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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그 다음(3) :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 삶의 예배자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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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구원, 그 다음은(3) (롬 12:1~2)
  

생활고로 인하여 한 크리스천 여인이 아이를 한강에 빠뜨려 살해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아이는 죽이고 자신은 죽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긴 형사가 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아이만 죽이고 엄마인 당신은 살 생각을 했습니까?

그러자 아이를 죽인 엄마가 말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힌 형사가 이어 다시 물었습니다.
“아이를 죽인 것은 죄가 아닌가요?”

엄마는 또 서슴없이 말했습니다.
“그 죄는 회개하면 용서를 받거든요.”  

지금 말씀을 드린 것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연실색 할 일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같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우리들은 경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두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고, 둘째는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잘못 가르친 목회자들의 책임이요, 후자는 잘못 배운 평신도의 책임입니다.
저는 오늘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운 이 부분에 주목하면서 로마서 강해 45번째의 설교를 선포하고자 합니다.


본론)  

저는 지난 2주에 걸쳐서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라면 구원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대답하였습니다.

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② 자기주장을 하나님 앞에서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갖추어야 하는 세 번째의 내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3)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본문 1절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영적인 예배’이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지체들이 주목해야하는 단어는 ‘영적’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서 ‘영적’이라고 해석된 헬라어 ‘logikhn’은 문자적으로 ‘합리적인’혹은 ‘이성적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의 고전이라고 하는 KJV 성경에서 ‘영적인 예배’라는 부분을 
‘reasonable service’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유가 있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합리적인 예배라는 뜻입니다.
근거가 있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이성으로 드려지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 본문 1절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곤 합니다.
우리들이 이성을 갖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별의 삶을 살 수 있으며 또 이성이 무시되지 않는 예배를 드릴 때 내 주장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를 가르쳐서 흔히 하는 말이 체험의 종교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한 지 20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20년의 목회의 여정을 통하여 수없이 본 것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기적들을 맛본 것입니다.

불치의 병자들이 하나님의 고치심으로 일어서고,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불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많은 간증들을 보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기적들을 베푸셨기에 하나님과 이성은 서로 대립의 각을 세우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성을 무시하시거나, 이성을 배제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성을 존중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성을 뛰어 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에게 말씀드린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가 롬 8: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들이 이 땅을 사는 동안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땅을 사는 동안 싫든 좋든 경험해야 하는 환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환란을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의 끝자락에서 나를 승리하게 만드실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 8:18절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영광, 승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앙의 여정에서 생각을 해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그냥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보니까 그런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8절의 ‘생각하건대’의 헬라어 원어는 오늘 본문에 로마서 12장 1절의 ‘영적인 예배니라’의 영적이라고 번역된 단어와 어원이 같은 ‘logizomai’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기조마이’라는 단어는 역시 ‘이성을 토대로 하다.’뜻입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며, 적어도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는 내가 하나님께 삶의 예배를 드릴 때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확신합니다.

내가 적어도 구원을 받은 이후 그 다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근거 있는 삶의 예배를 드리며, 내가 얼마나 이성적으로 납득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느냐의 문제임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저에게 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신앙이 믿음의 문제이지 어떻게 이성의 문제입니까? 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노파심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성을 뛰어넘는 분이시지 이성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오늘 우리 교우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은혜는 우리들이 적어도 구원을 받은 존재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리적이고도, 이성적인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성을 무시하지 않은 삶의 예배는 과연 무엇일까요?
  
Ⓐ 합당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창 23장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함에 도전을 주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했던 아내가 127세를 향유하고 가나안의 땅인 헤브론의 기럇아르바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내를 매장할 매장지를 헷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사려고 하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당시의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사람이 아니라 거류하는 나그네였기에 아내가 죽은 기럇아르바에 매장을 하려면 반드시 그곳 지역의 주민들에게 동의를 받아야 했기에 그곳의 시민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이방인들이었던 헷 족속의 사람들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매장을 허락하여 주었고, 뿐만 아니라 매장할 땅을 무료로 주겠다며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습니다.
시쳇말로 이게 웬 떡이냐고 즐거워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부의 가치는 땅이었는데 이방인에게 땅을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세히 기록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이 헷 족속들의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 존재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너무나 좋은 기회였습니다.
흔히 쓰는 말로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창 32장의 보고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사람들 앞에서 몸을 굽히고 엎드리며 사의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헷 족속들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을 하며 밭 값을 지불하겠다고 밝힙니다.

창 23:1-16절까지에서 무려 두 번이나 호의를 베푸는 헷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하며 사라의 매장지인 막벨라 굴과 그 주변을 은 400세겔을 지불하고 그 땅을 구입하게 됩니다.

기사의 마무리 부분인 창 23:15-16절입니다.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성경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게 지나가는 이 구절의 내용을 묵상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신앙인으로 영적인 자부심을 느끼며 감사해 하곤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호의를 감사하게 여기며,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기개를 보인 아브라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의 적절한 예의를 만나며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드리는 이성적인 예배는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지체들은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에 심방을 갖다가 불신앙인 인 한 지인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식당에서 저녁에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한 교회에서 그 식당으로 단체 식사를 하러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 손님들이 들어왔는데 일행 중에는 어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이들까지 동행을 한 것입니다.

저녁식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공동 식당에서 아이들이 천방지축을 뛰고, 달리기를 하고, 씨름을 하면서 식당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식당에 함께 식사를 하는 다른 사람들이 아이들을 제지하기를 바랬는 데 당사자 부모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러다가 일이 나지 했는데 결국은 일을 냈습니다.
식당의 어항을 깬 것입니다.
식당 주인이 어항을 깬 것을 보고 참았던 울분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부모들이 주인에게 삿대질을 하며 왜 그곳에 어항을 놔두어 우리 아이들이 다칠 뻔하였다고 적반하장으로 손해배상을 거절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 말을 전언하는 그 분이 그 날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의 신자들은 그런 예의 없는 신자들로는 만들지 마십시오.”

