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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한 자의 꿈 (갈 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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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 자의 꿈 (갈 6:11~18)


• 대결

며칠 전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는 길에 만났던 에피소드로 설교를 시작할까 합니다. 승객이 많지 않은 낮 시간이라 자리는 여기저기 비어 있었습니다. 통로를 중심으로 제 건너편에 한 젊은이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다리를 앞으로 뻗은 채 반쯤 누운 자세로 음악을 듣고 있었습니다. 참 보기 싫었습니다. 다음 정류장에서 그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 하나가 타더니 뒤쪽으로 가려다가 그 젊은이 앞에 이르렀습니다. 피해 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가만히 그 젊은이의 뻗친 다리 앞에 멈춰 섰습니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들 사이에 오고가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리 치워, 이 얼간아!’ ‘이건 또 뭐야, 옆으로 비켜서 가면 되지. 한번 해보자는 거야?' 앉아 있던 젊은이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리를 접었습니다. 불쾌하다는 표현을 그리 한 것이지요.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던 젊은이도 아주 천천히 뒤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득의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광경이었는데 제 마음은 아주 서글퍼졌습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을 넘어 서글프기까지 했던 것은 그 젊은이들의 왜소해진 영혼을 엿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문득 ‘대결’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일상생활을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는 대결적인 사고를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의와 진실을 지키기 위해 불의와 거짓에 맞서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이기지 않아도 되는 싸움에 감정을 상하거나 목숨을 걸 때가 많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라는 시에서,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모처럼 먹은 갈비에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악을 쓰고,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자유를 요구하지는 못하고 야경꾼에게나 큰 소리를 치는, 절정에서 조금쯤 비켜선 채 옹졸하게 반항하는 자신의 모습을 통렬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시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삶의 ‘本’을 든든히 붙잡지 못할 때 우리는 지엽말단에 집착합니다. ‘본’을 붙잡은 사람일수록 지엽말단의 문제에 너그럽습니다. 대결적인 태도보다는 포용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사나운 강아지 콧등 아물 날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늘 다른 이들과의 보이지 않는 대결로 인해 피곤합니다. 우리는 괜히 예민해져서 스스로 상처를 받고, 남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우리가 진짜 싸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그런 싸움꾼과 만나게 됩니다.


• 십자가만 자랑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사도의 언어는 격정적입니다. 서신의 첫 머리에 다정한 인사말 대신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그릇된 교훈에 미혹된 교인들을 향해 ‘어리석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은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의 언어가 이렇게 격정적인 것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자유가 훼손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만년에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던 바울은 이 서신을 젊은 벗들의 도움을 받아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는다’고 말합니다. ‘직접’이라는 단어와 ‘큰 글자’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여기서 ‘큰 글자’란 글자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그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입니다. ‘직접’이란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가슴에 명심하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그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그 표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이미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복음적 자유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이끌어 정신적인 이집트 땅으로 이끌려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을 준수하게 하고, 할례를 받게 하려는 사람들의 내적인 동기를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칠거칠한 십자가를 율법준수라는 천으로 감싸 매끈매끈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 동기는 물론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이 당연히 봉행할 국가 의식이라며 신사참배를 권고하던 이들의 논리도 이와 같았습니다. 

둘째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은 일쑤 이런 영적 함정에 빠져들곤 합니다. 나는 이들의 모습에서 얼핏 교인 수를 자랑하는 목회자들의 얼굴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랑할 것은 교인 수도, 화려한 교회 건물도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말은 우리를 참 초라하게 만듭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14a)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이런 고백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는 선뜻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십자가는 추상화된 기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던 30대 청년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를 조롱하는 인간의 야수적 본능이 드러난 곳입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조롱하고 죽이려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가 드러난 자리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 자유

바울도 물론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이나 가르침에 대해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십자가입니다.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 사제 예수님, 바로 그 예수님을 통해 바울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과 만났던 것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벌거벗은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옛날 임금들은 스스로를 ‘寡人’ 혹은 ‘不穀’이라 일컬었습니다. 부족한 사람, 씨알이 들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불곡임을 알지 못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들도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십자가에는 자기희생도, 원수까지도 품어 안는 사랑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와 입장을 달리하는 이들에 대한 무시와 저주뿐입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 바울은 자신의 생의 비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14b)

대단한 말입니다. 바울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자유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죽은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서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진리의 길에서 경험한 지극한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어정쩡하게 타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불의와 맞섰습니다. 그 결과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자유라는 옥동자를 낳기 위한 산고였습니다. 그는 그 고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발견했습니다. 삼 껍질을 벗기고 남은 줄기를 저릅대라고 하는데, 세상에는 고난을 통해 저릅대처럼 약해져서 툭툭 부러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불에 연단한 쇠처럼 더욱 검질기고 단단해지는 이도 있습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莊子 외편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장자는 활 쏘는 사람을 등장시켜 외부 세계가 우리 마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띠고리를 내기로 걸고 쏘면 마음이 걸리게 되고, 황금을 내기로 걸고 쏘면 눈이 가물가물하게 된다. 그의 기술은 항상 같지만 아껴야 할 물건이 있게 되면 밖의 물건이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밖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자기 속마음은 졸렬해지게 마련이다(以瓦注者巧, 以鉤注者憚, 以黃金注者殙. 其巧一也, 而有所矜, 則重外也. 凡外重者內拙, 莊子, 외편 제19편, 達生4) 

올림픽 양궁 경기를 보신 분들은 이 말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고 말하는 바울 사도의 모습은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는 더 이상 지켜야 할 자기가 없었습니다. 자기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구하니 사소한 근심걱정이 그의 중심을 흔들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구원이라는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르러야 할 자리가 여기가 아니겠습니까?


• 스티그마타

바울은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 그게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들에 맞서 그렇게도 치열하게 싸운 사람의 말 같지 않습니다. 그럼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것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롬2:28-29)

이런 할례를 받으셨는지요? 마음에 할례를 받았는지는 그의 마음 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색하고 교만하고 사납고 무정한 사람들은 천하에 없는 소리를 한다 해도 아직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우리의 존재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바울도 ‘새롭게 창조된다’고 피동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은총은 누구에게 주어질까요?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갈망한 끝에 몸에 그리스도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났던 것과 같은 상처, 즉 五傷을 받았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것을 인간 영혼의 오름길을 다 오른 징표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면서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닌다”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욕과 박해와 죽음조차 견뎌낸 흔적, 갈망하기에 얻은 상처, 바로 그것이 자유인의 표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몸에 그리스도를 위해 입은 상처가 있는지요?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가 감수한 고통이나 소외 혹은 손해가 있는지요?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는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음을 인증해주는 stigmata가 새겨져 있을 겁니다. 그 낙인이 있는 한 세상의 어떤 힘도, 사탄도 우리 영혼을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이제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는 불신과 절망의 구덩이에서 벗어나, 참 사람 된 기쁨에 젖어 서로 아끼고 떠받들며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립니다. 날마다 새로운 존재로 창조되기를 갈망하며 사십시오. 매 순간 그리스도의 평화가 승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렵더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내려놓으십시오. 언제라도 주님의 비상소집에 응할 준비를 하고 사십시오. 주님이 찾으실 때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아낌없이 바치며 사십시오. 그때 우리 속에는 자유의 공간이 넓어질 것입니다. 자유인의 꿈, 이것이 있을 때 우리는 욕심의 중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 곧장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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