곽을 수축하고 그가 스스로 왕이 되어 모반을 하려고 하는구나! 그럼으로 말미암아 느헤미야에게 모반을 하게 한다는 풍문을 퍼뜨림으로 말미암아 느헤미야와 백성사이를 이간합니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에게 협약을 요청합니다. 

"자, 오노평지에 와라. 네가 이러이러한 풍문 때문에 어려워하는데 거기 와서 협약을 맺고 너의 어려움을 구해주마."그러나 그것은 거짓 속임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오노평지에 오면 그를 죽여 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노평지에 가지 않았어요. 그것은 나와 관계없는 풍문이고 내가 그런 풍문 때문에 너를 만나서 내가 너와 협약해야 될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단번에 거절해버렸습니다. 

이제는 거짓 선지자 스마야를 돈으로 매수합니다. 그럼으로 느헤미야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스마야가 두문불출할 때 느헤미야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스마야를 찾아갑니다. 
"선지자여 무슨 일이니이까, 아픕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스마야가 얘기합니다. 
"내가 보건데 네가 이제 암살을 당하여 죽게 될 것이다. 너는 그러니 성전외소로 가서 네 목숨을 부지하라."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기서 혼돈되어야 될 상태에서 그는 정신을 차립니다. 
흔들려야 될 상태에서 그는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나 같은 것이 제사장의 족속도 아닌데 어떻게 거기에 갈 수 있겠습니까? 내가 거기 가면 율법을 위반하여 하나님 앞에 죽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에게 암살당하여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손에 율법을 어겨 죽는다면 그것은 내가 더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율법을 어겨 죽는 것보다 사람에게 암살당하여 죽는 것을 난 택하겠습니다." 하고 이와 같은 스마야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에 원칙을 지켜갔을 때 그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비난과 위협과 속임수가 난무합니다. 끊임없는 조롱과 끊임없는 모략으로 우리는 곤고한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거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거나 하나님의 뜻이 진행될 때 반드시 사단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단의 도구가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단의 계략을 분쇄하고 승리로 나아가는 승리의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어려움이 가중되고 위협과 속임수와 비난이 가중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사단이 공격도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도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사단이 공격해야 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비난과 위협과 속임수로 인한 흔들림에서도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계획과 승리의 비전속에 그 어떤 것도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진행했던 것입니다. 결국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승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곽을 수축하여 완성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수문 앞에서 그들은 모여 학사 에스라를 모셔 영적 대부흥의 역사를 이룹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그들은 절기를 회복합니다. 
십일조를 회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성을 회복하게 되고 마침내 그것을 통해서 영적인 대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은 성전을 개혁하고 성전을 정화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나가서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이와 같은 온전한 사회생활 속에 개혁까지 이루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방해와 얼마나 많은 비난과 속임수와 위협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흔들리지 않는 느헤미야 행보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와 같은 어려움이 있는데 저들을 분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그들을 분쇄하여 주시기를 요청했고 느헤미야는 묵묵히 그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우리는 많은 비난도, 조롱도, 위협도, 협박도, 속임수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처리해주실 것을 믿으며 우리의 가야 할 길을 뚜벅이 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 삶의 승리를 이뤄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시기와 질투 혹은 비교 속에 우월이나 실망 속에 흔들리는 삶의 길이 우리에게 열려질 때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것은 인생의 가장 추악한 감정입니다. 

비교라는 것은 우리 인생을 왜소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사단의 방법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흔들릴 때가 있단 말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동시에 예배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어요. 
가인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돼요. 왜 내 제사를 받지 않았을까? 
그 원인을 찾아서 '아, 하나님이 피 있는 제사를 원하셨구나!' 하고 그렇게 하였으면 가인은 하나님 앞에 그의 제사도 받아들여지는 사람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그 순간 가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은 돌아다보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는다고 생각하여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를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칭찬받으면 '참 좋다.' 내 형제고 내 자매고 그와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를 대하면 우리는 은혜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의 감정은 사단이 우리를 미혹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와서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는지 아니? 그걸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되니까 하나님이 그러지 못하게 한 거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단이 우리에게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뭐냐면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 집착하게 하는 거예요. 정말 작은 시기와 질투의 마음, 작은 일에 대한 질투의 마음, 작은 일에 집착하게 해서 그걸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해서 거기서 빠져나오질 못하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어쩌다 보면 자꾸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생각하면 너무나 사소한 거예요. 너무나 우스운 일이에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말라고 하는데 정말 너무나 사소한 일이란 말이에요. 그거 그냥 쓱 지나가도 돼요. 나중에 생각하면 '내가 지나가기 잘했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 사단이 하는 일이 뭐죠? 자꾸 분석하게 해요. 
분석하고 또 분석해서 이게 지나치면 뭐가 되죠? 정신분열이 되는 거예요. 이게 지나치면 정신 분열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나치게 분석하게 되는데 나중에 종합해서 결론을 못 내리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못해요. 

