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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리아 제단처럼 (창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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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아 제단처럼 (창 22:1~19)
 

 새 성전 시대를 맞게 된 우리는 모두가 심기일전할 필요가 있는 줄 알아서, 구 예배당에서의 마지막 주일에는 ‘파묻어버리고 새 성전으로 갑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야곱 일가가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기 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이방 신상 같은 것을 다 묻어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였듯이, 새 성전으로 이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새 성전으로 이사하여 처음으로 예배를 드린 지난 주일에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은 땅을 밟고 다녀서 더러워진 것이니,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왜 모세가 서있는 땅이 거룩하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과 관계될 때 그것은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건축한 새 성전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전이므로, 더러운 신발을 벗어버리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우리의 행위, 습관, 언행을 다 벗어던져버리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신앙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삼가 해야만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혈기와 성내는 것입니다. 혈기와 성내는 일은 신앙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리는 커다란 죄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약 1:19-20절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쉽게 성을 내고 혈기를 부리는 일은, 더러운 신을 벗듯이 반드시 벗어버려야만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신앙 공동체 생활에서 또 한 가지 삼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곧 원망과 불평불만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전염성이 아주 강한 죄악입니다. 원망과 불평 역시 신앙 공동체를 병들게 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커다란 죄악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멸망을 당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저희에게 당한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 안에서 불평불만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언행이 더러운 신발과 같음을 명심하고, 새 성전 시대에 반드시 끊고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당한 엄청난 시험과, 놀라운 헌신, 그리고 시험에서의 승리와 하나님의 큰 복주심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과 헌신을 배우면서, 우리 교회당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노년이 되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백세가 되어서 아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는데, 곧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아흔 살이 넘도록 자녀가 없었으니, 그 가정이 오죽이나 삭막하고 쓸쓸했겠습니까? 그래서 웃음도 없고, 낙도 없이 살다가, 천만뜻밖에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아들을 얻었으니, 가정에는 웃음꽃이 만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조차 웃음이란 뜻의 ‘이삭’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이니, 그 자식이 오죽이나 귀하고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면서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사랑과 정성을 쏟아 바치며 소망을 걸고 기르던 아들인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에, 참으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양을 바치라, 네 소를 바치라, 네 종을 바치라 하시지 않고, 네 아들을 죽여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박절하고 무시무시한 명령입니까? 설혹 아들이 여럿 있었다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단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소망과 기대였던 이삭을 짐승처럼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다른 누구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습니다. 그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당한 여러 가지 시험 중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그 보다 더 엄청난 시험은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심장이 정지되는 듯한 충격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경우 원망과 불평이 폭포수처럼 쏟아졌을 것입니다.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 가실 것이면, 무엇 하려 주셨나? 내가 언제 아들을 달라 한 적이 있었던가? 가만히 있는 내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더니, 주시고서 이제 다시 빼앗아 가시겠다는 말인가? 혹 소나 양을 잡아 바치라면 또 모르되, 아들을 잡아 번제로 드리라니, 하나님은 인육을 잡수시는 잔인한 신이란 말인가? 이러한 불평과 원망들이 쉴 새 없이 꾸역꾸역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던 곳으로 가더니”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단 한 마디의 원망도, 불평도 없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과 비교하면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몸만 조금 불편해도, 사업만 조금 안되어도, 자기의 계획이 조금만 뜻대로 안되어도 원망하고, 낙심하고, 믿음도, 하나님도 헌신짝 내어버리듯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께서 아브라함에게 왜 이처럼 가혹한 듯한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1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큰 축복을 받을 사람에게는 큰 시험을 하십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렇고, 욥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하나님을 믿던 아브라함의 마음에 충분한 의심을 일으킬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큰 믿음으로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던 욥도 하나님께 대하여 의심이 일어날 만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심지어 그 아내까지도 욥에게 하는 말이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면서,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당한 시험은 마치 산중에서 갑자기 호랑이나 사자를 만난 것처럼, 괴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사기에 보면 삼손이 ‘딤나’로 내려가다가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나 찢어 죽였는데, 후에 다시 그 곳을 지나가다 보니, 사자의 죽은 몸속에 벌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십시오. “잘 이긴 시험 속에는 꿀처럼 달디 단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축복을 고통이라는 보자기 속에 담아 주신다’ 또는 ‘고통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당하는 갖가지 시련도 믿음으로 잘 이겨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분명히 전화위복이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이 다시 한 번 내려지기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또 더 이상의 증거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명령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명령을 듣자마자 바로 순종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제사 드리러 갈 채비를 하였습니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즉각적인 순종과 믿음에 비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기꺼이, 그리고 신속하게 순종한 것을 보면, 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순종이란, 이해관계를 떠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하시는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길이나 되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두 종을 데리고 이삭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먼 길을 걸어서 사흘 만에 드디어 지시 받은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나귀와 두 사환을 떼어놓으면서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말 가운데는 중대한 의미가 담기어져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구절 중, ‘돌아오리라’는 말 ‘나슈바’는 히브리 원어로 1인칭 복수인데, 곧 ‘우리가 돌아오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 자신과 이삭이 ‘함께 돌아오겠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We will come back agai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말은 크게 문제가 될만한 말입니다. 