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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로 승부하라(2) (마 13: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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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로 승부하라(2) (마 13:18~23)
  

할렐루야!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는 우리들을 너무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기쁨으로 받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큰 은혜를 베푸시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인천공항에서 ‘말레지아 코타 키나발루’에 도착하여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비행기로 ‘보르네오섬 시부’로 날아가서 ‘이반 YMCA CAMP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화요일 오후부터 이반지역 기독교청년 연합수련회를 인도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여섯 분의 목사님과 행사진행을 위하여 동행한 11명의 교우들이 함께 기도하며 그들을 섬겼습니다. 300여명의 말레지아 청년, 청소년들과 목회자 30여명이 아침 8:30부터 밤 10:30까지 계속된 집회에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금요일 밤 비행기로 출발하여 토요일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여 주셨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집회에 참석한 젊은이들은 순수하였습니다. 열심히 찬양하고, 지도자들에게 잘 순종하고, 끝까지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앙생활 시작한 이래 이와 같은 집회는 처음이었고, 해마다 이런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말레시아의 교회와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위대한 꿈을 꾸고,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가 심는 씨앗들은 지금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지만 10년, 20년, 30년 후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고 훨씬 더 많은 열매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씨앗을 심어놓고 빨리 무슨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조급해하거나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심은 씨앗은 때가 되고 조건이 갖추어지면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이징올림픽 마지막 날인데 별 사고 없이 끝나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어제 야구금메달은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야구가 미국과 일본과 쿠바를 이기고 금메달을 따다니요! 우리나라는 204개 참가국 가운데 13개의 금메달을 비롯하여 많은 메달을 획득하여 7위의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이 씨를 뿌립니다. 그 씨들은 각기 다른 토양에 뿌려집니다.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집니다. 굳어있는 길바닥 위에 그대로 노출 되어 있는 씨앗은 싹을 틔워보지도 못하고 새들의 밥이 되어버립니다. 

다른 씨앗은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집니다. 씨앗은 곧 싹을 내고 곧 잘 자랍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하여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말라 타 죽고 맙니다. 

또 다른 씨앗은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집니다. 가시나무의 강한 뿌리사이로 씨앗은 뿌리를 튼튼히 내리지를 못합니다. 싹은 나지만 약한 뿌리에서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무성한 가시나무 가지들 틈바구니 사이로 간신히 자라나는 싹은 꽃이 피어야할 시간에 꽃다운 꽃을 피우지 못하고 결국은 기대할만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씨 뿌리는 자가 뿌린 씨앗의 대부분은 아주 좋은 땅에 뿌려집니다. 적당히 땅에 묻힌 씨앗은 싹을 내고 잘 자랍니다. 향기로운 꽃을 피워 벌과 나비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사람에게는 맑고 향기로운 공기와 꿀을 제공하고 마침내 튼실한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어떤 것은 100배, 다른 것은 60배, 또 다른 것은 30배를 맺습니다. 

이 비유의 뜻을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친절히 설명해 주신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가르침의 핵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비유해석의 결론은 23절입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육십 배, 삼십 배가 되느니라.”

무릇 모든 일에 열정을 쏟아 수고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게임에 참가한 선수들 모두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참가하는데 뜻을 둔 것은 아닙니다. 금메달10개에 10위를 목표를 하고 노력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농업시험장에서 토지에 따른 결과의 차이를 연구하기 위하여 씨앗을 뿌려 그 결과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농부는 단 하나의 목표-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해석은 분명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서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느냐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땅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해결해야할 네 가지 사실을 가르칩니다. 
“좋은 땅”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19절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실망을 희망과 기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악한 자 곧 사탄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말씀을 들으나 전혀 아무런 느낌 없이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어떤 말씀을 들었어도 말씀에 대한 어떤 감각도 없습니다. 
무관심합니다. 

1) 거듭된 실망으로 체념했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것들에 의하여 실망하여 왔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의 어떤 것에도 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욕이 없습니다. 서민생활을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정치인들의 화려한 약속에 하도 많이 속아왔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는 관심이 없습니다.  

2)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기 속에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가치관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도자급에 해당되는 당시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들의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을 말해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조용히 듣지 못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차분하게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작년에 출판된 “경청”이라는 책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주인공 ‘이토벤’을 통해서 경청의 소중함을 말합니다. 평소에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을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립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수 없게 되자 자신의 독선적인 행동을 뉘우치고, 팀원의 말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또 팀원들은 이런 ‘이토벤’을 보며 서로 마음을 녹이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들은 ‘마음의 소리’로 상대와 의사를 소통하게 됩니다. 공감과 상생을 위한 경청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전옥표 장로님이 쓴 “이기는 습관”에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에 입사하던 첫날, 아버지 故이병철 회장은 마음의 지표를 삼으라고 이 휘호를 주었으며, 이건희 회장은 이 휘호를 벽에 걸어놓고 늘 보면서 스스로에게 잘 듣고 있는가를 묻고, 더 잘 들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기대하면 들립니다. 
겸손하면 들립니다.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지혜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들을 수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성경 로마서10:17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13:9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편지에서 계속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2:7, 11, 17, 29, 3:6, 13, 22)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둘째, 20,21절입니다. 