여러분, 밤새 고민한 것, 그 생각 믿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밤새 고민한 게 아니라 깊은 잠자고 좋은 컨디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마음에 확신과 자신감가지고 내가 이렇게 결정했을 때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각오와 자신 가지고 결정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이 최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하다 생각하고 마음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마음을 넓히지 못하면 우리는 작은 일에 집착하게 되고 작은 일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큰 섭리와 원대한 뜻을 보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큰 어려움을 거치게 됩니다.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한 면만 보면 그것이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러나 또 다른 면을 보면 거기에 또 다른 면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편협하게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여쭤볼게요. 

여러분, 어저께 야구 보셨습니까? 안 보셨어요? 
오늘 주일이니까 내가 좀 일찍 자고 내일 예배 잘 드려야지. 하고 야구 안 보셨어요? 
저는 봤습니다. 다는 못보고 끝에 가서 좀 봤는데요, 너무 너무 재미있었어요. 

맨 마지막에 9회 말에 쿠바가 공격을 하는데 우리나라하고 1점차인데 이게 원아웃에 만루가 됐어요. 누가 나와서 희생번트를 대던지 외야 플라이만 하나 날려도 동점이 되고 벌써 게임이 기울어져서 우리가 진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 몰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거기에 포수까지도 항의하다가 퇴장당해서 대체할 포수가 부상당한 상태라서 제대로 활동도 못 하죠, 또 투수도 흔들리니까 교체를 했죠, 참 큰 문제란 말이에요. 그래서 두근두근하게 던지고 있는데 야구의 묘미는 그 긴장 속에서 무엇이 나올까? 하고 기다리는 거잖아요. 
탁 던졌더니 스트라이크예요. 그다음 두 번째도 던졌더니 스트라이크예요. 세 번째 던졌는데 쿠바선수가 뻥 쳤는데 어떻게 됐냐면 안타깝게 수비의 달인 박진만이 앞으로 굴러가서 병살타가 됐어요. 박진만이가 수비를 얼마나 잘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너무 좋아 했어요. 이제 박진만이 잡아서 2루에 던지고 2루에서 1루로 송구하고 이승엽이 1루에 있잖아요. 그래서 딱 찍고 나서 좋다고 뛰어나오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예요.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받았다고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저도 너무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탁 나더라고요. 무슨 생각이냐면요, 저 병살타를 친 쿠바선수의 마음은 어떨까? 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 나라 굉장히 못사는 나라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기서 우승 못해도 와서 먹고 사는 것은 지장이 없을 텐데 그 나라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운 사람인데 야구 하나에 목숨 걸고 그의 식구뿐이 아니라 그의 일가친척까지 다 걸려있을지 모르는데 정말 그 사람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너무너무 서늘해지는 것 같아요. 

정말 거기서 뭐 아주 최악의 경우에요. 그 사람은. 거기서 그냥 번트를 대든지 희생플라이 하나 날려도 그냥 점수가 나는데 최악의 병살타를 친 거예요.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니까 또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쪽면만 보면 기쁘지만 또 다른 면을 보면 또 전혀 다른 얘기에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한쪽면만 가지고는 얘기가 안돼요. 또 다른 면도 보고, 또 다른 면도 보고, 모든 경우를 봐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해서 거기에 집착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져요. 사실이 아니거든요. 

우리 삶이라는 것은 너무나 다행이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모든 것 중에 한 부분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나치게 작은 일에 집착한단 말이죠. 사단이 우리를 그렇게 편협하게 만드는 거예요. 비교 속에 우월이나 실망, 열등감들을 생각합니다. 비교는 사단이 우리에게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교 속에서 착각하게 되죠. 비교 속에서 우리가 좀 나으면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우습게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하나 우습게 볼 사람 아무도 없어요. 누구하나 우습게 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비교 속에 열등감이요? 
우리는 훌륭해요.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에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은 그도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우리가 나도 열등감에 빠져서는 안돼요. 왜냐하면 나도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우리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다고 생각하면 우린 너무나 감사해요. 
자연에 가면 그와 같은 것을 느끼죠. 돌멩이는 돌멩이대로, 큰 바위는 바위대로. 
조그만 돌멩이가 큰 바위보다 열등하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섭리 속에 모두가 제 몫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바위가 작은 돌멩이보다 반드시 우수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숲에 가면 키가 큰 나무도 있고, 바닥에 깔리는 풀도 잡목도 있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에 기생해서 자라는 줄기 덩굴나무도 있어요. 그런데 어느 것이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어울려 자연의 장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동물들도 있겠지만 나무나 이와 같은 것들을 파먹고 사는 작은 벌레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필요 없을까요? 

