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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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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그리스도인으로서 시편 23편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편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시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작품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시간 저는 시편 23편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 관해서 일깨워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신다면 그 자신은 하나님의 양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양을 대대적으로 사육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유목민으로서 조상 대대로 양을 사육했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사육하는 목적이 고기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젖이나 털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양은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서로에 대하여 친숙했습니다. 

목자는 자기가 치는 양들의 이름 뿐 아니라 저마다의 특징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캄캄한 밤중이라도 목자는 양의 머리에 속을 얹어보기만 하면 그 양이 자기 양인지 아닌지, 또 그 양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맞출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압니다. 특히, 자기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고 분간한다고 합니다. 밤중에 사람이 다가오면 그가 자기 목자인지 아닌지 눈으로 분간할 수 없지만, 목자의 음성을 들어보면 금방 알아챕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2천 년 전 유대 나라의 여느 목장의 광경을 상상케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당시에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단지 가축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처럼 여겼습니다. 

창세기 31장에 보면, 야곱이 얼마나 철저한 사명감을 가지고 양떼를 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양떼를 맡아서 쳤는데, 맹수에게 물려 찢긴 것이 있으면 자기의 것으로 그것을 보충하였고, 도적을 맞으면 그것도 물어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밤낮으로 정신을 차리고 양들을 보살펴야 했습니다. 40절에 보면,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시편 23편을 지은 다윗의 목동시절에 관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이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전장에 나간 형들을 찾아갔다가 블레셋 진에서 나온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의분을 참지 못하고 자기가 나가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섰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의 말을 듣고 그를 불렀더니, 다윗이 사울 왕에게 말하기를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하니, 사울이 보니까 아직 앳된 소년인지라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그러자 다윗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다윗의 말에 사울 왕은 감동해서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고 골리앗과 싸울 것을 허락했습니다. 다윗의 대답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양들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자나 곰이 양을 물어 가면 즉시로 쫓아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 양을 찾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한 것은 이와 같은 그의 경험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그처럼 목자 노릇을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인 자기를 얼마나 더 잘 보살펴 주시겠느냐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만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다윗은 말씀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가 성 우물가에서 물길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하시니, 그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말하기를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갈급함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돈을 가지고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육신의 즐거움을 통해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좀 수준이 있는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서, 또는 철학이나 종교를 통해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같은 시도는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할지라도 영혼의 만족이 없다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영혼의 만족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사람이라야 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말씀하기를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가는 부족함이 없는 최상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제나 푸른 초장, 쉴만한 물 가로만 인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4절에 보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 가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힘겨웠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성도들도 시련과 역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해 주시므로 우리는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 할렐루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그곳이 곧 천국입니다. 