번제물로 죽임이 될 아들 이삭이 어떻게 아브라함과 함께 돌아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미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죽일 각오를 하고 떠나왔고, 종들을 중도에 떼어놓은 것도, 아들을 죽일 때에 종들이 그 일을 말릴까 해서 그리한 것인데, 어떻게 아브라함은 자기가 ‘아이와 함께 돌아오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이 수수께끼 같은 말에 대한 해답을 히 11:17 이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할렐루야!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씨’였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실 때, 아들 이삭을 통하여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의 씨’를 설혹 번제물로 바칠지라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아브라함은 분명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종들을 떼어놓은 다음, 아들 이삭 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그 때에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이상하다는 듯 질문을 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수천 년을 두고 만인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부 오리겐은 진정 구원받은 성도는 누구나 이 기사를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고 토로하였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바로 지금 드리러 가고 있는 번제의 제물인 줄을 꿈에도 모른 채, 제물로 쓸 양은 어디에 있느냐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찢어질듯 하였을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격정으로 아들을 껴안고 통곡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의 이 말은 나중에 예언처럼 적중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드디어 하나님께로부터 지시 받은 땅 모리아 산에 이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때 이삭은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소년 이삭도 자기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겠지만, 순수히 아브라함에게 묶이었습니다. 드디어 칼을 들고 막 그 아들을 향하여 내리치려는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는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이 다급하게 들려왔습니다. 계속해서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 들려왔습니다. 만약 그 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더라면, 기독교는 영원히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이비 종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침내 큰 시험에서 합격하고, 이어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이 따라왔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마리 수양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예. 바로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 이 말은 미래의 역사에서 또한 온전히 성취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2천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같은 장소에서 그의 한 어린양을 번제물로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기의 아들을 제물로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희생과 헌신은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삭은 번제물이 되려다가 그만 두었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자식을 죽도록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죽여야 하는 아브라함의 아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너희의 죄 때문에 독생자를 죽여야 하는 내 아픔과 슬픔을, 그리고 사랑을 너희가 깨달아 알기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피맺힌 음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내 아들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결국 아브라함을 통한 시험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너무도 감동 깊은 기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날에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축복의 약속을 다시 확증해주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하여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시험에 합격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로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 우리 교회당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처럼 순종의 제단이 되도록 합시다. “네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이와 같이 ‘믿음’과 ‘순종’이란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삼상 15:22에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과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종에게도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래 전 광주 교회 부목사로 사역할 때, 장로 피택을 앞두고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는 장로님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는 물론, 목사님에게도 순종할 줄 아는 일군을 뽑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과연 훌륭한 장로님이시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2)우리 교회당은 모리아 제단처럼 희생의 제단, 헌신의 제단이 되도록 합시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전날에도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바치는 아브라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네가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인정하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 말씀이 이 시간 우리의 심령을 사로잡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일 하루도 온전히 바치지 못한다면, 온전한 십일조 생활 하나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성도들의 아낌없는 물질의 희생을 통해서 이토록 아름답고 웅장한 새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이 귀한 일에 전혀 동참하지 않고서 어떻게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힘이 들더라도 최소한 내가 앉는 의자 하나 정도의 헌금은 할 줄 아는 양심이 바른 신앙 양심이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해서 번성의 축복, 복의 근원이 되는 큰 축복을 받았는데, 너는 입만 열면 “하나님 나에게 복을 주십시오.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채워 주십시오. 내 자녀도 내 가정도 내 사업도 복을 주십시오.”라고 간구하면서, 너도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아끼지 아니했느냐 자신을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이 물질이 되었든지, 시간이 되었든지, 건강이 되었든지, 생명이 되었든지,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단처럼 자신의 이삭을 아낌없이 바쳐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고, 여러분과 이 제단을 통하여 천민이, 만민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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