아니요. 그 벌레들이 무너지면 먹이 사슬구조가 끊어져 모든 자연 생태계자체가 다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중요해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중요합니다. 
자연의 특징은 어울림이에요. 다양한 것들이 어울려서 자연의 세계에 장관을 연출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다양함을 인정해야 돼요. 나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인정해야 되고 나하고 다르기 때문에 인정하고 나하고 생각이 틀리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를 도와줘야 합니다. 
제가 미술관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뭐냐 하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림들이 있잖아요. 거기에 번호가 붙어있으면 특별한 설명이 붙어있는 거잖아요. 귀로 듣든지 아니면 책으로 읽든지 특별한 설명이 있는 좀 유명한 그림이고요. 뭐 미술책에서 봤던 그림들이 있고... 

그럼 가다보면 그것만 먼저 눈에 띄면 그거 보고 또 다음 걸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 때 중요한 게 뭐냐면 미술관에 가면 그림이 너무 많잖아요. 그런데 그 중요한 그림을 보고 그 옆의 작가들은 비교적 덜 알려진 작가라고 생각하면 그냥 지나서 그다음 중요한 그림으로 가는 경향이 있단 말이에요. 물론 시간이 없으니까 중요한 그림 몇 점 보고 가야 되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요.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니 그래도 이 훌륭한 미술관에 여기 붙을 수 있는 정도의 작가나 그 그림이라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간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마다 아니지 하고 다시 또 머물러서 보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우리 인생에 아주 훌륭한 몇 사람만 훌륭한 것 아니에요. 그 사람만 있어서 세상이 움직이는 것 아니에요. 역사의 주역으로 나온 사람도 있지만 그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구성되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행전 보세요. 거기는 전반부에는 베드로얘기, 후반부에는 바울얘기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베드로와 바울만 가지고 초대교회가 형성됐을 것 같습니까? 수많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동역자들이 수고하고 애썼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역사가 열려졌던 것을 우리는 봅니다. 누구든지 훌륭해요. 하나님의 작품은 무엇이든지 훌륭하다는 겁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 있으면 지배하고 싶고 나보다 나은 사람 있으면 넘겨 뜨려 내 발 아래 두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악한 마음입니다. 인간의 심성에는 악함이 있어요. 우리는 약함을 씻어내고 떨궈내야 해요. 

시기, 질투, 비교로 인한 흔들림에서 승리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시기, 질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루신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아름답게 볼 수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은 작은 마음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잘됨을 내 것으로 누릴 줄 아는 축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존중사상이에요. 
이것은 하나님과 생각해서 우리 인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를 매우 존중하는 거예요. 나를 존중해야 돼요. 자기를 존중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행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내가 중요하고 존중해야 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존중해야 돼요. 우리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작품이란 말이죠.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누구든지 품을 수 있어야 돼요.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욕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 나에게 모든 풍문으로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짐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수시로 깨닫고 나의 근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서 집착되지 않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바라보는 큰 시야를 가져야 됩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축복의 작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삶에 바람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이 정체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내일 날씨 맑게 해주십시오." 
날마다 이런 기도만 하면 안 되죠. 날씨 하루도 빠짐없이 맑으면 이 세상은 사막이 되고 말겁니다. 비오는 날도 있고 눈보라치는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도 있어야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유지되는 겁니다. 
우리는 인간의 생노병사를 생각합니다. 세상에 났으면 이 세상에서 자라고 늙어지고 또 아프기도 하고 죽어지기도 해야 이 세상에 자연의 모든 섭리가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어진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모든 섭리체계 자체가 무너지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되 그 가운데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속에 순행하며 가다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우리의 모든 것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 삶의 근본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서 그 순간순간을 통해서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을 이루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주보에도 썼지만 맑은 마음가지고, 밝은 마음가지고 승리하는 성도 돼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우리 마음을 맑게 가져야 돼요. 우리 마음을 밝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심정을 가져야 돼요. 마음먹은 대로 생각되고, 생각한대로 행동하고, 행동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애써야 돼요. 

삶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그 문제를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기회로 삼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시편 35편 27절>보면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방대하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형통케 됨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어떤 순간에도 형통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잠언 24장 10절>이하를 보면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순간 엎드러져도 다시 일어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백성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우리를 다 기쁘시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선물 받으면 포장지 풀어야 하는 수고가 있습니다. 좋은 선물일수록 견고히 쌓고 더욱 여러 겹 쌓았을 것입니다. 좋은 것 받으려면 더 많은 수고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간의 흔들림과 여간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음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흔들리지 않아야 됩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은혜의 과정으로 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들 돼야 합니다. 

우리 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 흔들리지 않는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흔들리지 않는 주의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견고한 성도들 되어 흔들림 없이 하나님 나라에 영광을 이루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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