불과 몇 분 전에 식사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한 뒤에 일어난 일을 목격한 터라 그 분은 그 날 아주 강하게 저에게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날 숨기려고 했지만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고 땀을 뺐던 경험이 있습니다.

교우들 중에 행사 차 참석하셨다가 피로연이 뷔페식이 있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신 경험들이 한 두 번씩은 있을 것입니다.
진해에서 목회를 할 때 한 분은 그런 날을 살림 장만하는 날로 정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뷔페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난 뒤에 가방에 싸가지고 오는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고 난 뒤에 하나님께 이성을 무시하지 않은 삶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의에 맞는 삶을 사는 것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6장을 설교할 때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롬 16:1-2절을 보면 바울이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이었고, 바울의 후견자였던 뵈뵈집사를 로마교회에 추천하면서 전한 메시지가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바울이 부탁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뵈뵈 집사를 로마교회에서 영접할 때 ‘합당한 예절’로 영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합당한 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axiw"’는 ‘가치가 있는’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뵈뵈를 영접할 때 가치 있는 모습으로 예의를 갖추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정말로 이렇게 가치가 있는 품격이 있는 예의를 갖춘 신앙인들로서 사심으로 하나님께 이성을 무시하지 않은 삶의 예배를 드리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셈하며 사는 삶입니다.  

본문 1절에서 소개되고 있는 ‘영적인 예배’의 영적이라고 번역된‘logikhn’의 또 다른 의미를 소개하면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계수한다.’, ‘셈한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로기켄’의 ‘계수’의 의미와 ‘셈’의 의미는 철저하게 영적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세운 목회철학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에게 여러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어 이제 우리 교우들도 잘 알고 있는 철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계산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면 하나님도 나를 계산하신다.”는 철학입니다.

요 16:8-11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주님은 반드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사역을 계산한 자를 계산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 전제 위에서 목회를 하려고 가능한 최선의 목회를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위한 목회를 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느끼는 은혜 중에 하나는 제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이것은 참 중요한 정답이라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계산하는 신앙, 계산하는 헌신, 계산하는 헌금, 계산하는 봉사 등은 미안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부교역자들과 직원들과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며 동역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부교역자들과 직원들과 동역하면서 제가 큰 소리를 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계산할 때입니다.
불행한 것인지, 아니면 다행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계산하는 것은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에 눈에 보이게 계산하는 행위는 저 역시 개인적으로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저와 함께 동역하는 지체들에게도 이것은 아주 강하게 피력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인간관계의 삶의 연속선상에서 자기만을 위한 약삭빠른 계산은 하면 안 되지만 우리가 계산을 해야 하는 한 가지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계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서는 우리들이 셈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은 우리들은 계산하여야 합니다.

저는 적어도 내가 구원을 받은 뒤에 삶으로 드리는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 예배를 정의한다면 서슴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계산하며 사는 삶의 예배라고 정의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하이마트에 갔습니다.
컴퓨터 스피커가 많이 노후가 되어서 소리도 잘 안 들리고 해서 스피커를 하나 샀는데 사 온 물건이 불량이라서 그것을 환불이나 다른 물건으로 교환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똑같은 일로 두 번째 하이마트를 간 것입니다.
교환해 온 것이 또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습니다.

두 번째는 항의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물론 그 스피커는 종소업체를 통하여 납품을 받은 물건이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로 이야기하면 하이마트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이마트로 납품된 이상 그 제품은 하이마트의 quality를 갖고 판매가 되는 것이기에 하이마트에서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방문한 2층 매장의 한 부분의 홍보 문구를 문득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최고의 고객입니다.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로 당신의 품격을 높여 드리겠습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갑자기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말로만’  

교우 여러분!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살 때 나를 기쁘게 해주는 그곳에 다시 가거나, 기억에 담습니다.
신용으로 고객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근시안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거시안적인 안목으로 보면 기업의 최고의 자산입니다.
사람이 나에게 만족을 주고 나에게 기쁨을 준 것이나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인지상정 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러한 기쁨을 주는 것을 하나님에게로 소급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민 25: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바알브올의 범죄를 이스라엘 족장 공동체가 범했을 때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염병을 보내셨고 24,000명씩 죽어나갈 때 범죄하고 있는 족장 시므이와 수루의 딸 고스비를 청년 제사장 비느하스가 창으로 찔러 죽이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행하신 말씀입니다.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른바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인동형동성론’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속성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주님이 질투하신다는 것은 주님은 우리들이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 만족하시는 분이라는 기본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영적인 셈을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사 시절 때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을 보필하며 사역했습니다.
초기에는 잘 몰랐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담임목사님의 스케줄이나 행동의 동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담임목사님의 동선에 따라 눈에 띠지 않는 범위에서 사역이 불편하시지 않게 미리 제반적인 일들을 미리 해 놓았습니다.

담임목사님에게서 시선을 잠시라도 띠우면 다음 스케줄을 미리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배웠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잠시라도 외면할 때 하나님께 올인할 수 없겠다는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히 11:6절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기자가 요구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셈하며 철저하게 하나님께 올인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3주 동안 로마서 12:1절의 말씀으로 은혜를 추적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감격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은혜의 감격이 지속되고 그래서 항상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삶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까지 세 가지의 은혜를 찾아냈습니다.

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② 자기주장을 하나님 앞에서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③ 이성을 무시하지 않는 삶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영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설 것이며, 영적으로 구원의 감격 뒤에 더 큰 감격을 날마다 맛보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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