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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강하고 담대하라 (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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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담대하라 (수 1:1~9)


북경올림픽이 오늘 폐막합니다.  이번에 우리 선수들이 정말 잘 해서 예상외의 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특히 어제 야구금메달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구기 종목에서 전승으로 우승한 한국야구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온 국민에게 큰 기쁨을 준 경기였습니다.   

올림픽의 경기종목은 28개가 주요종목입니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더 나누어집니다.  한 종목마다 나름대로 의미 있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종목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이 유독 강한 양궁은 스포츠과학의 결정판이라 불릴 만큼 정교한 운동입니다.  대부분은 운동은 훈련과 체력과 조절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양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모든 운동에는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선수들이 4년, 8년 동안 열심히 준비하기에 실력에 있어서 월등한 차이가 나지 않는 한 당일 경기에서 얼마나 실수를 줄이느냐가 승패의 관건입니다.  그 가운데 양궁은 아주 작은 실수의 오차가 승패를 좌우하는 대표적인 경기입니다.  양궁은 화살을 당기는 그 순간 기후나 환경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소리와도 무관하게, 얼마나 긴장하지 않고, 평소에 연습한 것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양궁의 훈련은 기본훈련만이 아니라 담력훈련이 필수적으로 추가됩니다.  이미 서양에서는 이런 우리 선수들의 훈련을 많이 따라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은 점점 더 강하게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금년 5월에 양궁선수들은 모두 육군정보학교에서 강한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훈련에는 옷 속에 뱀을 몰래 집어넣고 견디는 훈련, 조교들이 귀신으로 분장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과녁의 10점과 9점을 표시한 노란색부분만 남기고 쏘기도 하고, 심지어는 코치가 과녁 옆에 선 상태에서 화살을 쏘는 극단적인 훈련도 했다고 합니다. 육체의 훈련을 통한 승리에도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면 신앙생활의 승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담대함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위해 강하고 담대하라고 선포합니다.  본문도 바로 담대함을 가지라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대하여 담대하라고 선포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대적에 대한 담대함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땅에 입성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을 밟았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젠 광야세대가 중심이었습니다.  그 선봉에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오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는 원주민들이 오래 동안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순히 그들의 터전을 내 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가나안의 잡신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들과의 불가피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온 백성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넌 기쁨도 잠시 지나고, 이제 이스라엘은 전쟁채비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오늘 말씀은 선포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싸워야 할 적들에 대한 선포입니다.  그들 앞에 있는 모든 적군에 대하여 강하지 않고, 담대하지 않으면 결코 승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담대함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대적입니다. 신앙생활에 무슨 대적이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싸움에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영적싸움입니다.  우리 싸움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요, 사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믿음생활을 할 때부터 공격합니다.  바로 이 싸움에서 우리가 담대함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몹시 흔들어 놓는 사탄의 공격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참소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탄은 곧 참소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참소는 비방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비방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존감을 갖지 못하게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 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말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만큼 존귀한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접하여 천국백성이 되었다면 우리만큼 하나님 앞에서 보배로운  신분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요, 왕자요, 공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난 뒤에 우리는 내 생명이 귀하고, 나의 삶이 귀하고, 내가 행하는 모든 일,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는 직분이 귀하고, 내 자체가 참으로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가치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잘못하고 죄를 지을 때입니다.  나의 약한 의지로 죄를 지으면 우리는 주눅이 듭니다.  그런 우리를 흔들어 놓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이 우리 곁에서 비방하며 참소합니다.  ‘네가 그렇게 살고도 하나님의 자녀냐, 너는 아니야, 너는 가망이 없어’ 하며 우리를 심한 죄책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런 사탄의 공격을 담대함으로 이겨야 합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합니다.  설령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할 때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가룟유다가 되지 말고 베드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죄책감에 빠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교만으로 만드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어쩌면 자존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존심입니다.  기가 죽어서도 안 되겠지만, 기가 너무 살아서 세상에 오직 자기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만은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간이 원래부터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겸손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공격입니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책감에 너무 빠져 보배롭고 존귀한 신분을 잊어버리는 성도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너무 교만하여 자기도취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자존감은 세우고, 자존심은 버려야 합니다.  사탄에 대하여 담대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습니까?  담대함으로 사탄의 대적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나 자신에 대한 담대함입니다.