완악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경청을 잘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남의 말을 잘 들어줌으로 말씀하시는 분의 권위를 세워드리고 기분 좋게 해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내 가슴 속 깊이 새겨서 그 말씀으로 내 삶이 변화를 받고 힘을 얻어 승리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내 삶에 그렇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반드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의 가치관을 그대로 따를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가치관을 따라 살 것이냐를 결단해야합니다. 
이 단계에서 어떤 사람은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습니다. 
왜냐하면 결단하기 위해서는 버려야하고 내려놓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12:1-3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람을 선택하여 부르십니다. 
“내가 너로 축복의 큰 민족을 이루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브람 때문에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먼저 아브람의 편에서 결단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가 살아온 땅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그 땅을 떠나야 합니다. 우르와 하란을 다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지역입니다. 그 땅은 우상숭배가 가득한 곳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축복받은 새 백성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그 우상숭배의 습관과 삶을 떠나야 합니다. 
아브람이 그 곳을 떠나자 그에게 생겨난 새로운 습관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세기12:7, 8)

하나님 앞에 진정한 제단을 쌓기 위하여 모든 우상숭배를 깨끗이 버려야합니다. 
여호수아24:14,15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무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끊이지 않는 싸움은 바로 이 싸움이었습니다. 
옛날 섬겨오던 그 신과 신앙으로 살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겠습니까? 
신앙생활의 어느 지점에 이르게 되면 이 결단은 필수입니다.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봉사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교회에 다니셨죠?” 그는 약간은 놀라며 말했다. “네, 아이들과 다 같이 다녔는데 지금은 다니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니까 자꾸만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아 그만 두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내 삶에 깊이 뿌리내리려면, 내 마음의 돌들을 거두어 내어야합니다. 버려야합니다. 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셋째, 22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 자요.” 

결실하기 위하여 반드시 극복해야할 두 가지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염려’입니다. 
염려를 믿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는 것입니다.(누가복음12:22) 
우선 눈앞의 걱정 때문에 감히 영원의 세계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세상의 걱정이 정말 많은 사람은 오늘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정말 가난한 사람이기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란 사실입니다. 믿음의 생활에 있어서 세상의 염려는 커다란 장애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의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며 말씀하시기를 심지도 않고 거두어들이지도 않지만 굶어 죽지 않는 새와 길삼도 하지 않지만 입을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프리카와 북한에는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더욱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먹을 것이 충분하고 입을 것에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더 잘 먹고 입기 위하여 주일도 범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려고 할 때 내가 가장 걱정하고 염려했던 것은 혹시 예수 안 믿던 가정에서 예수 믿어서 가족들에게 피해라도 입힌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가 내 마음에 심어 놓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다가오는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 염려는 예수 믿다가 혹시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유혹할 때에 사단이 제시한 유혹은 “하나님처럼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걱정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의 삶 속에서 추방한 사람과 사회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문제보다 더 크시고 위대하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살면 이 모든 것을 은사로 다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원수들은 항상 이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이스라엘 앞에 선 블레셋 군대의 대장군 골리앗이 그렇게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유다를 공격해온 아람나라 군대장관 산헤립이 그렇게 하나님을 모욕하며 유다 시민들에게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골리앗장군은 소년 다윗의 손에 죽었습니다. 산헤립은 하루 밤 사이에 몰살하는 자기부하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으나 결국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히브리서11:6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다른 하나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거룩한 욕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사탄이 다가와서 유혹한 것이 바로 이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4:8,9)
정말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어느 때인가 반드시 극복해야할 장애가 바로 물질적인 문제입니다. 돈의 욕심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면 반드시 무너지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이 장벽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생 도둑질하며 살다가 결국은 은 30냥에 스승 예수님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헌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젊은 부자인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영생의 문제를 들고 찾아 나왔다가 결국 재산분제 때문에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가서는 지금까지도 오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것이 더 값지고 최선의 것입니까? 
십일조헌금을 드리는 것은 모든 물질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어떻게 되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믿음의 생활에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까? 
그러면 과실을 많이 맺게 됩니다. 

진리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말씀을 깊이 새기고 묵상하며 그 말씀의 진리를 삶에 적용하기 위하여 힘쓰십시오.
마음에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멀리하십시오. 그리하면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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