두 번째로,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목자는 양들을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 가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라도 늘 함께 하십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 챈 일로 고향을 떠나 하란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할 때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해가 지자 야곱은 넓적한 돌을 하나 구해서 베게하고 땅을 요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보니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셔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에서의 복수가 두려워서 도주하던 야곱은 부모를 떠나 외로웠습니다. 또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두려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란에서 어떻게 지낼 것인지 걱정스럽고 불안했습니다. 그는 이제 혼자서 세파를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계셔 그가 어디를 가든지 지켜주실 것이며 드디어는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난날 야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와도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가 홍안의 소년으로서 골리앗을 대적하러 나가려 했을 때, 사울 왕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고 만류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다윗은 자기의 용맹과 힘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 것을 믿고 골리앗과 싸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하면 키가 3미터나 되는 거인이라도, 어려서부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용사라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정말로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까지 다윗은 전쟁에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맹수를 물리친 적은 있지만 사람을 죽인 경험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워 떠는 골리앗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히 골리앗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그가 물매로 치니 돌이 날아가서 골리앗의 이마 한복판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달려가서 쓰러진 골리앗의 칼을 빼어서 그 목을 베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스라엘 군대에 다윗보다 뛰어난 용사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울 왕의 휘하에는 용맹스런 장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골리앗을 두려워해서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해서 이스라엘의 용사들은 단순히 인간의 역량만 가지고 비교했지만 다윗은 그의 목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골리앗과 같이 감히 겨룰 엄두도 낼 수 없는 기막힌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다윗처럼 한없는 용기를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떠날 때가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일은 없습니다. 인생의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다가옵니다. 다윗이 밧세바의 일로 범죄했을 때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불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양이 목자를 떠나 외딴 곳으로 나간 것과도 같습니다. 범죄하였음에도 다윗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군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령은 곤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를 다윗에게 보내어 그의 죄를 지적하게 하십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다윗을 찾아주셨습니다. 나단의 지적을 받은 다윗은 즉시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 헤맬 때,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죄로 상한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적해 주시고 성령의 감화를 주셔서 죄를 회개하게 하셔서 다시금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의 위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생겨남을 알아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언제나 목자되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동행함으로써 의로운 길로 인도함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시편 23편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성도들에게 최후의 승리를 약속합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상은 잔칫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성대한 잔칫상을 베풀어주신 것은 하나님을 목자로 믿고 따르는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셨다는 것은 연회에 참석한 귀빈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대우하듯이, 하나님께서 원수들 앞에서 다윗을 특별히 대우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내 잔이 넘친다는 것은 그가 받은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 시편의 고백은 다윗의 생애 가운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사무엘상을 읽어 보면, 다윗이 얼마나 큰 환난을 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다윗처럼 힘겨운 삶을 경험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가 골리앗을 죽인 이후로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10년간이나 황무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숨어 지냈습니다. 모압 나라와 원수인 블레셋 왕에게까지 가서 몸을 의탁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 왕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다윗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원수 앞에서 잔칫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그 머리에 부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한 세상 사노라면 수많은 영적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끊임없이 죄와 세상의 유혹과 자신의 정욕과 싸워야 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결은 하나, 목자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담대하게 영적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시험과 시련을 만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행 14:22).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위대한 영적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혼자서 로마 교황과 모든 천주교 세력에 맞섰습니다. 그 싸움은 누가 보아도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알 5세가 루터 사건을 보름스 시에서 회의를 열어 다루기 위해 루터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습니다. 카알 5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편이었으므로 그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루터의 친구들이 회의에 참석하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말하기를 “보름스에 있는 집들의 지붕 위에 있는 기와장 만큼 많은 마귀들이 있을지라도 나는 가겠다”고 했습니다. 

루터가 예정된 날자에 회의장에 출두하니, 회의장 중앙에는 황제가 위용을 갖추고 왕족들과 함께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제후들과 귀족들이 입석해 있고, 대주교들과 주교들 수도원장들, 교황 대사들, 그 외에도 많은 인사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루터는 혼자였습니다. 로마 교황청을 대표해서 에크 박사가 루터에게 지금까지의 주장을 철회할 것인가 옹호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그 때 루터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해 정죄되지 않는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리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여기에 섭니다. 나는 달리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정말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토록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작사한 찬송가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루터가 무소불위(無所不爲)한 로마 카톨릭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주님께서 그를 대신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와 싸우실 것을 믿었기에 두려움 없이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했더니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눈앞에서 루터에게 잔칫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그 머리에 부어주셨습니다. 종교 개혁은 성공했고 로마 카톨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23편 6절에서, 다윗은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이 구절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삶을 일평생 변함없이 보살펴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다윗은 이 땅에 살 동안 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믿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한 구절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인도하실 궁극적인 목적지는 영원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약속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한 것만 보아도 그가 영원한 천국을 소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해야 하지만, 최종적인 상급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믿고 따르시면 “아멘!” 하십시다. 아무쪼록 시편 23편이 성도님들의 진실한 신앙의 고백이 되어서 일평생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가운데서 부족함이 없이 살 뿐 아니라, 날마나 영적인 승리를 구가하며, 드디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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