신명기 마지막부분부터 여호수아까지, 그리고 여호수아가 모든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하여 땅 분배가 이루어지기까지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를 가장 잘 아는 모세도 죽을 때 유언한 말이고,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백성들이 조언한 말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한 말씀입니다.  가나안의 위대한 역사의 현장에서 왜 이 말이 이처럼 모든 사람의 입에서 반복하여 강조할까요?   그것은 바로 여호수아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역사를 위한 충분한 준비를 갖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모세가 하고, 모세가 영예를 얻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만 중도에 하차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잘 압니다.  한 순간의 실수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한 모세를 하나님은 더 이상 가나안의 역사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자기가 힘든 것을 알고 여호수아를 세웁니다.  처음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군대의 계급으로 말하면 모세가 대장이라면 여호수아는 대위에 불과합니다.  여러 여건으로 보아 쉽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의 정복을 앞에 둔 여호수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필요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해야 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는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담대함으로 정복의 역사를 완성합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그는 정말 강했고, 담대했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확신했습니다.  그 용맹이 결국 가나안을 정복한 것입니다. 믿음생활하면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에 대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나에 대해 약하고 불안하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모든 것은 바로 나부터 시작됩니다.  나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갑니다.  내가 바로 설 때 다른 사람도 바로 서게 합니다.  내가 약할 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내가 흔들리는데 어떻게 옆에 사람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 옆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나부터 살아야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제일 먼저 비상상황에 대한 안전교육을 합니다.  교육의 핵심은 한마디로 말하면 나부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려움이 생기면 남을 먼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산소마스크도 내가 먼저 하고, 아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구명조끼도 내가 먼저 입고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와도 같습니다.  내가 살지 못하면 남을 살리지 못합니다.  내가 바로 서지 않으면 결코 남을 세울 수 없습니다.  내가 약하면 남을 강하게 하지 못합니다.  결국 나와의 싸움이 가장 큰 싸움입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선수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에 대하여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자기에게 지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들은 자기와 싸웠습니다.  결국 자기에게 이긴 선수, 자기에게 대하여 강한 선수가 영예를 얻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에 대하여 담대하십시오.  내가 강하고, 바로 서야 합니다.  모든 것은 바로 나부터 시작됩니다.  늘 담대함으로 승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말씀에 대한 담대함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선포하면서 하나님은 말씀에 대해 강조합니다.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형통한 삶에 대한 조건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먼저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의 연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말씀을 지킬 때 형통하게 된다는 것도 되지만, 근원적으로 말씀 앞에 강하고 담대하라는 뜻으로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가 앞으로 진정한 성공과 승리를 얻는 길은 결국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력하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말씀에 따라 무엇보다도 그는 말씀 앞에 담대했던 사람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따라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한순간도 말씀에서 멀어지거나 떠나지 않았습니다.  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 하나의 좋은 예가 여리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나옵니다.  여리고를 어떻게 정복했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했고, 지켰습니다.  바로 거기에 승리가 온 것입니다.  간단하면서도 따라 하기 힘든 일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승리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호수아와 우리가 다릅니다.  여호수아는 말씀 앞에 담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 앞에 비겁한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고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지 않고, 행하지 않습니다.  말씀과 삶이 따로 갑니다.  경건과 능력이 따로 갑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은 없는 것입니다.  성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격이 뒷받침 되지 않습니다.  인정을 받는 것 같은데 실제는 아닙니다.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말씀 앞에 비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담대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에 담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삶의 중심을 바르고 참된 길로 나아가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기의 연약함을 늘 돌아보며 통회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삶은 얼마나 말씀대로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한없이 비겁한 자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사는 하루, 일주일은 가장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삽니다.  이 진리를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나는 과연 말씀 앞에 담대합니까, 아니면 비겁합니까?

여러분, ‘강하고 담대하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의 대적 사탄에 대하여 담대하십시오.  나에 대해 정직하고 담대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말씀 앞에 비겁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말씀을 아는 대로, 말씀이 깨달아지는 대로 삶의 현장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마음에 품고 한 주간도 담대하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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